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필치로 남도의 풍경과 정(情)을 담아낸 창작동화
『학교에 간 개돌이』로 어린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온 중견작가 ‘김옥’이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정통 동화의 참맛을 제대로 담은 작품을 선보인다. 20년 이상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며, 아이들과 함께 살아온 그는 아이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짚어내고 표현할 줄 아는 작가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에게 믿음직한 선생님이자 다정한 친구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화작가다. 이번 작품에서는 작가 자신이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처음 갔던 곳, 전라남도 보성의 추억이 묻은 장소들을 떠올리며 시간의 필름을 뒤로 돌려 재현해놓고 있다. 당시 낯설고 외롭고 힘든 마음을 달래주었던 자연과 아이들. 그들에 대한 넘치는 그리움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책장을 펼치면 아름다운 남도의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화려한 판타지 장치나 낯선 비유와 유머가 없어도 보는 이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또한 작품의 배경이 된 지역 구석구석을 직접 돌아다닌 화가 백남원의 따듯한 시선이 돋보인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풍경 묘사와 개성 넘치는 캐릭터 표현이 글을 감칠맛 나게 한다.
자연 속에서 신나게 놀고, 열심히 일하며 정겹게 사는 사람들. 그들의 성실함과 소박함, 따듯한 마음이 작품 전반에 묻어난다. 작품 중심부에는 여덟 살 ‘철든 조카’와 서른 살 ‘철부지 삼촌’의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주인공 기백이와 백수지만 순박한 삼촌, 예쁜 선생님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한순간도 지루할 틈을 안 준다.
도시 생활에 익숙한 아이들도 방학 때 가본 시골 할머니집이나 체험학습장, 혹은 엄마 아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과 시골 학교의 정취와 인심에 흠뻑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네 집 내 집, 너는 너 나는 나’라는 건 통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긴 끈으로 자연과 사람과 모든 사물을 하나로 잇고 있을 뿐이다. 기백이의 단짝친구인, 필리핀 엄마와 술주정뱅이 아빠를 둔 혜진이가 밝고 건강하게 뛰놀 수 있는 것도 함께 웃고 울어 줄 이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서로 관심 갖고 챙겨주고 욕심 부릴 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자연도 더 빛을 발하는 법이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살 때 사람도 행복할 수 있듯이.
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읽어줘도 아이들이 재미있게 들을 것 같다. 집에서라면 부모님이 아이와 함께 읽어도 좋겠다. 이 책을 만난 아이라면 자연 속에서 하나가 되어 사는 사람, 사람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자연이 어떤 모습일지 오래도록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 사이에 옥희가 있다면,
‘삼촌이랑 선생님’ 사이에는 기백이가 있다!
물고기초등학교 1학년 기백이는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백수 삼촌이 가장 부럽다. 열두 시가 넘어 일어나도 마음껏 텔레비전을 보고 라면을 먹고 며칠 동안 머리가 덕지덕지 엉켜 있어도 문제될 게 없으니 말이다.
녹차 작업과 꼬막 작업으로 한창 바쁜 기백이네 엄마는 한심한 동생을 보며 울화통이 터지기 직전이지만 삼촌은 천하태평하게 만화책과 개그 프로를 보며 즐거워한다. 그래서 엄마는 삼촌을 더 구박하고 철부지로 여길 수밖에 없다.
“큰일이네. 우리 아들 학교 들어가고 첫 소풍이라 꼭 따라가야 할 텐데.”
“혼자 가라고 해. 선생님이 있는데 뭔 걱정이야.”
텔레비전을 보던 삼촌이 툭 끼어들었어요. 물건 포장할 때 따라오는 비닐을 엉덩이에 깔고 앉아 손으로 ‘뽁뽁’ 터뜨리면서요.
엄마가 눈을 반짝이면서 소리쳤어요.
“오, 그래! 기호 네가 따라가면 되겠구나.”
“내가 왜?”
“왜는 왜야? 할 일 없이 노느니 밥값이라도 해야지.”
“아, 싫어. 내가 어떻게 초등학생들 소풍 가는 데 따라가?”
“왜 못 가? 만 원 줄 테니 따라가.”_본문 중에서
어린 조카 기백이는 백수 삼촌이 부럽다가도 어떤 때는 안쓰럽기도, 또 어떤 때는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백이네 반 담임이 바뀌게 된다. 새로 온 김소명 선생님. 기백이네 옆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자 기백이는 기분이 좋다. 그런데 삼촌은 뭐가 못마땅한지 불퉁거린다.
삼촌은 옆집에 선생님이 이사 온다는 말에 자기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결정했다고 화를 내는 거예요.
“그래? 네가 뭔데 너한테 허락을 받아?”
엄마가 기가 차는지 웃으며 물었어요.
“그래도, 바로 옆에 총각이 살면 그 선생님이 얼마나 불편하겠어.”
“불편할 일이 뭐가 있어? 그리고 선생님이 너 같은 백수 따위한테 관심이나 있겠냐?”
“쳇, 누구는 관심 있대?”
삼촌은 발끈 화를 내더니 자기 방으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어요._본문 중에서
삼촌은 김소명 선생님이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며 본 체도 안 한다. 반면 기백이는 김소명 선생님이 마음에 쏙 든다. 그래서 혜진이와 함께 주운 붉은 동백꽃을 선생님에게 선물한다. 선생님은 그 선물을 기백이와 혜진이에게도 나눠주고, 기백이는 그 선물을 다시 삼촌에게 나눠준다. 기백이는 삼촌과 선생님이 함께 있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면서, 어쩐지 삼촌이랑 선생님이랑 결혼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남자 친구가 있다고 하고, 삼촌은 굳은 결심으로 본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지고 만다. 이러다 삼촌이 장가라도 갈 수 있을지 기백이는 정말 걱정스럽기만 하다.
기백이가 삼촌을 위하고 이해하는 모습, 선생님을 좋아하며 살갑게 따르는 모습을 보면, 주요섭의 단편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 속 옥희가 떠오른다. 앙증맞은 옥희가 사랑 손님과 어머니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하듯, 기백이 역시 삼촌과 선생님 사이에서 약방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기백이의 때 묻지 않은 말투나 야무진 행동 하나하나가 책을 덮고 나서도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자꾸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온다. 기백이가 꿈꾸는 삼촌과 선생님의 사랑이 해피엔딩을 맞을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따라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