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같은 형제의 엇갈리는 운명, 우리 시대의 파르마코스들
중요한 부분을 수정하고 보완하고 복원했다 하더라도, 이미 20년 전에 씌어진 소설을 다시 읽어야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이 소설은 20년 전의 소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시대´의 소설이라고 강조한다. 우선 사회의 가공할 폭력과 그 폭력이 강요하는 운명을 거스를 길 없는 초라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젊은 작가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를 선도하고 있고, 비루하기 그지없는 하류 인생, 즉 김형중의 지적대로 ´파르마코스´(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디오니소스 축제 때 집단적으로 살해당했던 밑바닥 사람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경향과 일치한다. 따라서 최인호의 『지구인』은 마치 오늘날의 작품처럼 전혀 낡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근간이 되는 정전(cannon)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 김형중의 견해이다.
『지구인』의 주인공들의 처지를 결정한 것은 그들로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던 전쟁이었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에겐 죄가 없다. 따라서 범죄는 유전이 아니며, 절대의 공포와 폭력을 먼저 보여준 것은 사회였으며, 종대와 도석과 종세를 포함한 『지구인』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어쩌면 다만 그 사회적 폭력으로부터 탄생한 희생양, 즉 파르마코스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작가는 강조한다.
김형중의 말대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이종대에 대한 관심과 비난, 아울러 지강헌과 유영철 등 희대의 범죄자에게 퍼부어지는 비난은, 사실 그들을 제물로 해서 이루어지는 희생제의를 관망하면서 우리가 느끼는 안도와 공포와 죄책감이 다소 수다스럽게 발현된 것에 불과하다. 더이상의 희생제의가 필요 없고 더이상의 가난과 폭력이 없는 어떤 상태가 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모두 자신이 호출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수용소 안에 갇혀 있는 한 명의 파르마코스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얼마나 섬뜩한가. 그 사실을 이 소설이 처절하게 웅변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소설에서 재미를 느껴야 할 것인가, 슬픔을 느껴야 할 것인가?
이 소설은 아이러니하게도 처절하게 슬프고 시간을 통째로 앗아갈 정도로 재미있다. 슬픔은 우리의 아픈 역사로부터 오는 것이고, 재미는 최인호 특유의 풍부한 비유와 속도감 있는 문장과 빠른 사건 전개로 인한 것이다. 아울러 쌍둥이 같은 이복형제인 종대와 종세의 불우한 어린 시절, 그리고 그렇게 닮은꼴이면서도 엇갈리는 운명을 향해 달려가는 형제를 바라보는 안타까움 또한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다.
자기를 철저히 파괴하고, 이윽고 세상을 파괴하는 악인의 초상
어느 날 이종세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아내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뜬다. 이때 초인종 소리가 울리며 완전무장한 경찰들이 들이닥치더니 이복형인 이종대의 행적을 추궁한다. 종세는 형사들과 함께 인천으로 향한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형을 생각함으로써 종세는 비로소 자신과 형의 운명을 함께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비슷한 길을 달려가던 형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가, 종말을 맞이할 무렵 혈육을 찾은 것이다.
그때 인천의 이종대의 집에서는 종대가 아내와 아들, 딸을 죽이고 경찰과 대치중이었다. 종세가 다가가 형을 설득하려 하지만 애당초 씨도 먹히지 않을 일이었다.
정읍에서 전쟁고아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종대는 군에 입대하여 카투사가 된다. 그곳에서 양공주 영숙을 사랑하게 되는데, 영숙의 기둥서방인 미군 장교 마이클을 해치고 탈영한다. 탈영한 후 이종대는 금광에서 금을 캐기도 하고 극장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나, 탈영병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어디에도 뿌리내릴 곳이 없었다. 범행을 계속하던 종대는 마침내 교도소에 가게 되지만, 치밀한 계획으로 교도소를 탈출하여 도피 행각을 벌이기도 한다.
수감생활을 마친 이종대는 그와 뜻이 맞는 문도석과 함께 점차 대담한 범행을 저지른다. 예비군 무기고에서 훔친 카빈소총을 휘두르는 그들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절대 잡히지 않을 것 같은 그들에게도 종말은 왔다. 경찰을 쏘고 택시를 탈취하여 도망친 후 문도석은 자살하고, 꼬리가 잡힌 이종대는 경찰과 대치하던 끝에 허공을 가르는 총성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러나 ‘악’은 우리 안에 있다
수많은 파르마코스들이 희생양으로 사라진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지구인』은 이제 온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우리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제물로 삼은 파르마코스들은 사실 우리 안에 있다. 남의 가족이 죽더라도 내 가족은 잘살아야 하는 우리, 타민족은 기아에 허덕이더라도 우리 민족이 배부르면 괜찮은 우리,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우리 안에 ´악´이 있고,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 ´지구인´은 악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파르마코스인 것이다. 『지구인』을 읽은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바로 그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최인호의 『지구인』은 마치 악마가 남긴 소설인 듯 우리의 가슴을 찢는다. 악은 우리에게 때로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이 되지만,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연민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혹한 운명의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인간의 ‘악’이 바로 우리 안에 있음을 냉혹하게 보여주고 있다.만화가 서문다미도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최인호의 『지구인』을 꼽았다. 『지구인』을 읽으면서 진짜 ´힘있는´ 작품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는 잔잔하게 흐르는 내용 속에서도 말로는 표현되지 못하는 어떤 충격을 받았으며, ´와! 진짜 쎄다!´라는 전율이 느껴지는 작품, 자신이 그리고 싶은 작품이 바로 그런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결국 서문다미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20년 전에 이 소설을 읽었던 사람들이 다시 『지구인』을 잡는다면 김영하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이어령(문학평론가, 전 문화부 장관)
20년이 흘러갔다. 구로공단도, 카빈소총도 모두 옛 노래가 된 지금, 『지구인』을 다시 읽는다. 다시 읽어도 그 짱짱함이 여전할 뿐 아니라 당시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현대적인 소설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란다. 고개를 들어 일찍이 그가 도달한 곳을 삼가 우러른다.
- 김영하(소설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최인호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63년 서울고 2학년 때 단편 「벽구멍으로」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되고, 1967년 단편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타인의 방』(1972), 『잠자는 신화』(1973), 『영가』(1974), 『개미의 탑』(1977), 『위대한 유산』(1982) 등과,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1972), 『도시의 사냥꾼』(1977), 『잃어버린 왕국』(1986), 『길 없는 길』(1993), 『왕도의 비밀』(1995, 2004년에 『제왕의 문』으로 개제 출간), 『상도』(2000), 『해신』(2003),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2004)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가톨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2005년 2월 23일 발행
* ISBN 1권 89-8281-920-7 04810
2권 89-8281-921-5 04810
3권 89-8281-922-3 04810
세트 89-8281-919-3
* 신국판 | 1권 384쪽, 2권 384쪽, 3권 408쪽 | 각권 값 9,500원
* 담당편집 | 이상술(031-955-8864, editor@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