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 매화 그리고 봄바람이 부르는 당신, 그래서 당신
고향 땅에 발 디딘 채 아이들 가르치고 시 쓰며 강물처럼 살아온 세월, 그 동안 시인은 어느덧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렀다. 55편의 시를 4부로 나눠 단아하게 묶은 이 시집은 자연과 사람의 마음이 한데 어우러진 서정의 진경을 넉넉하게 펼쳐 보인다. 그리고 그 풍경은 시인의 질박한 시력(詩歷)과 무욕한 삶의 여정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맑고 담백한 시어들은 전과 같이 스스로의 빈터를 찾아 자리를 채워 질서를 이루고, 시인 특유의 구수한 어조는 부드럽고 자상하다.
그러나 그 말들과 말투가 어울려 만들어내는 울림 속에서는 요즘 세파에 대한 시인의 섭섭함과 늘 변함없는 자연의 섭리에 대한 고마움이 동시에 서려 있다. 시인은 자서를 통해 그 마음들을 고백한다. “인간의 탐욕과 오만이 파멸의 벼랑을 향해 치달리는, 견디기 힘든 이 치욕의 지구에도 꽃이 피고 새가 운다”고, “새삼스럽고, 놀라운 일”이라고, “그때 나를 찾아왔던 나비와 매화 그리고 봄바람” 그들에게 “늘 ‘그래서 당신’이고 싶다”고. 시인의 시들은 자연과 사람이 서로를 애틋이 위무하는 이 익숙하면서도 새뜻한 ‘관계’의 미학과 여백으로 충만하다.
잎이 필 때 사랑했네
바람 불 때 사랑했네
물들 때 사랑했네
빈 가지, 언 손으로
사랑을 찾아
추운 허공을 헤맸네
내가 죽을 때까지
강가에 나무, 그래서 당신
―「그래서 당신」 전문
바야흐로 화창한 계절에 부치는 아름다운 시(詩) 편지
시인은 시집에서 인생은 그저 흐르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상기시킨다. 팍팍한 일상과 거친 인심(人心)에 시달리며 사는 도회인의 질척하게 고여 있는 삶에 시인의 시는 한 줄기 시원한 봄바람으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꽃냄새로 다가온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때를 알아 만화(滿花)가 방창(方暢)하는 이 계절을 빌려 시인은 말없이 흐르는 삶에 대한 열망을,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은 마음을 노래한다.
산벚꽃 흐드러진
저 산에 들어가 꼭꼭 숨어
한 살림 차려 미치게 살다가
푸르름 다 가고 빈 삭정이 되면
하얀 눈 되어
그 산 위에 흩날리고 싶었네
―「방창方暢」 전문
“바람이 불면//내 가슴속에서는 풀피리 소리가”(「그리움」) 난다는 세월을 잊은 순수한 시심(詩心)의 행간을 살피다보면 “꽃이 지 혼자 폈다가/진 사이/나는 그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그래요」)는 가슴 먹먹한 독백이 마음 한편에 고요한 울림을 자아낸다. 매화가 지면 산수유가 피고 산수유가 저물면 벚꽃이 만개하는 섬진강변에서 시인은 그렇게 설레는 마음과 무위(無爲)한 삶의 갈피갈피를 시집에 담았고 “그래서 당신”들 앞으로 오랜만에 편지를 띄웠다.
유례없이 찬란한 서정, 한국시가 낳은 또 하나의 새로운 지평
김용택 하면 떠오르는 시는 팔십년대 한국 농촌시의 전형인 「섬진강」 연작과 그 농촌적 감성의 토양에서 솟아오른 연애시의 절창 「그 여자네 집」이다. 그런데 그의 시의 진화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상상력의 뿌리에는 고달픈 농사꾼이었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그늘에서 인고의 세월을 산 어머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섬진강」은 말하자면 아버지의 현실인 동시에 산업화시대 한국 농민의 현실인 고향땅의 삶과 정서를 자신의 것으로 노래한 시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김용택은 팍팍한 현실주의 안에 자신을 가두기에는 너무나도 풍성한 감성과 넘치는 예술적 취향의 소유자인 것 같다. 이 시집에서도 그의 감각은 예순 다 된 중늙은이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생생한 예민성을 도처에서 번뜩인다. 계절의 순환에 따른 자연풍광의 모양과 빛깔과 향내의 미묘한 변화들을 시의 화자는 마치 깊은 운명적 사건인 것처럼 절실하게 묘사한다. 도대체 어떻게 김용택은 이와 같은 시의 세계에 이르렀는가. 일종의 성장시라고도 할 수 있는 「어머니」 같은 작품에 그 열쇠가 암시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새벽 강을 건너가 밭을 매는 어머니의 “호미 끝에 걸려 뽑히는 돌멩이들의 아픈 숨소리”를 등뒤로 들으며 시적 주체는 “젖은 돌멩이 몸에 파인 호밋자국”이라는 아픈 다리를 건너 아버지-어머니의 그것과 격절된 더 넓고 화사한 세상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 세상에서 이룩된 유례없이 찬란한 서정에 의해 한국시의 영역은 김용택의 이름으로 각인된 또 하나의 새로운 지평을 획득하고 있다.
염무웅(문학평론가)
그물코가 많이 성겨졌다. 작은 것들은 다 빠져나간다. 월척만 걸려든다. 너와 나를, 삶과 세계를 넌지시 바라볼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긴 것이다. 안으로는 여백이, 밖으로는 여유가 흘러넘치는데, 아, 시절은 봄인 것이라, 만화방창인 것이라, 화무십일홍인 것이라, 춘몽인 것이라! 행과 행 사이를 잔뜩 벌려놓고서는, 짐짓 언어를 아낀다. 우중충한 산문의 시대를 넌지시 꾸짖는 흔쾌한 운문이다. 미니멀리즘이다. 시적 대상과 직통하는 생생한 시어들. 그래서 당신, 그래서 시인!
이문재(시인)
* 초판발행|2006년 4월 10일
* ISBN|89-546-0135-9 02810
* 121×186|96쪽|6,000원
* 책임편집|조연주, 오경철(031-955-8865, 3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