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미술사
“모든 그레이드는 업(up)돼야 한다”는데, 미술사라고 예외는 아니다. 확고부동한 틀 아래 무려 400년간 답습만을 반복해왔던 미술사도 이제 대대적인 ‘개편’ 작업에 들어간다. 미술사 저술의 시조격인 조르조 바사리부터 불멸의 고전으로 통하는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의 저자 곰브리치, 그의 후속주자 격인 가드너와 스톡스태드까지 파란만장한 미술사의 실상을 폭로한 책 한 권이 나왔다. ‘마침표’ 찍히고 끝난 얘기인 줄로만 알았던 미술사가, 돌아보니 ‘말줄임표’였단다.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줄로만 알았던 미술사가, 알고 보니 말랑말랑하게 언제든 모양을 바꿀 준비가 돼 있더란다.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 한순간에 미술계의 질서를 들쑤셔놓은, 우리에겐 이름도 낯선 제임스 엘킨스. 그의 손가락 튕김 한 번에 서양미술사 400년의 역사가 흔들린다. 그가 조용히 묻는다. 이제껏 당신이 읽고 배워온 그것,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
흐름에 역행하는 불손한 책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는 ‘나쁜’ 책이다. 색감 곱고 눈에 익은 도판, 친절한 그림 해설, 선사시대부터 20세기 모더니즘까지 연대순으로 조목조목 짚어가는 체계적 구성 등, 미술사 책이 마땅히 갖춰야 할 요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깡그리 무시했다. 대신 들어가는 말에서부터 바사리, 곰브리치 등 우리에게 익숙한 유명 미술사학자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이제까지 배운 미술사는 모두 잊어라”라고 초를 치고, 단순히 읽고 암기하면 될 줄 알았던 미술사를 내 손으로 직접 써보라는 ‘망발’도 서슴지 않는다. 밑줄 긋고 별 표시 할만한 문장들은 온데간데없고, 책 한 권이 온통 물음표투성이다.
외나무다리에서 쉽지 않은 상대를 만난 것 같은 불편한 예감, 그러나 등 돌려 줄행랑 칠 수 없는 진퇴양난의 난감한 상황 속에 슬쩍 불쾌하게까지 하는 이 책, 그런데 왠지 모를 짜릿함이 있다. 페이지에 페이지를 거듭할수록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는가 싶더니, 부지불식간에 십 년 묵은 체증이 말끔히 사라진 것만 같다. 이제까지 차곡차곡 쌓아온 지식과 신념들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고 있는데,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진작 얘기해주지 그랬냐고, 좀더 일찍 시작됐어야 했다고, 작은 원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정도로 말이다. 엄청난 아이러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은근한 쾌감, 자유로움과의 낯선 조우, 이 책의 매력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미술사학자들의 새빨간 거짓말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 가드너의 『시대 속 미술Art Through the Ages』, H. W. 잰슨의 『서양미술사History of Art』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며, “우리는 모두 세뇌당해 왔다”는 폭탄선언부터 던지는 엘킨스. 미술사 저술의 선두주자 바사리는 여기저기 떠도는 화가들에 대한 잡다한 가십거리들을 모아놓았을 뿐이고, 미술사의 대가 곰브리치는 서양의 미술이 미술사의 전부인양, 이탈리아 미술이 가장 위대한 미술사적 업적인양 편협하고 오만하기 그지없는 책을 썼을 뿐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또한 그는 유럽권의 미술사가 미술사 전체를 이루는 것처럼 다루는 것은 곰브리치뿐 아니라 소위 ‘이름값’ 좀 한다는 미술사학자들의 공통된 집필방식이라고 설명하며, 방대한 양의 서양미술 예찬에 부록처럼 끼어들어간 원시미술과 이집트, 중국과 이슬람 미술 섹션들도 일부 깨어 있는 이론가들의 입막음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추가됐을 뿐이라고 설파한다.
이렇듯 그 동안 ‘위대한 저술’들이라 평가받아왔던 미술사책들을 실례로 들어가며 그들의 오류를 낱낱이 파헤친 그는 이제 듣도 보도 못한, 그래서 무척 신선하게 다가오는 비유럽권 국가들―러시아, 이집트, 터키, 이란, 인도 등―의 미술사 저술을 소개함으로써 일종의 대안을 제시하고, 나아가 ‘미술사책은 이렇게 씌어야 한다’는 해법까지 내놓는다. 소수집단―비유럽권, 평면회화와 조각을 제외한 비주류 매체, 페미니즘, 동성애 등―의 미술에 대한 보다 많은 지면 할애, 비판도 옹호도 아닌 모호한 중립성의 탈피, 20세기 말 즈음해서 뚝 끊겨버리곤 하는 기존 미술사의 영역 확장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말 그대로 ‘뭘 좀 아는’ 이론가임은 분명한데, 아쉬운 점은 스스로 그 주인공이 되기엔 자신이 제시한 해법들이 왜 실현되기 어려운지에 대해 너무 뚜렷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 ‘이런 방편들이 있지만, 이래서 실현되기 어렵다’고 솔직히 제시하고 있는 엘킨스는 아마도 자신을, 또는 이런 불가능의 장벽들을 훌쩍 뛰어넘어줄 ‘뉴 페이스’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미술사 교육의 ‘독’ 풀어줄, 건강한 ‘해독제´
이 책이 특별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당신도 그런 영민한 인물이 될 수 있다”고 무한한 용기를 북돋워주기 때문이다. 관행과 제도, 주류세력에 대항하는 그의 올곧은 정신 때문도, ‘법’이라 여겨왔던 이론과 체계를 단 한 권의 책으로 가볍게 뒤엎는 그의 대범함을 높이 사서도 아니다. ‘나름의 논리와 체계만 있다면 곰브리치나 가드너보다 못할 이유는 또 뭐가 있겠느냐’고, 어깨를 다독이며 “당신도 할 수 있다”고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가르치기만을 일삼던 기존의 미술사 책들과는 달리 그는 암기 대신 스스로 상상하는 법을, 맹목적인 신봉 대신 과감히 도전하는 법을 제시해준다. 전화번호부보다 더 두꺼운―그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가드너나 잰슨 책의 경우 무려 3.6킬로그램에 달한다고 한다―먼지 폴폴 나는 고루한 미술사 책은 이제 그만 덮고 스스로 ‘창조’해보라고 부추긴다. 어떤 학문에도 절대 진리란 있을 수 없다며 스스로 고민하고 연구하는 창조자의 자세를 권고한다.
그의 이러한 발언들은 기특하게도, 우리 몸 구석구석 암세포처럼 퍼진 미술사에 대한 편견을 치유해줄 해독제 역할을 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짜릿함과 통쾌, 묵은 체증의 내림이 그 증거일 것이다. 물론 아직 독에 ‘감염’되지 않은 미술사 입문자들에겐 더없이 좋은 백혈구 노릇을 해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미술사 공부 전 꼭 한번 읽어보면 좋을 필독도서이기도 하다.
이들을 제외한 모든 ‘감염자’들은, 아무쪼록 꿀꺽꿀꺽 이 고마운 해독제를 마시고 볼 일이다. 그래야 우리 손으로 쓴 획기적인 미술사책도 나오고, ‘곰브리치 시대’에도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말 그대로 새로운 내일을 열수 있지 않겠는가. 그가 이 책 구석구석에 아로새겨 놓았듯 미술사란 결코 ‘단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의 발명과 재발명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이 책이 그 험난하고 지난한 여정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불변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언제든 시대와 상황에 맞춰 쓱쓱 그림을 고쳐 그려나갈 수 있는 그런 ‘융통성’ 있는 이정표 말이다. ‘The End’는 없고, ‘To be Continued’만 있는 끝없는 미술사로의 기나긴 여로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