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교과서에 없는, ‘인간’ 드가와 세잔?
드가와 세잔에 관한 전기는 이미 많다. 대중에게 폭넓게 사랑받고 있는 화가들이니 만큼 작품세계를 연구한 학자도 적지 않았고, 자연히 책도 많이 씌어졌다. 그렇다면 볼라르의 이 기록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제까지 출간된 유사 도서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세계적인 거장의 심오한 작품세계를 논하고 있는 전기들, 한번 읽고나면 마치 그들의 작품세계를 꿰뚫은 듯한 환상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뭔가 좀 부족하다. 이구동성 이들이 입을 모으고 있는 건 오직 ‘화가’ 드가와 세잔이기 때문이다. 무희의 화가, 파스텔화의 대가 드가. 현대미술의 아버지, 정물화와 생트 빅투아르 산의 화가 세잔. 아무리 탈탈 털어봐야 ‘그림과 화가’, 그 울타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건 ‘반쪽짜리’ 드가와 세잔일 뿐이다. 그 속엔 ‘인간’ 드가와 세잔의 자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사실 앙브루아즈 볼라르라는 이름은 소위 ‘미술독자’들에게 있어 그리 낯선 이름이 아니다. 인상파를 다룬 책이라면 으레 그의 이름이 등장하게 마련이고, 아예 그가 남긴 기록의 일부를 부분인용하고 있는 전기들도 적지 않다. 나아가 얼마 전에는 그의 자서전 『화상의 회상(Recollection of a Picture Dealer)』이 완역은 아니지만 국내에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파리의 화상 볼라르』, 바다출판사) 특히 이 책에는 볼라르가 생전에 교류했던 수많은 화가들에 대한 일화와 화상으로서의 독특한 시각이 담겨 있으며, 그 화가들이 오늘날 모두 거물급이 돼 있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유발한다. 그러나 사실 위주의 내용전개와 여기저기 박혀 있는 유명 화가들의 눈부신 이름 탓일까? 어쩐지 이 책에서 볼라르는 ‘드가와 세잔’을 그릴 때만큼의 살가운 시선을 보여주는 데 인색하고, 따라서 책 전반의 찰기 진 서사가 주는 흡인력도 떨어진다. 읽을거리는 많지만 읽는 ‘맛’은 좀 떨어지는 『화상의 회상』이 착실히 정리한 클리핑 같다면, 『아주 특별한 인연』은 낯익은 이름들이 속속 등장하는 친구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친분이 있는 사람들인데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빼곡히 적혀 있어, 페이지를 넘기는 손에 축축한 땀이 고이는…….
조금 낯설지 모른다. 약간 당황스럽기도 할 것이다.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던 화가들의, 너무 생소한 모습에 슬쩍 배신감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흥분되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볼라르라는 프랑스 전대미문의 화상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가 돌려놓은 시계바늘을 따라 아득히 먼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화려한 베일에 가려있던 ‘인간’ 드가와 세잔을 만나러.
‘인간극장’보다 가슴 찡한, 화상과 화가의 만남
드가는 평범함이나 무던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저녁 식사 초대를 받더라도 시간은 정각 일곱 시 반, 식탁에는 꽃이 없어야 했고,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이 돌아다녀서도 안 되었다. 유대인이라면 무조건 불신하는 경향이 있었는가 하면, 자신의 그림과 작품관에 대한 긍지가 대단해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언동에 격렬히 반응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우아하고 고풍스런 자태가 잘잘 흐를 것 같던 아름다운 ‘무희의 화가’가 이토록 괴팍하고 옹졸한 남자였다니! 하지만 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주워들은 것들만으로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수준의 정보다. 그러나 다행히도, 볼라르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에 그려진 드가는―주위의 평판과는 판이하게―누구보다 더운 가슴을 지닌 남자였다. 하찮은 이야기라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고, 동료화가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독설을 일삼고 여자를 끔찍이 혐오하는 ‘괴물’ 같은 존재로 여기기 일쑤였지만 사실은 따뜻한 시선, 격려의 말 한마디에 목말라한 고독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자신을 “옹졸하고 편협한 위인”으로 깎아내리며, 사소한 일에 민감해하고 사람들에게 매몰찰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소외의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물론 신세한탄을 듣는 것은 언제나 볼라르의 몫이었다.
세잔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균형감의 혼란스런 부재, 술에 취한 듯 한쪽으로 치우친 집들과 기울어진 그릇에 담긴 보기 흉한 과일”. 이것이 오늘날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화가의 작품에 대한 당시 평가였다. 단지 화단의 비난뿐이었을까. 화가 아들을 달가워하지 않은 아버지와의 대립, 유독 그에게 문을 굳게 걸어 닫았던 부그로 살롱, 소중한 어린 시절 추억을 함께 한 졸라의 등 돌림 등 세잔의 생애는 아픈 상처·기억들과의 지난한 싸움 그 자체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숲에서 은둔생활을 자처하게 된 것도, 자신에게 “갈고리를 대려한다”(자신을 속이려든다는 뜻)며 무조건 사람을 불신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역시 볼라르는 그의 외로운 발자국을 조용히 뒤따라간다.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면서 일말의 부담도 없는 그림자 같은 사람, 세잔은 그런 볼라르에게 서서히 마음의 빗장을 열었다. 줄곧 언급을 회피하던 친구 에밀 졸라와의 불미스런 사건도 볼라르 앞에서는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져 속상한 마음을 달래보려 했고, 그 고백 속에는 “당신 하나만 알아주면 돼”라는 절박한 심정이 배어 있었다. 볼라르는 들어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세잔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기 위해 자신의 이미지 실추도 무릅쓴 채, 그림을 핑계로 졸라를 찾아가는 수고를 자처하기도 한다.
그렇게 그는 그림보다 사람을 더 사랑한 화상이었다. 그에게 드가와 세잔은 화가이기 전에 위로하고 보듬고 싶은 벗이었고, 화가들 역시 그를 최후의 순간 모든 번민으로부터 탈출할 ‘마지막 비상구’ 같은 존재로 여겼다. 그렇게 그들의 그림보다, 그로인한 부귀영화보다 사람을 더 사랑했던 볼라르는 마침내 그림도 얻고 화가도 얻은, 파리 최고의 화상이 될 수 있었다.
또 이 책을 씀으로 인해 두 화가의 진면목을 알게 해주었으니 오랫동안 기억해야할 역사의 산증인임은 물론이요, 가슴을 묵직하게 만드는 이야기도 이렇게 봄나물같이 산뜻하게 담아냈으니 과연 최고의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천하제일의 요리사가, 최상의 조리법으로, 영양가 많은 재료만 듬뿍 넣어 만든 최고의 전기! 그것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함께 걸어’ 만든, 인연에 관한 책
인상파의 대표화가로 가장 먼저 손을 꼽는 드가와 세잔이지만, 살아생전 그들의 삶은 화려하기는커녕 참혹하리만큼 누추했다. 평생을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산 드가는 “당신들, 내가 드가라는 걸 모르나?”라며 걸핏하면 화를 냈고, 일찍이 남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던 세잔은 화단과 대중의 가혹한 냉대 속에서 자신과의 외로운 고투를 견뎌내야 했다.
굳게 질러진 두 화가의 방문, 그 앞에 볼라르가 서 있었다. 언론과 주변 사람들의 끊임없는 방해와 질책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안목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외려 풀이 죽어있는 화가들에게 희망을 주기위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품을 모아 전시를 열고 수집가를 물색했으며, 심지어 빚까지 대신 갚아주었다. 전시를 열기 위해 은둔생활을 하는 세잔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닌 것도 그였고, 판매실적이 나빠도 세인의 평가에 민감한 화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격려한 것도 그였다. 단순한 관조자가 아닌 삶의 동반자로서, 그는 그렇게 멀고 험난한 가시밭길을 함께 걸었다.
차라리 그것은 도박이었다. 세기에 나올까말까 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박! 볼라르여서 가능한 일이었고, 볼라르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류가 기억하는,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와 화상이 될 수 있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처럼, 사람의 인연은 우연에 의해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은 달랐다. 쉽게 이름만 붙이면 만들어지는 그런 보통 인연이 아니었다. 세상 그 어떤 관계보다 많은 노력과 희생을 요구한 만남이었다. 아무리 암울한 이야기라도 볼라르가 들려주면 비통하지 않고 남루한 모습이라도 추해보이지 않는 이유, ‘그 많은 전기들이 속수무책으로 비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 책이 가질 수 있었던 이유. 모두 이 ‘함께 걸어’ 만든 기억 때문이다. 세잔이 죽은 지 99년, 드가가 죽은 지 88년, 볼라르가 죽은 지 66년째 되는 올해 2005년, 그들의 귀한 인연은 아직 이렇게 계속 되고 있다.
단순한 회고록 뛰어넘은 ‘국보급’ 자료
앞서 언급했듯 볼라르가 갖는 강점 중 하나는 방대한 정보력과 생생한 현장감에 있다. 1890년 아페넹 가에 첫 화랑을 연 이후 라피트 가 등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미술계 인사들과 활발한 교류를 가졌던 화상답게, 그의 글은 직접 발로 뛰어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미술시장을 주름잡았던 수집가와 후원자들의 이름이 예고도 없이 불쑥 등장하는가 하면, 드가와 세잔이 선망 또는 폄하했던 유명 예술가들에 대한 언급이 여과 없이 기록돼 있어, 잠시나마 그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정작 화가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론가들의 현학놀음이나 눈에 보이는 뻔한 사실만 모아놓았을 뿐인 기존 전기들에선 쉽게 얻을 수 없는 독특하고 귀한 경험이다.
책의 뒤편에 실린 ‘주요 등장인물 소개’는 이런 강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마련한 특별부록 페이지다. 가벼운 에피소드 중심으로 구성돼 있는 책의 특성상 자세히 소개되지 못한, 그러나 드가와 세잔을 이해하는 데 알아두면 좋을 핵심 인물 10인을 선정해 인명사전 식으로 정리했다. 세잔의 정물화를 위작 논쟁에 빠뜨린 정신과 의사 겸 미술애호가 폴 가셰, 시인이자 비평가로 세잔의 열렬한 찬미자였던 조아생 가스케, 뒤랑 뤼엘·볼라르와 함께 인상파 화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화상 폴 기욤 등 당시 미술계를 주름잡던 인물들이다.
정보뿐만이 아니다. 어깨 너머로 지켜본 화가들의 그림 그리는 방식의 세밀한 묘사는 마치 그들의 화실에 들어와 있는 듯 생생하고, 드가가 들라크루아의 석판화 한 점을 찾기 위해 무려 20년을 헤맸다거나, 인상파 화가인 그가 야외작업을 싫어해 풍경화도 실내에서 그렸다는 이야기 등은 화가에게 다가서는 또다른 루트를 제공해준다. 세잔 편의 경우는 특히 그 의미가 더하다. 잦은 은둔생활과 대인기피 증세로 사람들과의 교류가 적었던 데다, 아들 폴에게 남긴 편지 같은 몇몇 기록 외에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어 사료가치도 그만큼 높을 수밖에 없다. “그가 원했던 건 자연을 좇아 푸생을 다시 끌어내는 것이었다”와 같은 문장에서처럼, 볼라르는 세잔이 남긴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중요한 언급들을 소소히 기록해두었고, 이 중에는 세잔 미학의 전 체계를 한 문장으로 축약해 놓은 주옥같은 말도 여럿 포함돼 있다.
“볼라르의 책은 (드가와) 세잔 자신에 견줄만한 기념비적 가치를 지닌다”는 19세기 영국 화가이자 미술평론가 로저 프라이의 극찬처럼, 이 책은 접근·정보·서사 모든 면에서 드가와 세잔 전기의 결정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다”고 말한다는 것
이제 여행은 끝났다. 당신은 얼마나 가까이 느꼈는가. 처음 만나는 ‘인간’ 드가와 세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혹시 당신도 들었는가? 하얀 캔버스 위를 가로지르는 두 화가의 신명나는 붓의 리듬을, 두런두런 귓가에 맴도는 그들의 나직한 목소리를? 그렇다면 그 여행은 성공적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제 당신도 드가와 세잔을 알았노라고, 좀더 당당히 그들의 이름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방금 이 책에서 건져낸 나머지 ‘반쪽’으로 인해 당신 기억 속의 ‘드가와 세잔’도 비로소 온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