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원의 전작장편소설 드디어 출간!
인간의 근원적이며 존재론적인 문제에 깊이 있는 접근을 보여온 김지원의 전작장편소설 「소금의 시간」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작가 김지원은 작가후기에서 초봄 어느 날 낮잠을 자다 꾼 꿈에 나타난 어머니 최정희(소설가, 1990년 별세)의 사진이 이 소설의 집필 계기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서는 어머니 최정희에 대한 작가의 지극한 그리움과 작가 자신 의 평온하지 않았던 지난 삶의 상흔들이 진하게 배여 있는 듯하다.(실제로 이 책의 ‘8. 선영씨의 젊은날의 노트’는 故 崔貞熙 님의 人脈전문을 재수록 한 것이다.) 때문에 「소금의 시간」은 단지 소설로서가 아니라 작가 김지원의 유난히 신산스러웠던 삶의 궤적들이 잘 익어서 홍옥처럼 감미로운 맛을 자아내는 일종의 자전적 고백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주인공 묘순의 20여년의 삶과 사랑
「소금의 시간」은 1970년대에서부터 90년대까지 주인공 묘순의 20여년의 삶과 사랑을 중심축으로 하여 이루어져 있다. 한때 운동권의 젊은 기수였고 정부의 문화 홍보 관계일을 하는 지식인 김웅을 연모하는 묘순의 순박하면서도 질긴 사랑이 작품의 기본 틀을 형성한다. 그 배면에 어머니 세대의 고즈넉한 사랑들이 쓸쓸한 풍경을 이루고 6?25를 전후한 우리 역사의 비극과 가족사의 불행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묘순은 625때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젊은 처녀다. 연극인 문용구를 통해 김웅을 알게 되고 연모의 정 을 품는다. 소설 속엔 어머니 혜봉씨의 젊은 날 사랑의 일화 혜봉씨의 남편에 대한 친구 선영의 사랑의 우여곡절 가 깔리 고, 묘순의 직장동료들의 갖가지 사랑법이 세밀하게 묘사되기도 한다. 5년여가 지난 뒤 우연히 만난 김웅으로부터 사랑의 고백을 듣고 묘순과 김웅은 결혼한다. 다음 해에 묘순은 계집아이를 낳고, 김웅은 묘순의 직장동료였던 최혜연과 어느 날 돌연하게 동 반자살을 하게 된다. 성인이 된 묘순의 딸 단히는 양방향으로 무한히 펼쳐지는 과거와 현재처럼 세월의 강을 건너듯 문용구와 결 혼을 하려 하고……
어머니세대와 딸세대의 서로 다른 사랑법
대략 이와같은 줄거리를 가진 「소금의 시간」은, 다시 말하면 하나의 중심축 ‘사랑’이라는 축과 그 사이에 가로놓여 있 는 또하나의 축 ‘모녀의 삶 혹은 세대의 사랑법’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대를 넘나드는 그 사랑들은 한결 같이 쉬이 이루어지지 않는 갈구의 사랑이며, 순수하면서도 숭엄한 사랑이다. 주인공 묘순의 ‘성실한 영혼의 깊이로부터 우러나 는’ 오랜 사랑과 어머니 혜봉씨 세대의 스산한 삶이 시간의 바다를 건너오면서 마치 겨울밤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가 슴을 아련하게 적신다. 현대인의 조급한 인스턴트식 사랑법에 비해 묘순의 그 고전적이기까지 한 사랑법은 하도 청명해서 오히려 아름다움을 넘어서고 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숙명적으로 가로놓여 있는 섬과 섬, 그 다가갈 수 없음을, 그 빈 공간을 채워주는 희망이며 축복으로서의 사랑이기에 아름다움 이상의,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우리 삶의 지표이다.
‘온 세상의 혈을 뚫는 일’이야말로……
다른 한편 이 소설을 관류하는 또하나의 주제는 ‘인간문제’, 즉 인간과 운명의 관계를 탐색하는 문제이다. ‘인간이란 신과 악마의 대결장이라는 전제하에 인간은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존재인가 아니면 운명이란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인 가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는’ 소설인 것이다. 독립하여 사는 새로운 삶에 대한 동경, ‘고통없이 얘기할 수 있는 그 누구’에 대 한 그리움과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갈망이 인간과 운명의 관계 문제로 표출되면서 준엄한 실존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 소설의 말 미에서 묘순이 마침내 얻은 사랑하는 사람 김웅의 어이없는 죽음을 겪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차라리 우리 가슴에 꽂는 비 수 같다. “인생에는 이미 정해진 무엇이 있어 그것을 예방하거나 피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세상에는 꼭 만나야 할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인가.” 작가 김지원은 이러한 ‘인간문제’에 대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떠 있는 섬과 섬을 잇는 일, 즉 ‘온 세상의 혈 을 뚫는 일』이야말로 사랑을 진정으로 완성하는 것이며 갈급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는 전언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것은 “ 나는 섬과 섬을 잇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섬은 혼자 떨어져 있는 침묵이잖아욋? 섬을 휴머니즘으로 연결시키고 싶어요.” 라는 연극인 문용구의 말에서 뚜렷하게 밝혀져 있다. 그렇다면 온 세상의 혈을 뚫고 섬과 섬을 잇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모 든 인간이 속임수 없이 정직하게 속마음을 말하는 것으로’? 작가 김지원은 그것만으로 막힌 혈이 뚫리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내가 너의 심장 속에 들어가는 것,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이란 것이 완전히 녹아서 온 생명으로 있는 것, 완전히 녹은 상태 뒤에 크리스탈 같은 소금의 맑은 고립인 것! 이것이야말로 ‘온 세상의 혈을 뚫고 섬과 섬을 잇는 일’이다.
작가 김지원이 혼을 넣어 쓴 소설
작가 김지원이 시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공간의 문턱을 없애며 지나온 삶의 회한과 그만큼의 화해와 이해의 시선으로 혼을 넣 어 쓴 소설, 「소금의 시간」! 그윽하면서도 감미롭기까지 한 이 소설의 감성적 분위기는 맑고 투명한 느낌을 갖게 하고 병적일 만큼 우울하고 어두운 작가의 언어적 감수성은 불가해한 운명의 표정을 스쳐가는 듯하다. 그렇지만 20여년의 세월 안에서 등장인 물들이 보여주는 갈급한 영혼의 안타까움과 그 배면에 깔려 있는 우리 시대의 풍경들이 밀도있게 묘사되는 모습은 가히 인생이 무엇인지 알아챈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진실한 삶의 경지임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책 제목 ‘소금의 시간’이 갖는 심오한 의미 로서도 충분히 깨우칠 수 있는 바 아래의 인용글은 이 작가의 사유의 깊이를 보여준다.
“소금은 야누스같이 양면의 얼굴을 지니고 있어요. 공기 중에서는 결정체이나 물에서는 녹죠. 어떤 시인은 몹시 매혹되었으나 그것이 미처 로맨스로 발전하지 못한 어떤 만남을 소금에다가 비유했어요. 소금은 녹아서 물 속에 있으나 공기 중으로 나오면 반짝거리는 에센스로 자기 자신을 나타낸다. 그럼 우리 영혼은 어디에 완전히 녹을 수 있을까. 찾음과 잃음이 어디에 함께 있을 수 있을까 그랬어요. 시인은 말했어요. 우리의 영혼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사랑 안에는 자기 자신이란 것이 완전히 녹아서 온 생명으로 있다고요. 크리스탈 같은 소금의 맑은 고립은 그러나 완전히 녹은 상태 뒤에야 올 수 있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