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성숙을 꿈꾸는 자는 늘 미숙한 채로 남아 있게 된다. 성숙이 좌절된 자리에 자폐가 생겨난다. 자위와 자해, 두 가지 형태로 드러나는 자폐의 증세는 오로지 과거를 되돌아봄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그녀에게 기억이란 날로 고와지는 봄의 햇살 같은 것이다. 그녀는 기억의 요람 안에서 흔들린다. 그녀는 그 흔들림을 통해 잔잔히 퍼져가는 고통과 치유의 파문을 느낀다. 기억, 그것이 설사 아무리 뼈아픈 것에 대한 반추라 할지라도, 기억만이 그녀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고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 _1996, 작가의 말
지금의 청춘들이라고 그 사정이 다를까.
마르크스 대신에 상식백과가 들려 있어도, 민중가요 대신에 가슴 아픈 사랑노래를 듣고 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 시간은 꼭 스무 살이 아니어도 될 것이다.
그것은 스물에 찾아올 수도, 스물다섯에 찾아올 수도, 또 서른 즈음에 느닷없이 당신을 찾아올지도 모른다. 젊음, 그 고민과 방황의 시간은.
결국 그것은, 우리들이 저항했던 것은, 싸워 얻고자 했던 것은, 청춘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 자신일 터이니. 성숙의 시간을 거쳐 어른이 되고자 하는 ‘나’일 터이니 말이다.
십 년도 더 지난 옛 책을 다시 내는 마음이란 이런 것이다. 십 년 전에 처음 책을 낼 때 읽어주었으면 했던 나이의 독자들이 있었다. 지금 그 나이가 된, 십 년 전에는 코를 흘리거나 준비물을 빼먹고 다녔을 그들, 그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수줍은 소녀가 낯을 가리듯 이 책은 독자들의 나이를 가린다.
이 책이 꼭 그 나이와 더불어 살고자 하니 내 마음이 늙은 어미 같아 그런 독자들을 짝 채워주고 싶다. _2007, 작가의 말
젊음의 슬픔과 방황,
그 소진과 성숙의 의미를 독특하게 그려낸, 아름다운 성장소설
서른 즈음에 읽었던 소설을 마흔에 이르러 다시 펼쳐든다.
단정한 문장 사이로 동경과 갈망과 결핍의 한 시절이 빛살처럼 지나간다.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지 기어이 알아내고자 때로는 온몸으로 바깥으로 향하고, 때로는 내면 깊숙이 침잠하던 시절이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간다 해도 누구나 청춘의 시절을 겪는다. 그 시절 우리가, 그들이 얼마나 서툴고 불안한 존재였는지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작가는 그 시절을 이야기할 때 빠져들기 쉬운 유혹들을 외면한다. 80년대를 통과한 스무 살 젊음의 고뇌와 방황을 과장하지 않는다. 허세를 부리지도, 엄살을 떨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미화하지 않는다. 곳곳에서 웃음이 스며나지만 사유는 가볍지 않다. 남루할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지는 인물들은 격조 있는 문체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치장들을 걷어버린 자리에 오롯이 남아 있는 것은 삶에 대한 진정성이다. 삶의 근원에 맞닿아 있는 가식 없는 울림이다. 박현욱(소설가)
『푸르른 틈새』를 통해 나는 내 스스로 나도 모르게 유배시킨 나의 가장 소중한 우울을 곱씹는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잃어버린 지도 모른 채 살았던 내 과거와 만나며,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후미진 과거를 남몰래 애도한다. 책갈피를 서너 장만 넘기면, 나는 어느새 스무 살 풋내기 시절로 돌아가 있다. 그녀의 문장 속에서는 예리한 지성과 따스한 멜랑콜리가 불안하게 공존한다. 권여선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내게는 그저 작가 한 사람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 완전히 떠나오지 못한 나의 이십대, 내 소중한 벗들의 이십대가 동시에 덮쳐오곤 한다. 해설이 아닌 인터뷰를 선택한 이유는 그녀를 삼인칭의 미학적 거리가 아닌, 이인칭의 육체적 직접성으로 만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작품 그 자체만큼 ‘이인칭의 그녀’를 뜨겁게 대면할 수 있는 또 다른 참고문헌은 없을 것이다. 정여울(문학평론가)
어느 날 문득, 준비 없이 어른이 되어버린 당신에게, 이 소설을 권한다.
설령 모든 것이 한층 더 나빠진다 하더라도
나는 말을 믿고, 기억을 믿고, 그밖의 다른 것들을 믿을 것이다.
닫히지 않은 이야기, 닫히지 않은 믿음, 닫히지 않은 시간은 아름답다.
영원히 끝나지 않은 미완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북극을 넘어 경계를 넘어 스스로 공간을 열며 뛰어가는 냄비처럼,
상처로 열린 우리의 몸처럼, 기억의 빛살이 그 틈새,
그 푸르른 틈새를 비출 때 비로소
의미의 날개를 달고 찬란히 비상하는 우리의 현재처럼……_본문에서
* 초판발행 | 2007년 7월 27일
* 153*224 | 312쪽 | 값 9,500원
* ISBN | 978-89-546-0278-5 03810
* 책임편집 | 조연주(031-955-8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