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교실에서 다하지 못한…
섬진강 선생님 김용택의 마지막 수업
섬진강 꽃그늘 아래 따사로운 인생학교
그곳에서 우리는 세상을 배웠다!
2008년 8월,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학교를 떠났다.
평생 아이들 앞에 서서 시를, 사랑을 직접 몸으로 살아내는 인생도 아름다우리라 믿으며, 시골학교에서 아이들과 뛰놀았던 38년의 세월. 김용택은 열두 명의 2학년 꼬마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마지막 수업’을 시작했다.
“야들아, 느덜이 하도 징글징글허게 말을 안 들어서 나 인자 핵교를 그만둘란다!
인자는 느덜 그만 가르칠라고 헌단 말이여이. 알어?”
유독 선생님을 따랐던 현아가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현아처럼 그냥 와락 울어버리고 싶은 가슴을 농담 섞인 말로 담담히 다스리며 마지막 수업을 이어갔던 그날. 그는 어린 제자들에게 공부 잘하고, 세상에 나가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 대신 단 두 가지를 당부했다. 하나는 ‘사람을 사랑허라’는 것, ‘사람들을 욕허고 비난허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므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자연을 애끼라는 것’이었다.
그가 교단에서 겪어낸 38년 세월은 길었지만, 마지막 수업은 바람처럼 한순간에 지나갔다. 하여 그가 마지막 수업에서 뿌린 그 씨앗 같은 말과 생각 들을 모아, 그리고 마지막 수업에서 그가 채 못 다한 말들을 엮어 이제 책 한 권을 펴낸다.
아직도 그는 새 학기가 시작되는 봄이 오면 아이들을 생각한다. 그렇게 아이들이 그리울 때마다, 마지막 수업이 열렸던 그 아늑한 교실에서 차마 아이들에게 못 다한 말들을 속으로 되뇔 때마다, 그는 아이들이 쓴 동시를 꺼내 읽으며, 교단에서 쓴 일기들을 한 편 한 편 정리하며 책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사회라는 더 넓은 학교에서 혹독한 싸움을 하고 있을, 이 세상 모든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에게 전하고픈 위로와 희망의 잠언들을 글로 남겼다. 하여 이 책은 환갑의 나이에 이르러 발견한 반짝이는 생의 지혜와 함께 시인이 가슴 깊이 숨겨온 진실들이 오롯이 담겨 있는, 이 세상 모든 어른아이들을 위한 따스한 인생수업 그 자체다.
세상의 모든 어른아이들을 위한 위로와 희망의 잠언!
사회라는 혹독한 학교로 나간 이들을 위한 따스한 인생수업
이 책은 이렇듯 자연의 아름다움과 고귀함, 아이들을 가르치며 발견한 생의 진실을 담아내는 ‘김용택 산문’의 미학을 이어가면서도,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다소 파격적이고 직접적인 사회 비판의 목소리들을 함께 싣고 있다. 아이들보다는 돈봉투와 교장 직위에만 관심 있는 썩은 교육자들에 대한 분노, 권력 지향적인 한국의 정치판과 심화되어가는 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에 대한 슬픔, 가난한 가정에서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들에 대한 애틋함이 면면이 담겨 있다.
다소 무거운 발언 사이사이 마치 시나 잠언과도 같은 짧은 글들과 초등학생 제자들의 동시, 일기가 삽입되어 여운을 남긴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 그의 수업이 조금이라도 진지해질라치면 조잘거리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던 아이들처럼, 5학년 채훈이는 책 속에서 “오늘은 시험 보는 날 / 나는 죽었네. / 나는 죽었어. / 왜냐하면 / 꼴등을 할 테니. / 나는 죽었네”라고 탄식하고, 2학년 대길이는 “삼촌이 다슬기를 팔아서 운동화를 사준다고 했다”며 새 운동화 생각에 여념이 없다.
책은 총 4부 구성으로, 이렇듯 슬며시 미소가 머금어지는 아이들과의 추억들 사이사이에 우리 시대가 고민해야 할 교육과 사회의 묵직한 화두들을 제시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먼저 1부 ‘아름다운 고립’에서는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촌늙은이 취급을 받으면서도, 도시인들의 개발 위주의 정책과 성과주의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왔던 그가 끝내 이루고자 했던 꿈과 희망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나는 그 어디에도 고개를 숙이기 싫다. 그 어떤 종적인 관계도 나는 싫다. 나는 세상의 진실을 노래하는 시인이고 싶고, 어린이들 앞에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는 선생님이고 싶고, 그리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고 싶다.
나는 고립의 두려움을 모르는 채 진실의 힘을 믿고 오랜 시간 홀로 살았다. 아득한 저쪽, 외로운 청년의 푸른 어깨에 매인 청춘의 그 팽팽한 푸른 끈을, 그 막강하고도 두려움 모르는 외로움을 나는 아직 놓지 않았다. (「아름다운 고립」, 20쪽)
이러한 자기고백과 함께 그는 교단에 선 동안 그가 대면하고 견뎌야 했던 우리 교육계와 사회의 부정들에 서슬 퍼런 분노를 토하기도 한다.
교사들의 승진을 위한 점수 따기 논문들은 거의 다 작년 것을 올해 것으로 이름만 바꾸고 통계 숫자만 바꾸어 작성한 것이라고 한다. 아니면 이 도道의 것이 저 도로 가고 저 도의 것이 이 도로 오는 식으로 연구 논문, 연수 논문 들이 돌고 돌았단다. 다들 그렇게 해서 점수들을 땄단다. 대학에서 논문을 사고판다는 말도 예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정부 고위직에 들어가려는 교수들 모두 하나같이 논문 표절 시비에 안 걸려든 사람이 없다. 거짓말을 하고 나서 아이들 앞에 서서 무엇을 가르치는가. (「거짓논문들」, 30~31쪽)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악마 같은 말들을 한다. 우리 민해가 여야 여성 대변인들의 말싸움을 보며 한 말이다. 정말 그렇다. (「여야 여성 대변인」, 50쪽)
더불어 그는 ‘국토와 교육과 나라의 설계는 정권과 상관없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정권은 5년이고 국토는 영원’(55쪽)히 대물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 사회에서 그는 세상의 휘황함과 변덕스러움에 휘둘려 갈팡질팡하느니 차라리 아름답게 ‘고립’되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는 길을 선택하기로 한다.
2부 ‘지키고 싶은 것들’에서는 그가 가슴 깊이 사랑해온 ‘선생’이라는 직업과 어머니, 자연, 아이들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토로한다.
교단에 선 동안 그가 가장 간절하게 지키려 했던 것들 중 하나는 ‘아이들의 꿈’이다.
우리나라 학부모님들이나 학생들의 꿈이 하나같이 의사요 판사요 교사요 공무원이라는 현실이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우리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어버리지요.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인간의 꿈이 겨우 의사가 되는 것이란 말입니까?
꿈이 의사요 교사요 판사인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지요. 또 개인의 꿈을 누가 간섭할 바도 아닙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꿈이어서 대통령이 되면 무엇합니까. 정말 백성과 세상 사람들을 위한, 아름답고 훌륭하고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국민들의 환호를 받는 좋은 대통령이어야지요. 대통령이 꿈이 아니라 대통령이 되는 것도 인생의 한 과정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한 나라의 모든 학생들이 ‘직업’이 꿈인 나라는, 그 나라 사람들 모두 불쌍하고 초라하게 합니다. (「공공의 꿈」, 72~73쪽)
교육이 직업인을 양성하여 먹고사는 일에 능수능란한 사람을 배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요, ‘사람’을 길러 바른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라는 그의 믿음과 신념은 이 책 구석구석에서 빛을 발한다.
이어 3부 ‘꽃들을 따라다니며 시를 쓰다’에서는 자연과 아이들, 시와 가난한 이웃들 속에서 살아가는 시인의 일상이 펼쳐진다. 개불알풀꽃, 냉이꽃, 구절초꽃, 봄맞이꽃 등 봄꽃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며, 새로운 계절과 자연에 경탄하는 그에게 낮은 땅에서 피어난 이름 모를 풀꽃들은 그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매개물이자 시 그 자체다.
이른 봄 길, 나는 꽃들을 따라다니며, 이 작은 생명들 곁에 엎드려 시를 썼습니다. 아니, 내가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이 꽃들이 나를 불러 내게 이렇게 저렇게 시를 쓰라 일러주었지요. 나는 다만 그들의 말을 받아 적었을 뿐입니다. 봄이 되면 사람들이 눈을 들어 먼 산의 화려한 꽃을 찾는 동안 나는 이 작은 꽃들 앞에 절하듯 엎드립니다. (「꽃들을 따라다니며 시를 쓰다」, 132쪽)
마지막으로 4부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에는 시골 농군에서 교사로, 다시 시인으로 끝없이 공부하고 고민하며, 삶을 바지런히 일구어왔던 시인의 지난 생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중 「계획 없는 인생은 재미있다」는 그가 지난 생을 회상하며 쓴 작은 자서전과도 같은 글이다.
서울에서 낭인생활을 하던 청년 김용택은 귀향해 섬진강변에서 오리농장을 하다 쫄딱 망한다. 그런 그를 보다 못해 어느 날 친구가 막무가내로 접수한 교사시험 원서로 인해 그는 예기치 않게 선생님이 되었고, 월부 책장수에게서 ‘제일 폼나게 생긴’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사면서 또 예기치 않게 문학의 길로 들어선다. ‘절망이 희망이 되고 희망이 또 절망이 되’는 인생의 비의秘意. 그는 이 책에서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필치로 지난 생의 흔적들을 섬세하게 복원해낸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고해다. 그 누구도 삶의 고통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게 인생이다. 불행을 행복으로 가꿀 수 있는 것은 사람뿐이요 삶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 나는 믿었다. 가난한 작은 마을에서 강과 산과 나무와 농부들의 일생을 보며, 나는 세계를 얻었다.
스물한 살 새파란 청춘 시절 코흘리개 아이들 곁에 우연히 섰으나, 나는 그 길에서 내 생의 한 시절이 끝나기를 바랐다. 지금 내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렸다. 내 앞에 아직도 어린 영혼들이 나를 바라보면서 앉아 있다. 아이들 곁에 오래 머물렀던 내 삶은 작고 아름다웠다.
정말이지 나는 나를 깊이 사랑한다.
이 아름다운 인생을…… (「계획 없는 인생은 재미있다」, 259~266쪽)
한편, 그간 유수한 작가들과의 공동작업으로 대가들의 책에 환한 빛을 더했던 김세현 화백과 김용택 시인의 만남도 볼거리다. 황석영의 『모랫말 아이들』, 신영복의 『청구회 추억』 등에 그림을 그렸던 김세현 화백은 이 책에서 꽃비 날리는 봄부터 함박눈 내리는 겨울까지, 섬진강 마을의 사계와 그 속에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정을 아름다운 수묵화로 그려내 책의 정취를 더했다.
학교를 떠난 김용택 시인은 지금 그의 영원한 고향이자 시원始原인 섬진강변에 새 집을 짓고 소박한 이웃들과 허물없이 어울려 사는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학교는 떠났으되 그는 여전히 삭막한 도시인들의 가슴을 동심과 순수로 적셔주는 영원한 섬진강 선생님이다.
교단에 선 38년 세월 동안 촌지는커녕 시골 아낙들이 준 황토물 들인 속옷과 맛동산 선물에도 몸 둘 바 몰라 했던 소박하고 아름다운 선생님. 동기들이 모두 교장교감이 되고 장학사가 될 적에도 ‘선생先生이라는 말을 나는 사랑한다’며 아이들과 함께 뒹굴며 평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평생의 자랑이자 명예로 여겼던 진짜 선생님.
학교를 떠난 김용택 시인이 그렇게 다시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소희야, 곧 봄이 오겠구나.
우리 학교에 봄이 오면 좋지.
봄이 오면 학교 둘레 벚꽃이 만발하고, 꽃이 지면 화사한 꽃잎들이 지붕을 넘어 날아왔지.
그러면 너희들은 그 꽃잎을 입으로 손으로 받으려고 고개를 쳐들고 운동장을 뛰어놀았지.
꽃잎이 나비가 되고 우리들이 꽃잎이 되어 붕붕 훨훨 하늘로 날아올랐지.
지붕을 넘어 날아오는 꽃잎들이 내 발아래 하얗게 떨어져 쌓이던 그 봄날들을
내 어찌 잊겠느냐.
아이들아, 내가 사랑했던 아이들아! 내 생의 위대한 스승들아!
너희들은 내 고단한 인생의 길을 환하게 밝혀준 스승들이었단다.
보고 싶구나.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