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S 노트 - 고양이를 사랑하는 가수 호란이 번역하고, 고양이에 호기심 많은 아티스트 박훈규가 디자인하다!
911 테러가 일어나고, 세상이 험악할 때 나약한 우리들은 ‘영웅’에 목말라 한다. 이 세계 저 너머의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영웅말이다. 태어나자마자 두 눈을 잃었을 때에도, 911 테러가 일어나 두 덩이 월드트레이드 센터가 주저앉는 곳에서도, 비극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남아 이전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행복해지려고 하는 고양이가 있었다. 털은 검고, 겨우 젊은 아가씨 두 손바닥만 한 생명, 그 옛날 『오디세우스』의 시인처럼, 호머라는 이름을 당연히 받아들인 고양이.
눈이 없는 검은 고양이 얼굴을 상상해보라. 호머는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아야 할 눈이 없다. 태어나자마자 치명적인 세균에 감염된 호머는 너무 일찍 삶의 위기와 맞닥뜨렸다. 하지만 호머는 그게 절망인지 무엇인지도 모를 아기였다. 수의사 패트리샤 컬리는 그 아기를 살리기 위해 두 눈을 얼굴에서 뽑아내야만 했다. 눈을 잃고, 응당한 시각을 잃고, 호머는 얼굴의 대부분인 눈을 잃음으로써 얼굴의 대부분조차 상실했다. 호머가 주먹만 한 고작의 몸으로 시작해야 할 삶은, 모르고 어머니를 사랑한 탓에 결국 두 눈을 찌르고 테베를 떠나가야만 했던 오이디푸스의 삶의 가장 아픈 그 순간보다 더 쓰라린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호머는 살아남았다. 그 작은 털실뭉치는 그래도 살아남았다. 호머의 마음에 무엇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그가 그 작은 고작의 몸 안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감히 인간의 수치로는 가늠조차 못하겠다. 호머는 거기서부터 깨끗하게 일어났다.
호머는 그웬을 만났고, 그웬은 여느 범박한 인간들처럼 그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사려 깊은 그웬도 몰랐다. 영웅으로 태어난 호머에게 인간들의 그 조잡한 삶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호머는 숲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사막을 횡단하지도 않았다. 당신을 떠나지도 않았다. 호머는 거기서 그웬이 아는 세계를 받아들였고, 그웬을 사랑에 빠뜨렸다. 그웬이 알던 세계를 조금씩 뜯어고쳐나갔다. 행복이라는 인간의 말이 얼마나 왜소한 것이었던가. 사랑은 편만한 이 세계에 넘쳐흐르는데 그것을 뒤집어 다른 사람을 밟고 살아야 하는 불안한 동물 인간은 얼마나 가련한가.
물론 호머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몰랑몰랑한 그의 가슴은 그런 식이 아닐 것이다. 대신 그러려는 사람들의 팔과 가슴에 파고들어 ‘가르릉 거린다.’ 호머는 볼 수 없으므로 ‘처음 본 사람’이라는 가혹한 타인의 개념조차 없다. 처음 본 당신의 품에 호머는 기어코 파고들어가 ‘가르릉 거린다.’ 야옹…(안아줘), 야…옹(왜 안아주지 않아?), 야옹……(그래야 당신을 사랑할 수 있다구). 이보다 용기 있는 영웅이 있을까. 그의 작고 소박하게 뛰는 가슴에서는 사랑에 실패하여 상처를 받는다는 인간의 법칙이 부러진다. 영웅에게 평범한 전사의 칼이 무용지물이듯이 말이다.
그웬이 받아 적은 호머의 삶은 가히 영웅의 그것이다. 거기에 절망도, 불안도, 한계도 없는 사랑과 사랑하며 사는 삶의 요약이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이 수행해야 할 당연한 사랑과 그것을 거부하는 성공한 인간들의 남루한 그림자가 있다. 무엇보다 호머의 삶이 영웅의 그것인 것은, 어떤 위대한 문명인의 성공도 호머의 일상에서는 오래 반성해야 할, 불안하고 여기까지 쫓기며 긴 삶이라는 확신을『우리는 혼자가 아니다』를 읽어본 자라면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으면, 호머를 만나고 싶을 것이다. 그만큼 솔직해질 것이다. 당신 삶도 이 현실 어느 모서리엔가 치이고 어느 구석엔가 처박혀 말이 아닐 것이다. 그때에, 눈을 감고, 호머를 떠올리면 된다. 그러면 눈 감은 그 속에서 호머가 가르릉 거리며, 야옹…(안아줘)하고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