2002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시 「그리운 남극」 외 4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조동범 시인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다. 50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묶여 있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화려와 풍요 속에 내재된 개인의 불모화된 일상과 황량한 내면을 즉물적으로 포착, 날카로운 시선으로 차갑게 객관화해내며 사물 및 현상에 대한 부서질 듯 단단하고 정교한 묘사력을 선보인다.
심야 배스킨라빈스 혹은 차가운 도시의 상상력
시집의 제목에서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듯 이 시집에서 시인이 주목하는 공간은 “이미지의 왕국, 버거킹”(「버거킹을 먹는 여자」)으로 상징되는 “찬란과 풍요의 거리”(「르네상스 안경점」), “스타벅스에 앉아 미라가 되어가는”(「파랑」) 사람들로 넘쳐나는 도회지이다. 이미 등단 당시부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익명화되고 물화된 삶에 대한 비판이 주조음을 이루고 있다”(『문학동네』 2002년 가을호)는 평가를 받은 시인의 첫 시집은 바로 그 도회지에서 고스란히 배태되었다.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들은 그러한 성격을 또렷이 규정하고 있는바, 마치 고해상도의 마이크로필름을 인화한 듯한 선명한 묘사와 그 파장이 일으키는 저리도록 차가운 상상력이 인상적이다. 가령 “죽음을 널어 식욕을 만드는 홍등의 냉장고/냉장고는 차고 부드러운, 선홍빛 죽음으로 가득하다”(「정육점」), “안경사는 무료하게 빛나는 불빛에 밥을 말아, 천천히 늦은 저녁을 먹고 있다”(「르네상스 안경점」), “주유원의 장갑이 바닥으로 떨어진다/장갑은 바닥을 움켜쥐고/앙상하게 잠든 주유원을 바라보고 있다”(「주유소」) 등의 개성적이면서도 직핍한 묘사는 주변적 도회 공간들을 냉정하게 함축하며 쇼윈도 불빛들로 흥성거리는 도시 이면의 불모성과 황폐한 적요 등을 적확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 묘사는 표제작인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에 보이는 ‘살의’의 상상력으로 응집된다.
사람들은 거리를 가로질러 빠르게 심야로 흘러간다. (……) 아이스크림 판매점은 평화롭게 심야를 맞고 있는 중이다./평화롭게 심야가 다가오고, 심야의 아이스크림 판매점은 평화로운 살의로 가득 찬다. 평화로운 살의를 가로질러 판매원은 냉동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냉동고에서의 죽음. (……) 판매원은 희미하게 사라지는 냉동고 밖의 세상을 바라본다. 서늘하게 누워 있는 판매원은 고요해 보인다.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중에서
이 고요하고 날카로운 살의의 상상력은 도시의 요란스런 번쩍거림 뒤에 도사리고 있는 밀폐와 죽음의 이미지를 표상한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조강석은 시집의 해설에서 도회적 삶의 표징이 되는 공간들이 전시하고 있는 것이 실은 화사한 풍요가 아닌 적막한 죽음임을 밝힌다(조강석,「시적 풍크툼(punctum), 혹은 전시된 죽음과의 속도전」참조).
그리운 남극 혹은 빙원의 그리움
자본주의 도시 공간의 속성에 대한 예리한 관찰이 이 시집의 씨줄을 이룬다면 그 냉정한 시선 속에 서려 있는 차갑고 아득한 그리움은 날줄로 엮인다. 그 그리움의 원형은 시인의 등단작인 「그리운 남극」에서부터 어렴풋이 찾을 수 있다. “나침반의 바늘은 고집스럽게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 바늘의 끝을 따라가면 빙산을 만날 수 있을까”(「그리운 남극」). 그런가 하면 시인은 고물이 되어버린 냉장고에 의탁해 “고물상 입구에 버려진 냉장고. 폐허가 되어/극점의 푸른 빙원을, 까마득히/떠올리고 있다.”(「냉장고」)며 그리움의 목적지를 직접적으로 밝혀놓는다. 그리고 극점 혹은 빙원의 상상력이 실은 현대인이 잃어버린 싱싱한 야성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이 곧 드러난다. “눈 내리는 한겨울의 동물원/우리 밖의 빙점을 가늠하는/여우의 눈망울이 서늘하게 빛난다/여우의 본능은/북극으로 돌아갈 수 없는,/야성의 운명을 알고 있다/ (……) /마지막 남은 야성을 움켜쥔 북극여우 한 마리/눈보라 속으로 잊혀지고 있는 중이다”(「북극여우」). 이러한 밀폐된 도시의 그리움은 “평화로운 공중”이 되기 위해 “한 무리의 혜성처럼 질주하는 속도”(「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로 외곽으로부터의 이탈을 향한 꿈에 가 닿으며 시적 아름다움의 궤적을 이룬다. 그리고 조동범의 첫 시집은 바로 그 궤적 속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시를 언어로 지은 집에 비유할 때 조동범이 주로 구사하는 건축술은 묘사이다. 시집 한 권이 묘사로 이루어졌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는 묘사의 힘을 신뢰하는 시인이다. 짐짓 냉정한 관찰자의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시선은 주로 편의점이나 주유소 같은 현대문명의 상징물들을 향하는데 그러한 사물들을 묘사함으로써 무기력하고 불모화된 현대인의 삶을 부각시킨다. 가령 버려진 냉장고를 묘사하는 시구, “냉장고는 내장 가득 느리게 부패하던 식욕의 흔적을 더듬는다”는 우리의 마비된 일상을 섬뜩하게 환기시킨다. 최두석(시인)
“동물원의 펭귄, 물 위에 누워 나침반처럼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
“닭은 무정란 무수히 쏟아지던 과거를 들춰/아득한 모성을 더듬는다”
조동범 시인의 시는 도회적 삶의 쓸쓸함을 서늘하게 발효시키고 있다. 빙하기, 주유소, 개, 여우 등의 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야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야성에 대한 그리움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냉장고 속에 집어넣는 조동범 시인의 결투가 놀랍다. 함민복(시인)
* 2006년 3월 31일 발행
* ISBN 89-546-0126-X 02810
* 121*186|104쪽|7,500원
* 담당편집: 조연주, 오경철(031-955-8865, 3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