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민희, 생선 가게 미혼모의 딸이다.
한때는 상냥하고 부자인 어느 부부가 나를 찾아와
“네 진짜 엄마 아빠는 우리란다.” 하고 말해 주길 바랐지만
그런 걸 기대하기엔 꽤 자라 버렸다.
만약 나에게 ‘김민희’가 아닌 또 다른 무엇이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떨까?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나는 가오리가 되어 있었다.
지느러미를 펼쳐 하늘을 날 수 있는 가오리가!
깊은 여운을 남기는 세 가지 색깔의 주제
제8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한 작가 이민혜의 두 번째 작품이다. 첫 책 『너는 나의 달콤한 □□』에서 보여 준 빠른 호흡, 톡톡 튀는 구성과 입담, 인상 깊은 캐릭터는 그를 앞날이 기대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해 주었다. 원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생활하며, 아이들이 공감할 코드, 지금 이 지점에 아이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는 이번에 색깔 있는 주제를 담은 단편들을 책으로 펴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나’에 대한 고민을 담아 놓은 「가오리가 된 민희」, 이성 문제로 친구와 갈등을 겪으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아이의 이야기 「낙서하는 아이」, 동물 학대, 생명 경시, 폭력의 부당함과 문제점을 짚어 낸 「병아리 죽이기」가 그것이다. 주인공들은 아이다움 속에 빛과 어둠, 천진함과 영악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기도 하고, 나약하고 비겁하면서도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하고 교정하기 위해 노력할 줄 아는 지극히 현실적인 아이들이다. 다른 이들과의 관계맺음과 다소 낯설고 비밀스럽고 때론 불편한 경험을 통해 자신을 정립해 나가는 주인공들의 목소리가 색다른 울림을 전해 줄 것이다.
「가오리가 된 민희」
“이제야 알겠다. 처음부터 완벽한 나의 선택이었음을.
엄마 뱃속에 내가 생겨나기 전부터 엄마를 선택했다는 걸.”
어느 날, 마법이라도 일어난 듯 민희는 가오리가 된다. 수업 시간에 잠시 졸았을 뿐, 특별할 것이 없었던 날이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가오리가 된 민희의 속마음은 그 이상으로 복잡하다. 생선 가게 미혼모의 딸, 아버지의 부재, 몇몇 아이들로부터 당하는 무시. 불안한 환경이지만 민희는 대부분의 순간을 잘 견디고 적응해낸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래서일까. 민희는 가오리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가장 사랑하지만 자신에게 ‘김민희’라는 이름을 주고 이 자리에 매어 둔 엄마를 벗어나. 민희는 가오리 이전의 기억을 뒤로하고, 자신의 심장이 뛸 수 있는 곳, 가슴이 이끄는 바다로 향한다. 그렇게 바다로 향해 가는 동안 민희는 자신이 아닌 또 다른 무엇이 되어 자기 가슴 안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종착지인 바다에 빠지는 순간 깨닫는다. 가오리로서 이제껏 왔던 길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 가장 사랑하는 엄마 옆으로 향하고 있었음을. 이즈음에 이르러 독자는 믿게 된다. 민희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것임을 말이다.
「낙서하는 아이」
"이주의 모든 게 나를 괴롭게 했다. 모든 걸 다 들어주는 부모님, 부반장, 이제는 동건이까지.
원래 내 것이었던 것을 모두 빼앗긴 기분이다.”
낙서를 하면서 제 안에 옹이진 응어리를 풀어내는 한 아이와 그 아이를 지켜보며 상처에 부스럼이 나지 않도록 도와주려는 아이의 우정을 담았다. 짝사랑하던 반장의 마음과, 부반장이라는 타이틀마저 새로 전학 온 이주에게 빼앗기자 푸르미는 ‘김이주, 왕재수, 밥맛없다.’ ‘김이주, 재수 없다. 꺼져라.’ 같은 낙서를 전봇대며 의자, 바위에 하고 다닌다. 그건 “뻐근한 곳에 파스를 바르는 것”처럼 가슴시원한 일이었다. 하지만 낙서를 하면 할수록 푸른 안개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은 푸르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가슴에 뾰족하게 돋아난 가시를 혼자서는 잘라낼 수 없기 때문이다. 푸르미 내면의 나약한 모습을 또 다른 아이 희도가 들여다본다. 스스로의 행동으로부터 푸르미가 더 상처받지 않도록 희도는 푸르미의 낙서를 새롭고 긍정적인 내용으로 바꾸어 놓는다. 푸르미의 낙서를 지우며 푸르미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지듯이 말이다.
「병아리 죽이기」
“겁을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상수 녀석의 놀잇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병아리에게도 그러하듯 나에게도 세상은 너무 무서웠다.”
실화에서 비롯된 이 이야기는 동물 학대, 생명 경시, 인간성 파괴에 대한 경고, 그리고 나 아닌 다른 이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란 무언인가까지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유승이는 동네 문제아들에게 걸려 병아리를 죽이는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고 싶지만 뒤이어 올 보복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그 무리에 끌려 다니게 된다. 하지만 실험이 거듭될수록 유승이는, 비좁은 상자에서 풀려 나오자마자 인간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고통스럽게 숨이 끊긴 병아리에 대한 죄책감, 힘 앞에 무릎 꿇은 자신의 비겁함, 동네 아이들의 놀잇감이 된 병아리와 자신의 처지에 괴로워한다. 결국 마지막 용기를 그러모아 유승이는 남은 병아리를 낚아채 그 끔찍한 실험으로부터 뛰쳐나온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학대당한 생명과 그것을 그냥 지켜봐야만 했던 죄책감이 유승이를 짓누르고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유승이에게 하늘은 더 이상 어제의 하늘이 아니었다.
세 가지 색채 이미지로 작품에 강조점을 찍은 일러스트레이션
‘뭔가 다른’ 그림체로 자신만의 영역을 쌓아 온 화가는 작품마다 새로운 시선을 부여할 줄 안다. 이번 작품도 그의 손 안에서 짜임새 있게 직조되었다. 화가는 각 작품을 파랑, 오렌지, 암갈색으로 이미지화하여 이야기가 품고 있는 속엣말을 드러냈다. 푸른 바다와 하늘, 넓은 세상으로의 여행을 연상시키는 푸른색은 「가오리가 된 민희」를 이루는 색조다. 화가는 “몽환적이면서도 바다와 엄마의 냄새를 진하게 풍길 수 있는 색이 파랑”이라고 말한다. 「병아리 죽이기」의 주조를 이룬 암갈색은 불안한 주인공의 심리와 불편하고 끔찍한 사건을 낮게 가라앉은 빛으로 서술하고 있다. “어릴 적 한 번쯤 키워 봤을 병아리에 대한 아련한 기억과 유승이의 마음을 생각”하며 덧칠한 그림은, 작품이 지닌 무겁고 강한 주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낙서 하는 아이」는 오렌지와 여러 색깔이 조화를 이루며, 부정에서 긍정으로 흐르는 주인공의 내면을 시각화화고 있는데, “불우한 환경이지만 자신의 처지를 어둡게만 여기고 살아가지만은 않을 것 같은 주인공의 밝은 이미지를 잡아 보고 싶”은 화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