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돌아오면,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은
점차 기억 안쪽으로 흩어지고 옅어진다.
윤경희의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지난 날 내가 파리와 도쿄에서 만난,
오래 간직하고 싶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녀의 고요한 사진과 낮은 속삭임은
당신이 잊고 있던 ‘여행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해줄 것이다.”
*UGUF(여행작가/디자이너,『30일간의 도쿄탐험』『파리여행노트』지은이
일상의 다정한 쉼표, 여행의 순간
매양 같은 일상에 쉼표를 찍고,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날.
우리는 가방 하나를 꾸리고, 해야 하는 숙제 같은 것은 모두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멀리 혹은 가까이, 어디로든 떠났다가 돌아오면 여행지에서 보낸 시간은 인상적인 몇몇 순간으로 남는다. 그 순간은 시간이 흐르면 점차 기억 안쪽으로 자취를 감춘다. 가끔 ‘여행의 순간’을 돌이켜보고 싶을 때, 우리는 기억이란 모호한 등불 아래에서 사진을 들여다본다.
7년 동안 7개의 도시를 느릿느릿 통과하며 산책을 다녀온 지은이 윤경희는 ‘여행의 순간’들을 부지런히 차곡차곡 쌓아두는 사람이다. 혼자 어슬렁 도쿄 거리를 걷고, 런던과 브라이튼에서 짧게나마 생활의 흔적들을 바라보고, 커피와 초콜릿처럼 쌉쌀하고 달콤한 파리를 돌아, 니스의 바다를 거쳐, 천천히 흐르는 뉴욕의 시간을 만나고, 어쩌다 마주친 방콕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고 돌아온 여행의 순간들.
오랜 시간 모아온 사진을 한 장 한 장 꺼내며 조용히 속삭이듯 들려주는 그녀의 여행 이야기는 특별하거나 경이롭거나 대단하진 않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매일 사이에 다정한 쉼표를 찍고 여행을 떠나, 천천히 느리게 동네 산책하듯 도시를 거닐며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 이야기를 조금씩, 짤막하게 들려준다.
느린 걸음으로 나선 먼 산책
여행자는 늘 바삐 움직이고, 서둘러 스쳐 지나간다. 먼 길을 떠나왔으니 여정을 충일하게 채워야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해변에서 주워온 조개껍질처럼 별다를 게 없어도 우리는 뭔가 보고 경험했다는 걸 추억으로 삼고 싶어 한다. 휴양지가 아닌 대도시의 여행객들은 특히 더 그렇다. 뉴욕 같은 도시엔 보고 들어야 할 게 너무 많다. 가야 할 미술관도 많고, 구경해야 할 곳도 넘쳐난다. 눈부신 속도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여행자들은 도시의 시간을 한층 더 빨리 달리게 만든다.
하지만 때로 느린 걸음으로 먼 산책을 떠나는 것이 진정으로 즐거운 여행의 순간을 안겨주기도 한다. 새로운 것을 많이 보고 경험해야 한다는 여행자의 숙제를 마음에서 내려놓고 공원, 카페, 동네 골목, 미술관, 서점, 잡화점을 거닐면서 평온한 시간을 만끽하는 것도 여행의 한 방법이다.
늘 그렇게 조용조용 사뿐히 떠났다 돌아온 이야기, 『여행의 순간』에는 마음을 순하게 어루만져주는 무위의 시간, 잊지 못할 만남, 어깨 너머로 들여다본 도시의 골목,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일상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마음, 친절하게 눈을 맞추며 웃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어딘가로 떠났을 때, 누구나 한 번쯤은 만났을 ‘순간’들이 담겨 있다.
타인의 일상, 그 끌림의 기억
낯선 도시에서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걷거나, 일찍 문을 연 카페에서 아침식사를 하거나, 공원을 산책하고, 놀이터에서 꼬마들과 눈을 맞추고, 버스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시장에 가서 먹을 것과 꽃을 산다. 아주 가끔 호사를 부리고 싶을 때에는 한번쯤 가고 싶었던, 아껴둔 호텔에서 묵기도 한다. 이렇듯 별다를 것이 없는 여정이지만, 타인의 일상 즉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바라보는 윤경희의 시선은 평범하지 않다. 범상한 일상의 풍경을 그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포착하고, 그것을 유일하고 특별한 순간으로 변모시킨다.
“나를 이끌어준 건 어쩌면 ‘사람들이 사는 모습’인 것 같다. 뉴욕, 도쿄, 런던 혹은 파리나 방콕 등 어디에 가건 나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도시의 풍경과 그들의 일상에 눈길을 빼앗겼다. 그것은 창턱에 올려놓은 작은 소품일 수도 있고, 소녀가 놀던 놀이터 혹은 길 가는 사람들 쉬어가라는 친절한 의자일 수도 있다. 그렇게 오래 간직하고 싶은 순간을 만나면 마음의 조리개를 활짝 열고, ‘찰칵’ 하고 셔터를 누른다. 띄엄띄엄 기록된 순간들은 징검다리처럼 불완전한 기억의 틈새를 메워준다.”
(프롤로그 중)
첫 여행을 떠날 때만 해도 디자이너로서 신선한 시각적 경험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떨치지 못했지만, 결국 그녀가 담아온 건 근사하고 멋진 풍경이나 놀라운 순간이 아닌 누군가가 창턱에 올려놓은 작은 물건, 휙휙 지나가는 자전거들, 오랜 친구 같은 노부부, 자신을 보고 웃어주는 아이들이었다. 그녀는 특유의 시선을 통해 소소한 물건들, 평범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흥미롭고 즐겁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특히, 도쿄, 런던, 파리, 뉴욕에 사는 친구들과의 만남, 그들이 사는 이야기는 새로운 만남이 주는 기쁨을 엿보게 해준다.
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 카메라 역시 별다를 게 없다. 디지털 카메라의 편리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윤경희는 필름 카메라(콘탁스 아리아) 단 한 대만을 들고 떠난다. 불편한 점이 많기는 해도 10년 가까이 써온 아리아는 어떤 풍경이 담고 있는 색과 감정을 원래 모습에 가장 가깝게 간직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선과 마음을 끌어당기는 도시 일상 메모가 마무리되면, 오랜 시간 여행을 다니면서 하나 둘 수첩에 적어둔 ‘취향과 정보’ 모음이 이어진다. 이 또한 걷다가 우연히 만나 알게 됐거나, 그곳에 사는 친구들이 평소에 즐겨 찾는 카페, 잡화점, 서점, 미술관 등이 대부분으로, 꼭 들러야 할 곳이라기보다는 좋아하는 것들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뜰하게 정리해놓은 것이다.
이렇듯 『여행의 순간』에는 나와 타인의 일상이 교집합을 이루며 맞닿는 순간,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지난 날 다녀왔던 그 여행의 순간, 즉 기억 안쪽으로 흩어지고 옅어지던 시간들을 돌이키게 해준다. 나의 매일이, 사람들의 하루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인지 돌아보게 해준다.
*본문 미리보기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넓게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본다.
장마철 드물게 햇빛이 비춘 이른 아침, 청소를 막 끝낸 거리가 갓 세수한 아이의 볼처럼 말갛게 반짝인다. 멀리 아파트 창가에선 짧은 햇살에 서둘러 내다 넌 듯한 이불과 옷가지, 알록달록한 양말이 펄럭인다. 아, 도쿄의 아침이다.”
-도쿄의 아침, 본문 12쪽
“좁다란 길, 납작해서 다정해 보이는 집들, 허름한 미닫이문 사이로 보이는 60~70년대 살림살이, 낡은 목마, 낮은 협탁과 아이들 의자 등 오래오래 간직해온 것들이 무심히 줄지어 있는 동네를 걸으며 일사에도 빈티지를 새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다. 긴 세월 내가 사는 집, 내가 걷는 길, 내가 쓰는 물건을 아끼며 검박하게 살아온 이 동네 사람들의 시간의 결을 고스란히 들춰보는 느낌은 감동적이었다.”
-시모기타자와는 빈티지, 본문 39쪽
“거리는 내 발걸음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고요하다. 소음이 없으니까 소리의 밀도가 한층 두텁다. 새 소리, 대문 여는 소리, 타닥타닥 부드럽게 스타카토로 끊어지는 고양이 발걸음 소리, 보슬보슬 음이 소거된 채 내리는 가는 빗줄기. 우산을 펼치면 이 농밀한 순간이 깨질 것 같아서 그냥 걸었다. 비 사이로 빵 굽는 향이 낸 길을 따라가다가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뒤로 가 함께 갓 구운 빵을 기다렸다. 차양 너머로 집과 사람들 모두 나무숲 사이로 몸을 감추고 있는 덴엔초후를 한참 바라보았다.”
-도쿄 하루 메모, 본문 44쪽
“시장을 누비고, 골목을 걷고, 강변을 산책하고, 공원에 들르고, 미술관을 둘러보았다. 런던에서의 며칠은 그렇게 지나갔다. 걷는 동안 커피 냄새, 베이컨 냄새, 감자튀김 내새가 느껴지면 어디든 들어가서 쉬는 시간을 보냈다. 돌아보면 신기하고 멋진 풍경을 보았을 때보다 내 마음대로 쉬는 시간, 바로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지 않았나 싶다.”
-쉬는 시간, 본문 90쪽
“카페는 누구든 느리게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도시에서 여행자의 시간이 아닌,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속도로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곳이다. 뉴욕에 머무르면서 내가 가장 많이 찾은 곳은 카페였던 것 같다. 걷다가 지치면 습관처럼 눈에 띄는 카페에 들러 머릿속을 텅 비워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천천히 흐르는 카페의 시간, 본문 203쪽
“아침잠에 빠진 거리는, 어딜 가건 조용하다. 이른 아침, 거리를 걷다 보면 사람들이 하나씩 스쳐가기 시작한다. 8시와 9시 사이, 모두의 출근 시간이 된 것이다.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때로는 반대 방향으로 걸으며 나는 낯선 사람들의 일상에서 나와의 교집합을 그려본다. 그리곤 마음속에 ‘여행 중’이라는 다정한 쉼표를 찍는다.”
-에필로그, 본문 2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