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했던 것이다.
그때는, 사실, 우리가 서로 사랑했던 것 같다. 당신과 내가.”
사랑의 순간들은 존재하되, 사랑은 없다!
추락하는 사랑의 생생한 기록
『당신도 나도 아닌』은 페미나 상 수상작가 카미유 로랑스가 2006년에 발표한 소설로, 국내에는 『그 품안에』 『사랑, 소설 같은 이야기』에 이어 세번째로 소개되는 작품이다. 대담한 발상과 마녀가 휘두르는 칼처럼 정곡을 찌르는 날카롭고 지적인 글쓰기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단과 독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작가 카미유 로랑스는 소설이 제기할 수 있는 온갖 질문의 핵심, 인간사의 가장 거대한 주제인 ‘사랑’에 끊임없이 천착해왔다. 페미나 상 수상작인 『그 품안에』에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주체인 남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사랑, 소설 같은 이야기』에서 사랑이라는 불가해한 영역 저편에 드리운 환상의 장막을 걷어내며 그 본질에 대해 탐색했다면, 이 소설 『당신도 나도 아닌』에서는 사랑이라는 임무 수행에 나선 자들의 필연적인 실패에 대해 이야기한다.
종종 뒤라스와 비교되며 사랑이라는 감정의 은밀함과 역설, 양면성을 섬세하게 구현해내는 작가라는 찬사를 받는 카미유 로랑스는 이제 사랑이 추락한 지점, 사랑의 마지막 변화형인 사랑의 실패로 우리를 안내한다. 폴 제랄디의 연애시집 『당신과 나』를 냉소적으로 비튼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소설에서 마주하게 되는 사랑은 낭만적 환상을 걷어낸 사랑이며, 시작부터 그 끝을 품고 있는 사랑이다. 카미유 로랑스는 분명히 여기에 존재했던 사랑이 사라지는 것, 사랑의 실종을 확인하며, 그 이유와 과정까지 섬세하게 탐색해나간다.
폴리포니적 구성, 반어가 넘치는 거울놀이
결국은 모든 여자와 모든 남자의 사랑 이야기로
사랑 이야기에 대한 진정한 질문은 ‘왜 사랑이 끝나는가?’가 아니라
‘왜 사랑이 끝나지 않는가’라고요.
이 질문이 우리가 만들 탐정영화의 진짜 초석이 될 거예요. 정말 그래요.
소설의 주요 화자는 로랑스와 마찬가지로 여성 작가이며, 소설은 그녀의 작품 중 하나인 「내 죽음의 남자」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하는 젊은 프랑스 영화감독과 주고받은 메일을 토대로 전개된다(영화감독은 자신의 메일이 공개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독자들은 작가인 ‘나’의 메일만 읽을 수 있다). 여기에 작가의 소설 초고, 토막난 메모들, 영화 컷에 대한 이런저런 제안, 보내지 않은 메일이 더해지고, 두 사람의 공동작업이 단절된 기간까지 행간의 여백을 통해 드러난다.
작가는 영화감독의 제안에 회의적이다. 자신의 작품은 여자를 마주 보는 남자의 최초의 시선과 마지막 시선, 즉 만남과 결별을 병치시키고 있을 따름이며, 흔히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만남과 행복감, 환멸이나 권태, 배신, 결별 등으로 이어지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말과는 달리 사랑의 부재를 표현하는 데 이미지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도 공동작업을 망설이는 이유이다. 주저하는 그녀와는 달리 의지가 확고한 영화감독에게 작가는 뱅자맹 콩스탕의 책을 꼭 읽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우리”의 등장인물, 아마도 작가 자신일 것인 엘렌과 그녀의 연인이자 영화감독인 아르노, 엘렌의 정부情夫이자 정신분석가인 자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렇게 해서 사랑의 실종에 관해 탐문조사를 벌이는 탐정영화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여기서 작가가 언급하는 뱅자맹 콩스탕의 작품은 널리 알려진 『아돌프』로, 엘레노르라는 여자의 사랑을 열렬히 원하던 남자 아돌프가 일단 목적을 달성하자 그녀에게 더는 사랑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자전적 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뱅자맹과 연인인 스탈 부인, 뱅자맹의 작품 속 주인공 아돌프와 엘레노르의 이야기는 엘렌과 아르노의 이야기와 뒤얽히고 섞여들며, 결국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이렇듯, 정교한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구조는 카미유 로랑스 소설의 형식상의 중요한 특징이다. 마치 정면의 모습과 옆모습이 한 화면에서 구성되는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을 보는 것과도 같다. 로랑스는 동일한 장면을 소설 안에서 다양한 각도로 조명해서 제시하는 것은 물론, 저자인 자신이 그 안에 있다는 사실도 알리고 싶어한다. 소설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겪어나가며 그 체험의 맥락들을 기술하고자 거기 있음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로랑스의 소설 속에는 단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조망하는 또다른, 여러 개의 시선이 존재하게 된다.
이같은 이유에서 ‘거울’은 로랑스 소설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엘렌과 아르노의 첫 만남 역시 거울 속에서 이루어진다. 서로 직접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대방을 바라보는 서로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얘기하는 중이었는데, 문득 나만 그 공간에서 뚜렷이 부각되는 느낌, 플래시 세례를 받는 듯한 느낌이 온몸으로 느껴졌어요. 그래서 고개를 돌렸죠. 벽난로 위에 걸린 거울 속에서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우리는, 그와 나 단둘만 금빛 테두리의 거울 한가운데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움직이는 흐릿한 무리에 불과했어요. 우리가 만난 건 바로 그 거울 속에서였어요.”
또한 이 소설은 대단히 음악적이다. 작품에 쓰인 단어들, 장면들은 우연히 존재하는 것 없이 다른 단어, 다른 장면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하나는 반드시 다른 것, 그것은 또다른 것을 참조하게 만들”고 거기서 소설의 리듬이 생겨난다. 마치 하나의 주제가 대위법에 의해 서로 화답하며 연이어 변주되는 폴리포니의 푸가처럼. 아리아, 춤곡, 성가 등 다양한 음악 곡들이 적절하게 인용되고, 오페라의 악보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소설에 음악적 울림을 선사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가’ ‘이면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가’ ‘또다른 무엇이 감춰져 있는가’ 등의 질문을 끊임없이, 강박적으로 제기하며 언어의 심연을 한없이 파고드는 특유의 글쓰기 방식인 것이다.
핏 속에 흐르는 잉크로 글을 쓰는 작가, 카미유 로랑스
실종된 사랑을 추적하다
내 경우에는 이해를 통해 자유를 얻습니다.
이 책의 화자는, 물론 여러 면에서 나와 아주 흡사한데,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불안과 사랑의 고통, 창작의 불능에서 벗어나는 인물이지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될수록 화자의 고통은 누그러집니다.
―작가 인터뷰 중에서
카미유 로랑스는 초기의 몇몇 소설을 제외하고는 줄곧 자전적 허구(오토픽션)의 형식을 고수해왔다. 늘 ‘나’에서 출발해, 내가 어떻게 세상과 타인들을 바라보고,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느끼는가를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차갑게 고백한다. 『당신도 나도 아닌』 역시 실패로 끝난 자신의 사랑에 허구의 옷을 입힌 소설이다. 치열하게 사랑하고, 그 고통 속에서 피가 흐르는 생살을 헤집어가며 써내려간 작품이기에 완성하기까지 삼 년여의 집필 기간을 “지옥의 경험”에 비유하기도 했다.
유독 힘들게 완성된 이 소설은 무엇으로도 좁힐 수 없는 타자와의 근본적인 차이에 관심을 쏟으며 그 차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사랑에 대한 담론으로 승화시킨 점, 정교하고 복합적인 구조, 언어유희 등으로 나타나는 지적인 글쓰기, 감미로운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거울놀이, 정신분석에 대한 오마주, 강인한 동시에 더없이 섬세한 문체 등 로랑스의 모든 것이 녹아들어 있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미유 로랑스는 때로는 사랑이라는 생명체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생물학자, 실종된 사랑을 추적하기 위해 탐문수사를 벌이는 탐정, 사랑을 부검하는 검시관이 된다. “상처에서 비롯된 ‘자전적 허구’는 사랑의 환상을 뚫고 비수처럼 날아와 우리 가슴에 꽂힌다. 바르르 떨리는 칼의 진동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강한 힘이 배어난다. 허구이면서 또한 진실이므로. 사랑이 추락할 당시의 생생한 기록을 담은 블랙박스이므로.”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뒤라스 이래, 사랑이라는 감정의 은밀함과 역설, 양면성을 이토록 섬세하게 구현해낸 작품은 거의 없었다. _르 피가로 리테레르
섬세하고 영리한 로마네스크 형식. 진지함과 반어가 넘치는 거울놀이. 현기증이 인다. 하지만 이 현기증은 더없이 감미롭다. _텔레라마
영화나 추리소설처럼 당신을 덥석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_레쟁로퀴티블
대담하고 섬세한 구성. ‘사랑의 실종에 대한 탐구.’ _누벨 옵세르바퇴르
▶ 카미유 로랑스 Camille Laurens
1957년 디종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일기와 시를 쓰고 책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문학교수 자격을 획득한 뒤, 1984년 프랑스를 떠나 십이 년간 모로코에서 거주하며 교직생활을 했다. 1991년 첫 소설 『색인』을 발표했다. 그후 『연가』 『헤라클레스의 역사役事』 『미래』 『그 품안에』 『사랑, 소설 같은 이야기』 등의 소설을 썼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단과 독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품안에』로 페미나상과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2006년 발표한 『당신도 나도 아닌』은 폴 제랄디의 연애시집 『당신과 나』를 냉소적으로 비튼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랑에 대한 낭만주의적 환상을 걷어내고, ‘사랑’이라는 임무 수행에 나선 자들의 필연적인 실패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 스스로 “지옥을 경험했다”고 표현했을 만큼 힘들게 완성된 이 소설은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를 가진 동시에 대단히 음악적인 작품으로, 사랑 그 자체를 섬세하게 기술해낸다.
▶ 옮긴이 송의경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프랑스 엑상 프로방스 대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화여대와 덕성여대에 출강했다. 『사랑, 소설 같은 이야기』 『슬픈 아이의 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로마의 테라스』 『은밀한 생』 『떠도는 그림자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섹스와 공포』『달을 따는 이야기』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발행일 | 2010년 9월 20일
▣ 쪽수 | 464p.
▣ 판형 | 128×188 (양장)
▣ 값 | 13,800원
▣ ISBN | 978-89-546-1275-3 03860
▣ 담당 | 황문정 (031_955_2659/mimosa@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