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창조, 미술관 디스플레이의 모든 것!
역사, 사회, 정치, 문화적 관점에서 접근한 미술관 디스플레이의 세계
한 관람객이 초상화들을 모아놓은 전시회를 갔다가 피카소의 「우는 여인」을 봤다. 전통적인 초상화와 비교하며 관람할 수 있었기에 피카소만의 독특한 필치의 초상화에 감탄하고 돌아온다.
다른 한 관람객은 전쟁의 역사와 비극을 표현한 작품들을 전시해 놓은 미술관에서 피카소의 「우는 여인」을 봤다. 그 작품에서 에스파냐 내란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과 조국의 비극을 겪은 피카소의 슬픔이 느껴진다.
같은 작품이지만 어떻게 ‘보여지느냐’에 따라, 그 작품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된다. 관람객은 미술관의 디스플레이의 의도 범위 안에서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게 된다. 극단적으로는 디스플레이의 방식에 따라 아카데믹한 작품으로 보일 수도, 혹은 반대로 아방가르드한 작품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렇듯 단순히 미술작품의 설치에 관한 기술적인 담론을 넘어 미술관 디스플레이는 미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독립된 ‘문화’이다.
이 책은 미술관 디스플레이를 문화적 관점으로 깊이 있게 논의한 획기적인 연구서이다. 미술사를 비롯하여 역사,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미술관 디스플레이가 어떻게 변화되어왔고 무엇을 제시했으며 그러한 디스플레이가 이뤄지게 된 주변 여건들이 어떠했는지 상세히 들여다보고 있다. 미술관 디스플레이의 맥락을 짚어 미술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현대미술은 기획자들의 의도가 더욱 많이 개입되는 기획 전시가 중심이 되고 있다. 비엔날레 같은 대형 전시도 당대 미술을 바라보는 기획자들의 관점에 따라 디스플레이되기 때문에, 당대의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술관 디스플레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더욱 필요하다.
풍부한 사례로 본 미술관 디스플레이의 미학
이 책은 미술관 디스플레이에 대해 연구하는 가장 큰 목적으로 “미술을 바라보는 조건들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설정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지난 수백, 수십 년간 변해온 방식을 검토한다. 1부 ‘미술관의 변화’에서는 전통적으로 미술의 성지와도 같은 미술관의 변화사를 살펴보고, 2부 ‘전시-주의(ism)´에서는 최근 더욱 부각되고 있는 비엔날레를 비롯한 대형 기획전 등의 일회적 전시 현상에 대해 알아본다. 마지막으로 3부 ‘더 넓은 문화에서의 미술’에서는 오늘날의 미술을 사회와 제도 등 보다 넓은 맥락에서 살펴본다. 또한 미술관 디스플레이에 관해 추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열 개의 사례연구를 통해 꼼꼼히 해부하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1부는 세 개의 사례연구로 구성되는데, 사례연구1에서는 현대미술의 메카로 불리는 뉴욕현대미술관을 중심으로 파리의 퐁피두 센터 등의 현대미술관에 대해 탐구한다. 현대미술관을 이해하기 위해 루브르 미술관이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같이 주로 근대 이전의 미술을 소장하고 있는 전통 미술관의 역사를 살핀다. 그리고 현대미술의 등장과 함께 변화된 미술관의 개념에 따른 현대미술관의 디스플레이 방식에 대해 서술한다. 사례연구2에서는 포스트모던 미술관의 전형을 보여주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을 통해 1970년 이후에 개관된 대형 미술관의 추세와 디스플레이 방식에 대해 상세하게 들여다본다. 사례연구3에서는 전통적인 미술관에서 현대미술을 수용하며 변모하는 전형을 잘 보여주는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를 통해 전통적인 미술관이 현대미술을 수용하며 어떻게 디스플레이에 변화를 주었는지 살펴본다.
2부 역시 세 개의 사례연구로 구성된다. 사례연구4에서는 현대미술 전시의 대표적인 사례들인 독일 카셀의 <도큐멘타>, 각종 비엔날레, 영국 현대미술이 이슈를 불러모은 사치 갤러리 등 현대 갤러리들, 현대미술을 이끄는 국제 전시들을 사례로 들어 현대미술의 경향을 짚어본다. 사례연구5는 점차 대형화되는 현대 전시 문화를 ‘블록버스터 쇼’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많은 대형 전시들을 시작과 성공,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며 그것이 야기하는 메커니즘을 알아본다. 마지막으로 사례연구6에서는 유럽과 미국에서 ‘탈 아프리카’ 현상으로 간주되는 아프리카의 현대미술에 대해 서구인들에 의해 단순히 신비한 부족 오브제로 전시되어 온 전통적인 디스플레이 방식과 비교 분석한다.
3부 중 사례연구7에서 다뤄지는 미술관은 런던 밀뱅크 외에 영국의 리버풀, 세인트 이브스, 뱅크사이드에 지역 사업의 일환으로 분관을 낸 런던 테이트 갤러리이다. 테이트 갤러리의 분관 개관을 통해 지역과 미술관 개관의 관계를 연구할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가 끼친 지역 분관들의 디스플레이를 비교.분석한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빌바오 관 개관이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도 상세히 밝힌다. 사례연구8에서는 영국의 중요한 유산(遺産)인 지방저택 미술관이 개인 소유의 저택에서 국가의 미술관으로, 나아가 문화 관광지로서 자리잡기까지 어떤 정책이 필요했는지 살피고, 지방저택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어떠한 디스플레이가 되어왔는지 많은 사례와 비평을 들어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사례연구9와 10에서는 정치적으로 분단되어 있는 아일랜드의 현대미술을 두 명의 작가, 앨리스 마허와 윌리 도어티의를 중심으로 심층 분석한다. 이들에 대한 언급은 아일랜드의 미술 기관과 정책 등에 대해 사회.정치적 관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국내 전시 기획자들의 필독서!
이 책은 예일대학교 개방대학의 ‘미술과 미술사’ 강좌 교재로 기획된 것으로서, 국내 전시 기획자나 큐레이터 사이에 디스플레이에 관한 필독서로 널리 읽혀져왔다. 각 사례연구별로 독자들이 함께 생각해봐야 할 점이나 다른 시각에서 바라봐야 할 점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식의 구성이 첨가되어 있다. 이 점은 미술관 디스플레이에 대해 독자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비평하는 시각을 넓혀준다는 데에도 의미가 깊다.
특히 유럽에 비해 미술작품의 디스플레이 문화가 현저히 짧고 ‘문화’로서의 개념도 자리잡지 못한 우리 실정에서,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미술관 디스플레이사(史)와 수많은 사례들은 간접체험이자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수많은 사례들은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영국 국립미술관인 런던 내셔널 갤러리 등의 대형, 전통 미술관부터 뉴욕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갤러리 등의 대형 현대미술관들, 사치 갤러리를 비롯한 세계 곳곳의 특색 있는 갤러리들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분산되어 있다. 더불어 이 책에 실린 미술관들이나 전시 장면을 촬영한 많은 도판들 또한 귀한 사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 책을 엮은 에머 바커는 “이 책은 영구적.보편적인 미술 가치에 헌신하는 신성한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의 개념이 최근 여러 변천들에 직면하여 어떻게 존속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미술관들은 과거 몇십 년간 아카데미 미술사에서 제기한 비평적 논제들에 저항한다”며, “미술 기관들을 비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사태를 야기한 원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역시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결국 이 책은 미술관 디스플레이의 역사와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신축, 보수, 증축한 미술관들이 채택한 전시 디스플레이의 맥락을 통해 지금의 미술과 앞으로의 미술의 흐름을 짚어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