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 동화의 맥을 잇는 현대판 ‘놀이 동화’
아이들의 일상을 신선한 소재로 풀어내는 작가 오시은. 지난 작품 『귀신새 우는 밤』에서는 귀신을, 이번 작품에서는 놀이를 소재로 아이들 일상에 한발 다가서고 있다. 이름하여 현대판 놀이 동화. 현덕 동화의 맥을 잇는, 아이들의 놀이 세계를 담아낸 밝고 건강한 작품이다.
현덕은 1930년대 아이들의 놀이 세계를 문학작품으로 옮겨놓았다. 주인공 노마가 동무들과 펼치는 놀이 이야기는 지금 읽어도 흥미진진하다. 시대만 달라졌을 뿐, 『훈이 석이』의 주인공 훈이와 석이도 동네 곳곳을 누비며 놀이 세계에 흠뻑 빠져 있다. 요구르트 수레, 양동이, 광고 전단지와 같은 주변 물건뿐 아니라 말 한마디, 몸짓 하나도 훈이와 석이는 건강한 놀잇감으로 만들어낸다. 놀이를 위한 놀이가 아닌 일상이 그대로 놀이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훈이 석이』는 현덕 동화 못지않게 새롭고 다양한 놀이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이 책을 통해 아이들은 놀이가 무엇인지, 놀이는 어떻게 찾는 것인지를 스스로 깨우치게 될 것이다. 놀이 공간 속에서 자연스레 사회성을 익히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함께하는 삶,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몸으로 실천하는 첫걸음이다.
철없지만 풋풋한 ‘동심’으로 꽉 찬 찰떡궁합 개구쟁이들
훈이와 석이는 동갑에, 궁전빌라 같은 층에, 엄마랑 단둘이 산다는 게 공통점이다. 하지만 생긴 건 정반대. 훈이는 찐빵처럼 둥글넓적하고, 석이는 가래떡처럼 길쭉하다. 훈이와 석이는 둘도 없는 찰떡궁합 단짝이다. 물론 엄마의 잔소리가 끊이지 않는 개구쟁이 아들이지만. 요구르트 배달을 하는 훈이 엄마의 수레는 두 아이의 아주 특별한 기관차다.
“저기 기관차가 있다!”
훈이는 구르듯 달려가 손잡이 아래로 기어들어 갔지.
“내가 앞을 맡을 테니, 자네는 뒤를 맡도록 하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석이는 가느다란 다리를 나란히 붙이며 “넷.” 하고 경례를 했지.
이렇게 기똥찬 장난감이 손아귀에 들어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야.
“이대로 적군을 뚫고 우리 편에 식량을 전달한다. 속도를 높여라!”
뒤에 앉은 석이는 끊임없이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냈지.
“칙칙폭폭, 칙칙폭폭.”
그때였어. 뒤쪽에 비상 신호가 켜졌지.
“거기 서지 못해!”
적군이 등장한 거야._본문 중에서
기관차 놀이는 훈이 엄마, 아니 적군이 등장하는 순간 끝난다. 석이 엄마의 미장원에서도 개구쟁이 놀이는 여전하다.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는 방식이 참 독특하다. 엄마가 손님으로 온 할머니의 머리를 만지는 모습을 적군이 인질을 잡고 있다고 상상한다. 괜히 석이 엄마, 아니 적군에게 아이스크림값을 요구했다가 된통 꿀밤만 얻어맞는다.
찰떡궁합 훈이와 석이라 해도 날마다 사이가 좋은 건 아니다. 양동이 하나씩 들고 개천에 나간 날, 훈이는 해오라기의 주둥이가 되고 석이는 해오라기의 다리가 되어 배스를 잡는다. 땡볕 아래서 땀을 삐질삐질 흘려도 송사리 한 마리 잡지 못하자, 결국 둘은 맞서 싸우며 주먹보다 더 아픈 말로 상처를 준다.
석이가 이를 빠득빠득 갈며,
“감히 뚱뚱할멈 아들 주제에 까불고 있어.”
훈이는 콧김을 씩씩 뿜으며,
“자기는 마귀할멈 아들이면서.”
석이가 앙칼진 목소리로,
“뚱보들은 배나 빵 터져 버려라.”
훈이도 지지 않고 으르렁대며,
“말라깽이들은 말라 비틀어져 버려라.”
훈이와 석이는 같은 곳을 향해 가면서도 마치 다른 곳을 가는 것처럼 멀찌감치 떨어져 걸었어.
빈 양동이가 손에서 사납게 흔들렸지._본문 중에서
그렇게 둘은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홱 돌아서고, 그 싸움은 엄마들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상황이 자꾸만 후회와 아쉬움으로 바뀐다. 아무리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내도 혼자 하면 외롭고 심심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 어느덧 훈이와 석이의 마음의 키도 한 뼘씩 자라나 있다.
놀이를 통해 성장하는 아이들
『훈이 석이』는 아이들의 말과 몸짓을 통해 천진한 동심의 세계를 꾸밈없이 보여준다. 이 작품이 판타지동화보다 더 흥미롭고 유쾌한 것은 현실 세계가 작품에 잘 녹아들었기 때문일 테다. 한 부모를 둔 넉넉지 않은 형편의 아이들이지만, 훈이와 석이는 늘 밝고 당당하다. 그리고 한바탕 신나게 놀이를 하는 사이에 훌쩍 자라난다. 두 아이의 모습에서 건강한 놀이를 통해 성장하는 아이들은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짤막한 문장과 톡톡 튀는 문체가 놀이만큼이나 생동감 있다. 한 편의 이야기동시를 맛본 느낌까지 든다. 화가 박정섭은 개구진 상상력으로 개성 넘치는 그림을 선보인다. 알록달록한 색감과 우스꽝스러운 캐릭터 표현이 이야기를 더욱 실감나게 한다. 마치 훈이와 석이가 책 속에서 뛰어나와 같이 놀자고 꼬드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