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마저 협찬 받아서 하는 이 더러운 세상!
벨기에 최고 권위 빅토르 로셀 상 수상작
『어느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의 죽음』은 단편소설집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으로 독특하고도 거침없는 상상력을 녹여낸 매력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준 벨기에의 작가 토마 귄지그가 2001년 처음으로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자조 섞인 조롱과 해학, 우수 어린 블랙유머, 힘이 넘치는 젊은 문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투시력으로 유럽 문단의 ‘앙팡테리블’로 떠오른 귄지그는 이 작품으로 ‘벨기에의 공쿠르 상’인 빅토르 로셀 상뿐 아니라 2002년 벨기에 고등학생들이 뽑은 좋은 소설 상을 받았고, 연극 무대에도 올라 호평을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이 얄미우리만치 허를 찌르며 우리 시대의 실존과 고독을 능청스레 이야기하는 소설집이었다면, 『어느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의 죽음』은 카프카(『아메리카』), 셀린(『밤의 끝으로의 여행』), 카뮈(『이방인』)를 떠올리는 귄지그 식 실존주의 소설이다. 한 익명의 국가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그 전쟁에 뛰어든 인간 군상들의 용광로를 우스꽝스럽고도 서글프게 보여주는 이 소설은 ‘지금-여기’, 즉 21세기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미도 명분도 없는 전쟁과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귄지그 특유의 독소毒笑 섞인 당의가 먹음직스럽게 입혀진 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법도 신념도 없는 세상,
생존 본능만 남은 인간들의 핏빛 ‘무한 버라이어티 쇼’가 펼쳐진다!
전후戰後의 사라예보를 닮은 가상의 도시. 도시는 뚜렷한 명분도 없는 기이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인간들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돈줄에 옭아매여 있고 시청률을 위한 가짜 전쟁이 우스꽝스러운 쇼처럼 펼쳐지는 그곳에는 이 세상 온갖 2개 국어 사용자들이 몰려와 전망도, 희망도, 탈출구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 모든 가치는 휴지 조각이 되어 인간들의 발길에 치이고, 무관심과 잔혹성과 위협이 만연한 도시에서, 시민들은 비판 능력과 자유의지를 빼앗긴 채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하며 살아간다. 그들에겐 이 도시를 탈출하고자 하는 의욕조차 없다.
도시는 더럽고 가난한 교외지역과 휘황찬란한 중심지로, 돈을 위해 진창에 뛰어드는 군인들과 다국적 대기업이 짜고 벌이는 텔레비전 쇼의 세계와 안락한 안방에 들어앉아 그 쇼에 열광하는 시민들의 세계로 양분되어 있다. 그리고 주인공인 ‘나’는 그 대립되는 두 세계 모두에 속한다.
시답잖은 사건 때문에 목숨이 날아갈 판이 되자 ‘나’는 어쩔 수 없이 자원입대를 하게 되고, 그때부터 인생은 시스템의 룰에 따라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간다. 법도 신념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또다른 세계에 강제로 ‘소속당한’ 것이다.
소설은 기억나지 않는 ‘미지의 사건’ 이후 식물인간이 되어 병상에 누워 있는 ‘나’가 기억을 더듬으며 과거를 추적해나가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나’를 둘러싼 병원 사람들의 시선은 적의와 살의에 가득 차 있다. 어느 밤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파파라치까지 난입해 ‘나’를 찍어 간다. 병상에 누운 ‘나’에게 하나 둘 떠오르는 기억, 하지만 끝끝내 떠오르지 않는 치명적 기억 한 조각. 나는 누구인가?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그토록 나를 증오하는가?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마다않는 ‘나’는 마피아 대부이자 유명 가수의 여자를 폭행했다는 이유로 조직의 협박을 받고, 대부의 라이벌인 여가수 카롤린을 암살하라는 청부를 받는다. 전장을 방문해 위문공연을 하는 카롤린을 죽이기 위해, ‘나’와 ‘나’의 뒷거래 동업자 모크타르는 그녀의 경호 부대인 ‘가을비’ 민병대에 위장 입대한다. 하지만 쉽게 사랑에 빠지는 ‘나’는 카롤린을 살해하기는커녕 그녀에게 무력한 사랑의 감정을 느껴 그만 ‘거사’를 그르치고 만다.
그렇게 목표를 잃고 민병대의 일원으로 ‘텔레비전 쇼-전쟁’에 휩쓸리던 ‘나’는 전방의 촬영장 폭발 사건으로 죽어가는 중상자들을 살리고자, 상상도 할 수 없는 엉뚱하고도 기괴한 짓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 사건들 뒤에 숨은 교활한 진실이 하나 둘 베일을 벗는데……
이 소설에는 ‘2개 국어 사용자’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소설에는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2개 국어 사용자bilingue’라는 단어에는 여러 상징성이 있겠지만, 이 소설에서는 ‘이중성’을 가진 인간, 두 언어, 두 문화, 두 진지 사이에 놓인 인간, 정체성을 상실한 이도저도 아닌 ‘회색인간’을 가리킨다. 작가가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세계 역시 의도적으로 이원화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 이원화된 사회에서 ‘2개 국어를 말한다’는 것은 두 개의 언어, 즉 이중 언어를 사용한다는 뜻으로, ‘2개 국어 사용자’란 넓은 의미에서 ‘교활한 인간’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바이다. 완벽하게 교활한 인간의 이야기. 법도 신념도 없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겠다는 본능만 있을 뿐, 인간성의 물기라곤 단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메마른 인간에 관한 이야기.
주인공 ‘나’는 흐릿한 의식과 메마른 생존본능만으로 살아가는 도시의 모든 이를 대변한다. ‘나’의 동업자 슬로베니아인 모크타르, 개차반 남편의 죽음 이후 만신창이가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는 모크타르의 여동생 수지, 모크타르의 늙은 연인 마담 스카폰, 식당을 영하는 베트남인 다오 민, 마피아 대부이자 가수인 짐짐 슬레이터와 그의 부하들, 텔레비전 쇼의 핵심 멤버인 ‘가을비’ 대장 어빙 낙소스와 텔레비전 쇼 사회자인 전직 비행기 조종사…… 그러나 이런 그들조차 자본주의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의 피해자들이다. 그들의 영혼은 상처 입었고, 그들은 저마다 정신적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결핍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갈구하지만, 자신들이 그것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소설을 읽는 내내 우리를 허전하게 만드는 그 무엇, 그것은 인간 본성일 수도 있고 사랑이나 신뢰, 우정, 연민 또는 도덕성 같은 어떤 가치의 진정성이리라. 왜 이 이야기가 불현듯 그로기 상태의 ‘나’가 아무런 희망 없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끝나는지 의아한 것도 바로 그 누락된 무엇 때문일 것이다. 귄지그 식 ‘언해피 엔딩’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타당하다.
카프카, 셀린, 카뮈의 계보를 잇는 ‘21세기의 실존소설’
『어느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의 죽음』이 출간되었을 때 프랑스 평단에서는 이 작품을 두고 카프카, 셀린, 카뮈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무력한 개인이 권력 혹은 폭력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는 과정을 해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카프카 계열로 분류될 수 있다. 그리고 물신숭배와 인위적인 욕망을 양산해내는 병든 세계를 신랄하고 과격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셀린을 닮아 있고, 부조리한 가치체계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 던져진 인물을 통해 그 가치체계를 폭로한다는 점에서는 카뮈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귄지그는 그들을 답습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만의 ‘K’ ‘바르다뮈’ ‘뫼르소’를 만들어낸다. 그의 주인공은 반항할 줄 모르는 인간이다. 반항에 대해 무기력할뿐더러, 그 의미나 가치조차 모른다. 그는 자본주의라는 물결에 휩쓸리는 자갈같이 무력한 존재다. 그가 저지르는 악행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카뮈의 뫼르소가 졸고 있는 의식에서 깨어나는 과정, 그리고 깨어나는 의식이 불가피하게 허망한 모순에 부딪혀 부조리를 낳게 되는 결과를 보여주는 반면, 귄지그의 ‘나’는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 반수상태로 머문다. 시스템에 갇힌 인간은 깨어날 수가 없다. 그저 “괜찮아, 심각할 것 전혀 없어. 그래, 별것 아니야.”라고 중얼거릴 뿐.
‘곧 다가올 미래에 관한 풍자소설’이라는 작가의 말이 위협적일 것도 없이 이 소설은 ‘지금-여기’ 21세기 한국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거침없는 입담과 엉뚱 발랄한 비유에 마냥 낄낄거릴 수 없는 이유다.
이 책이 받은 찬사
기이한 첫 소설. 냉혹한 유머, 기발한 상상력, 번뜩이는 기지로 가득하다!
토마 귄지그는 흉포한 이야기에 즐거움을 섞어넣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_렉스프레스
토마 귄지그는 가차 없이 페이소스의 목을 쳐낸다. 그는 어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싶다는 욕망을 서스펜스로 추동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이야기를 읽고자 하는 욕망’이다. _르 수아르
그야말로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소설. 잔인하고, 냉소적이고, 진중하다.
터지는 웃음보만큼이나 깊은 생각으로 이끄는 책.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_알리르 아부아르
벨기에 초콜릿 같은 근사한 솜씨로 씌어진 강렬한 이야기.
너무 감미로워 아찔한 정도지만, 입 안에서 폭발하는 그 맛 만큼은 경험할 가치가 있다.
모두 떠들어대기 전에 읽어둘 것! _르 파리지앵
옮긴이 윤미연
부산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캉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우리는 함께 늙어갈 것이다』 『마지막 숨결』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구해줘』 『홍당무』 『첫 번째 부인』 『나의 라디오 아들』 등 다수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 2010년 3월 25일 발행
* ISBN 978-89-546-1069-8 03860
* 128*188(유선/양장) | 344쪽 | 12,000원
* 담당편집 : 김지연(031-955-88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