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離散)도 유목(遊牧)도 아닌
특이하다면 특이하게도, 해이수 소설은 절반이 호주가 배경이다. 등단작인 「캥거루가 있는 사막」부터가 현실의 속박에서 도망친 주인공의 호주 여행기이며, 「우리 전통 무용단」은 괄괄한 할머니 관광단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현지 가이드의 이야기, 「어느 서늘한 하오의 빈집털이」는 아내로부터 야반도주, 아니 주반도주하는 선배의 이사를 돕는 유학생의 이야기이다. 또 중편 「돌베개 위의 나날」은 영주권을 얻어 호주 이민이 되고자 하는 젊은 유학생 부부의 신산한 삶을 그린다. 주인공 사내는 아내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밑바닥 청소일에 나서지만 같은 한국인 청소업자에게 임금을 떼이고, 그 돈을 받아내기 위해 악전고투한다. 이쯤 되면 전형적인 해외이민수난사를 떠올릴 법도 한데, 그러나 해이수가 그리는 호주에서의 삶은 갑갑하고 처참할지언정 비통하거나 울분하지는 않다. 짙은 페이소스를 띠고 있으되 어딘가 아이러니한 웃음기마저 감돈다. 귀빈 여자 화장실에서 막힌 변기를 맨손으로 뚫어야 하는 참담한 현실이지만, 불법체류자임이 적발되어 한국으로 쫓겨나게 된 「돌베개 위의 나날」의 선배는 그저 “하, 참, 시드니에서 사는 게 참 똥 같다” 하고 피식거리며 싼 맥주 한 병을 나발 불고 만다.
해이수에게 호주라는 이방은 지금 여기를 벗어난 낯선 장소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생활공간이다. 비참한 이산도 아닌, 유쾌한 유목도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생활’이 해이수의 호주 이야기이다. 간혹 어떤 여행자들은 절망을 의탁할 공간을 찾아 ‘캥거루가 있는 사막’을 헤매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그가 발견하는 것은 앞으로만 달리다가 죽게 되어 있는 캥거루의 운명일 뿐, 호주는 그의 절망을 소진시키고 다시 그를 현실로 되돌려놓을 것이다.
떠나는, 그러나 돌아오는, 성장하는
호주가 무대가 아닌 해이수의 다른 소설들은 또 다르다. 「몽구 형의 한 계절」은 온갖 폼은 다 잡으면서 매일같이 빈둥거리기만 하는 자칭 소설가 몽구 형의 이야기, 「출악어기」는 아들에게 논어 맹자를 가르치고 한시를 읊으며 자신의 유랑을 낭만으로 채색하지만 실상은 숨겨둔 첩을 보기 위해 집을 비우는 것일 뿐인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들은 이윽고 아버지의 허위를 알게 되지만, 역설적이게도 결국은 스스로 아버지와 같은 유랑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그랬던 그가 「환원기」에서는 자신을 가르쳤던 스승이 타계한 다음에야 돌아와 스승의 가르침을 뒤늦게 깨닫고 자신의 경솔을 한탄한다.
해이수 자신의 소설쓰기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힐 이 소설들은 각각의 작품도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도 어떤 성장의 구조를 이루고 있어 흥미롭다. 요컨대 그는 아버지의 낭만이 허위인 것을 알게 되지만 또한 자신도 그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아버지와 같은 유랑의 길을 떠났고, 앞서 간 형을 지켜보며 그 길의 실패와 곤궁을 깨달았으며, 이윽고 다시 돌아와 아버지의 질서와 화해를 꾀한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해이수 소설의 다음 대목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궁금증을 우리는 섣불리 기대로 바꾸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작품마다 다양한 관심과 주제를 담아내고자 하는 그의 성실함, 그리고 안정적인 구성의 묘와 유창한 필력이, 그가 앞으로 펼쳐 보일 이야기가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또 다른, 여기에서 몇 발짝 더 나아간 것이 될 것임을 확신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탄탄한 신예를 만나는 흔치 않은 반가움 아닐까.
요술봉에서 떨어져내리는 빛나는 소설들!
나는 해이수처럼 공들여, 그리고 성실하게 자기를 한 뛰어난 작가로 만들어가고 있는 신예를 별로 보지 못했다. 흔히 새로 출발하는 작가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 중에 하나는 처음으로 인정받은 작법이나 주제에 안주하는 일이다. 음악으로 치면 변주곡에 맛 들이는 일인데, 해이수의 경우 그런 걱정은 않아도 될 듯싶다. 그의 관심은 다양하고 그 관심을 발성하는 음역은 아주 넓다. 특히 이 작품집에서 어떤 작품들은 주제와 작법이 하도 달라 한 작가가 쓴 것 같지 않아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노력과 성의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흔하지 않은 문학적 품성으로 여겨도 좋을 듯하다. 이문열(소설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싱글 재킷 차림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신인작가 해이수. 그의 소설에는 인생과 영혼을 ‘호주’에 배팅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배반하고 절망한 끝에 사막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도무지 뒤로 갈 줄 몰라 앞으로만 달리다가 죽을 운명인 캥거루의 눈빛과 딱 마주친다. 사막을 지나 몽상의 길로, 패배와 자폭의 길로 치닫던 사람들은 작가의 맑은 시선과 탁월한 균형감각에 힘입어 냉정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에도 생기발랄하게 살아 있다. 그리하여 ‘산다는 건 전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선언의 순간에도 허리가 달달 떨리는 웃음이 저절로 터져나온다. 해이수, 그가 몸을 움직여 회전할 때마다 손끝에 들린 요술봉에서 끊임없이 반짝거리며 떨어져내리는 풍성한 유머와 따뜻한 감성이 빛나는 소설들, 해이수가 이제 새로운 카니발의 문을 연다. 강영숙(소설가)
수록작품 발표지면
몽구 형의 한 계절 『현대문학』 2001년 8월호
돌베개 위의 나날 제8회 심훈문학상 수상작
출악어기出鰐魚記 『현대문학』 2000년 11월호
우리 전통 무용단 『현대문학』 2003년 12월호
어느 서늘한 하오의 빈집털이 『현대문학』 2005년 2월호
캥거루가 있는 사막 『현대문학』 2000년 6월호
관수와 우유 『21세기문학』 2002년 겨울호
환원기還院記 『문학동네』 2005년 봄호
* 2006년 6월 26일 발행
* ISBN 89-546-0167-7 03810
* 신국판 | 352쪽 | 9,5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이상술(031-955-8865, 8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