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져 누운 꽃은
나무의 꽃을 보고
나무의 꽃은
떨어져 누운 꽃을 본다
그대는 내가 되어라
나는 그대가 되리
―「동백꽃 그리움」 전문
바닥에 떨어진 꽃과 나무에 아직 피어 있는 꽃이 서로를 바라본다. 두 꽃이 주고받는 시선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피워내고 있는가.
김초혜 시인이 새롭게 펴낸 시집 『고요에 기대어』는 이 빈자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공간이다. 1998년 『그리운 집』(작가정신) 이후 여덟 해 만에 펴내는 신작시집에는 무한한 공간과 시간, 생의 이 끝과 저 끝, 끝없는 그리움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행과 행 사이의 빈 공간, 연과 연 사이의 빈 공간, 그리고 시 자체가 빚어내는 빈 공간에서 태어난다.
경계에서 씌어진 시
시집 『고요에 기대어』는 경계에서 씌어진 시들이다. 하나의 시간이 다른 시간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시간,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공간에서 씌어진 시들이다. 경계의 시간, 경계의 공간에서 마음은 돌아보고, 둘러보고, 내다본다. 이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시인은 이 경계 위에서 시간의 모든 국면, 삶의 우여곡절을 돌아본다.
한 번에 무너지는
자운영 꽃밭보다는
매일 무너지는
자운영 꽃밭을
―「인생」 전문
이 시에서 꽃밭의 무너짐이 바로 경계에서 일어나는 사태이다. 꽃밭의 무너짐은 꽃의 죽음일 터. 시인은 자운영 꽃이 한꺼번에 지는 순간보다는 자운영 꽃이 매일 무너지는 모습에 주목하라고 당부한다. 무너짐이 있으면 반드시 일어섬이 있는 법. 매일 일어섰다가 무너지는 자운영 또 꽃밭은, 매일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다.―이문재(시인)
바람이 매화 가지를
꺾었다 마십시오
매화 가지가 꺾이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마음의 덮개가
열리고 닫히는 것은
귀신도
못 봤습니다
―「변명」 전문
간결하고 직접적인 시어들이 만들어내는 긴장과 힘은 독자를 압도한다. 짧은 시편들은 서둘러 책장을 넘길 수 없도록 마음자리에 깊은 자국을 만든다. 간결하고 직접적인 시어가, 그 시어들이 만들어내는 여백이 읽는 이의 마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눈을 감고, 단정하고 정갈한 시의 결에 마음을 맡기고 있으면 눈을 뜨고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 둘, 감은 눈 위로 떠오른다. 이제 그것들을 볼 시간이다.
『고요에 기대어』는 언어경제의 한 모범이거니와, 시어와 시어, 시의 행과 연을 한껏 압축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여백에 눈을 돌리게 한다. 독자가 여백을 인식할 때, 시어는 이미지가 아니라 메시지가 되어 여백으로 스며든다. 이야기를 뿜어내는 것이다. 잘 빚어낸 단형 서정시가 그렇듯이,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숨은 주제어’는 여백일지 모른다. 여백에서 다시 완성되는 시, 여백에서 독자의 마음과 만나는 시, 다시 독자의 마음에 여백을 만들어내는 시, 그리하여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하는 시! ―이문재(시인)
* 초판발행 │ 2006년 10월 30일
* ISBN │ 89-546-0234-7 02810
* 121*186 │ 112쪽 │ 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