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박타박, 서울과 도쿄를 걷고,
길 위에 숨겨둔 나만의 방, 카페에서 숨을 고르고
가끔은 잡화점에 들러 나를 위한 혹은 당신을 위한 선물과 만나는 시간
타박타박, 서울과 도쿄를 걸으며 만난 카페 이야기
도시는 걷는 이들에게 좀더 친절하다. 특히 서울과 도쿄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사소하고 정다운 일상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렇게 사람 사는 풍경으로 쭉 이어지는 길을 걸은 후에는 가벼운 피로와 행복감을 기분 좋게 내려놓을 곳이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길 위의 방, 카페의 문을 열고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그리곤 때로는 기뻐하고 가끔은 후회한다. 카페를 뒤로 하고 나오면서 ‘나와 맞는 공간’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 서울과 도쿄를 걸어온 산책자 박경희(‘로지’)는 “마음 맞는 카페를 정해 운명을 같이한다면 그 카페를 소유한 것과 마찬가지이다”라는 말을 믿는다. 정동, 계동, 소격동, 삼청동, 효자동, 통의동, 부암동 등 옛 동네부터 날마다 표변하는 홍대 앞과 가로수길, 신사동을 거닐고, 공원과 개천 그리고 오래된 동네가 있는 시바마타, 키치조지, 다이칸야마, 진보쵸 등을 걸으면서 박경희는 눈앞에 나타난 무수한 카페들을 두루두루 살피며 하나씩 점을 찍어왔다. 그렇게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카페들을 잘 살피고 골라 <타박타박, 서울도쿄산책>에 담았다.
그녀가 고른 카페들은 언제 가도 변함없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수수해도 자신만의 분위기가 있는 곳들이다. 오래되거나 새롭거나 상관없이, 하나같이 내 방처럼 편안하게 드나들 수 있는 카페들이다. 덕분에 여행을 사랑하는 블로거 사이에서 ‘로지’라는 이름은 곧 ‘카페 감별사’로 통할 정도로 그녀가 이야기하는 카페는 특별하면서도 소박한 매력이 있다. 특히 산책하기에 좋은 길목에 자리 잡은 카페들이 많아서 이 책과 함께라면 서울과 도쿄를 걸을 때 어느 곳에서라도 마음에 드는 쉼터 하나쯤은 만날 수 있다.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고른 만큼 소개하는 카페의 수도 적지 않다. 서울 카페 35곳, 도쿄 카페 10곳, 총 45곳을 책에 실었다. 여기에 걷기 좋은 서울의 골목을 카페와 함께 그림지도로 소개하고 있으며, 벚꽃놀이하기에 좋은 신주쿠 공원,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시바마타와 시모기타자와, 오차노미즈와 키치조지의 이노카시라 공원 등 도쿄를 걸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곳도 함께 안내하고 있다.
서울과 도쿄의 잡화점에서 맛보는 소소한 즐거움
서울과 도쿄를 걸을 때 우연히 마주치는 건 카페뿐만이 아니다. 최근 서울에는 다양한 취향의 물건을 갖춰놓은 잡화점들이 하나 둘 생기고 있다. 디자인이 남다른 생활 소품부터 빈티지와 앤티크까지 없는 게 없는 도쿄의 잡화점들이 익히 알려진 보물창고와 같다면, 서울의 잡화점들은 이제 막 문을 연 선물상자와도 같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작은 물건 하나가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는지 알게 해준다.
지은이는 산책 후 카페에서 피로를 털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잡화점에 들르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잡화점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은 마치 마지막을 위해 남겨놓은 가장 맛있는 부분을 맛볼 때와 비슷하다. 특히 어쩌다 마음이 헛헛한 날, 일상을 소중히 대하는 태도가 깃든 물건들은 위로가 된다.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 전환으로는 충분하다. 게다가 자신을 위해 혹은 누군가를 생각하며 선물을 사는 날에는 짧고도 완벽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
이 책에는 ‘잡화’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을 만날 수 있는 잡화점들이 골고루 소개되어 있다. 각종 인테리어 소품, 토이 카메라, 유럽에서 공수해온 인형과 장난감, 블라이스 인형, 핸드메이드 액세서리, 독특한 문양의 천과 바느질 용품, 헌책, 그릇, 문구 등을 망라한 잡화점들은 서울과 도쿄의 보물창고들을 샅샅이 살핀 후에 엄선한 리스트들이다. 서울 잡화 9곳, 도쿄 잡화 8곳, 총 17곳을 책에 실었다.
그림으로 만나는 서울과 도쿄
이처럼 충실한 서울도쿄산책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는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지은이가 자신만의 방식, 즉 그림으로 길과 공간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내가 지금 걷는 길, 눈앞에 있는 풍경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품으면 도시를 달리 바라보게 됩니다. 사진이 한 순간의 메모라면 그림은 지나온 길을 다시 걸으며 쓰는 일기랄까요. 그래서 담장 밖으로 늘어진 수국이나 능소화, 단풍만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대문 앞 화분에 심어놓은 배추나 상추 따위도 어루만지듯 보게 됩니다. 특히 나만의 방식으로 산책지도를 그려보면 내가 도시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알게 됩니다. 도시의 형태를 알게 되는 거죠. 그러면 조금씩 내가 걷는 도시, 내가 앉아 있는 카페 모두 사랑스럽고 아껴주고 싶어집니다.” (본문 중에서)
지은이는 동네마다 자기 방처럼 드나들 수 있는 카페를 하나둘 정해놓고 산책이 끝나면 들러서 그날 쏘다닌 여정을 그린다. 물론 사진도 빼놓을 수는 없지만,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서 그녀는 자신만의 그림으로 길과 공간을 표현하는 걸 즐긴다. 무언가를 그림으로 그린다는 것은 대상을 긴 시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았다는 이야기다. 지은이는 단순히 풍경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손으로 정성껏 산책지도를 그리고, 그날의 공기, 햇빛, 기분까지 카페라는 공간에 투영해 그림으로 옮긴다.
박경희의 길과 카페 그리고 잡화점 그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곳에 가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한다. 또한 그 공간에서 그녀가 맛보는 사소하고 아름다운 행복을 손에 잡힐 듯 느끼게 해준다. 카페와 잡화점에 관한 정보와 그녀만의 소회는 간결한 텍스트에도 잘 담겨 있지만, 더 많은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은 역시 글보다는 그림이다.
본문 미리보기
“계동에서 가회동, 안국동, 소격동, 삼청동까지 이어지는 동네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입니다. 오래되고 단정한 골목을 걷다 보면 종종 할머니, 할아버지 들을 만납니다. 느지막한 오후, 대문 앞의 의자나 나무 아래 평상에 홀로 앉아 계시거나, 삼삼오오 모여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계시지요. 평상 귀퉁이에 슬쩍 앉아 동네 슈퍼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분들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그러고 있노라면 복잡한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에요.” (본문 26쪽)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봐도 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 속을 태우는구려 불덩이 같은 이 가슴 8분이 지나고 9분이 가네.’ 계동 목욕탕 근처에 있는 로스터리 카페 커피한잔의 물 빠진 푸른색 문에는 ‘펄 시스터즈’의 노래 ‘커피 한 잔’의 가사가 적혀 있다. 만날 그대가 없어도, 직접 장작을 피워서 볶은 원두로 내려주는 드립 커피를 기다리는 마음도 두근거리기는 마찬가지이다.” (본문 32쪽)
“베네에 앉아 있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늘 흘러나오는 보사노바의 경쾌한 리듬에 맞춰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길을 음미하듯 천천히 걷는 연인들, 농담을 하며 웃고 떠드는 친구들 등을 바라보며 여유를 만끽하는 그 순간. 베네는 이탈리아어로 ‘좋다’는 뜻이다.” (본문 36쪽)
“하루에도 몇 개씩 새로운 카페가 태어나고 사라지는 서울에서, 동네 주민들에겐 없어선 안 될 커피 상점이요, 오랜 단골은 물론 새로운 손님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 클럽 에스프레소는 점점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중략) 서울에서 수십 년의 역사를 자랑할 수 있는 카페가 생긴다면 아마 클럽 에스프레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곤 한다.” (본문 65쪽)
“토요일 이른 아침, 늘 그렇듯 늦잠에의 유혹을 떨치고 길을 나섭니다. 자주 가던 동네로 향할 때도 있고, 새로운 곳에 갈 때도 있고, 목적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골목엔 오랜 시간 길들여놓은 카페들이 있고, 새로운 동네는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니까요. 하루 종일 정처 없이 걷다 보면 어디로 가건 괜찮다는 도취감에 휩싸이는 순간이 옵니다.” (본문 320쪽)
“도시의 길은 우거진 숲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내놓은 큰길을 따라가다가 샛길로 접어들 때 찾아오는 약간의 두려움과 떨림은 산책의 결정적인 묘미이지요. 다행인 건, 언제나 가지 않은 길이 가본 길보다 더 많다는 겁니다. 서울 도쿄 청답(靑踏). 도시라는 숲을 누비다가, 카페에서 지구가 멈춘 듯 한가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본문 3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