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와 후배 작가, 삶과 예술을 묻고 답하다
20인의 예술가들의 육성으로 듣는 진솔한 대화
열 쌍의 예술가들이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이들은 각각 원로.중견 작가와 비교적 젊은 세대에 속하는 작가들로 구성돼 있다. 중견 작가이든, 젊은 작가이든 이들은 한국 미술계를 이끄는 이른바 ‘성공한’ 작가들이다. 그럼에도 작품세계가 제각각이듯 작가들이 겪어온 경험은 저마다 다르고 미술계의 상황은 10년 전과 비교해 봐도 크게 달라졌다. 작가들은 대개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작업에만 몰두하기 쉽다. 여기 모인 작가 중에는 대중과의 소통을 중시하고 그것이 작업의 골간을 이루는 작가도 포함돼 있지만, 결국 창작의 순간에는 무엇보다 자신과의 대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예술가들이 서로의 작업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펼쳐졌다. 서로 다른 세대의 경험, 다양한 장르, 작업 방식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풍성한 식탁이 차려진 셈이다.
예술가들 자신의 목소리로 듣는 이야기는 진솔하다. 그리고 어렵지 않다. 평론가들의 지식이라는 필터를 거쳐 나온 것이 아니기에 예술가들의 생각과 작품을 마주 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무엇보다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작업관, 인생관이 서로와의 대화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 이것이 『예술가들의 대화』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작가를 직접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감탄할 때가 있다. 간단하고 쉬운 표현으로 자신의 작품세계와 삶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에 대한 감동이다. 평론이나 작품을 통해서만 작가의 세계를 접했던 것과는 또 다른 방향에서 그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 우리가 펼쳐놓은 장에서 작가들은 기대보다 훨씬 다양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미술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어느덧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자세, 인생관으로까지 확장돼 나갔다. 이 대담을 통해 우리는 스무 가지 예술의 의미, 스무 가지 삶의 의미를 만날 수 있었다. _「책을 펴내며」에서
이 대화는 원래 2008년 가나아트센터 25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원로/중견 작가와 신진 작가 12팀이 참여한 전시 〈통섭〉전이 씨앗이 되었다. 이 전시 기획전을 더욱 의미 있게 하고자 큐레이터(김지연)가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뜻 깊은 대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 책은 애초의 대담을 바탕으로 새로운 팀을 구성하고 추가로 만남의 자리를 갖는 등, 보완 작업을 거쳐 더욱 다채롭고 탄탄해졌다. 여기 수록된 대화들은 후배가 선배에게 묻고 선배는 같은 길을 가는 동료로서, 또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 미덕을 보여준다. 이들 대화는 또 독자에게 그들의 내밀한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책은 세 장으로 나뉘어 있다. 1장 ‘예술가 장르를 말하다’에서는 총 네 팀이 조각, 한국화, 서양화, 그리고 사진과 영상을 화두 삼이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2장 ‘예술가, 메시지를 전달하다’에서는 대중 속으로 뛰어들거나 사회 문제를 주제로 활동하는 작가들 세 팀의 대담을 엮었다. 3장 ‘예술가, 미술의 의미를 묻다’에서는 다양한 미술세계와 함께 그 의미를 찾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최종태+이동재
최: 예술가(藝術家)의 가(家)보다 위에 있는 게 사람 인(人)인 것 같아.
이: 예술의 궁극적 목표는 참된 진리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밝아지고 소탈한 나무 조각 작업을 선보이는 거장 조각가 최종태와 ‘쌀 작가’라는 별칭을 가진 젊은 작가 이동재가 만났다. 전통적인 조각 작업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마치 수행자 같은 태도로 꾸준히 작업을 이어온 최종태의 작업을 두고 이동재는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본다. 이동재의 작업 역시 작은 쌀알을 촘촘히 화면에 박아 이미지를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비워나가는” 수행과도 같은 면이 있어 공통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박대성+유근택
박: 시대가 변해도 변치 않는 전통의 힘이 있습니다.
유: 동양화의 기본 법칙으로 현대의 모습을 담아내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박대성과 유근택은 ‘한국화’라는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눈다. 박대성이 세월을 두고 몸에 익힌 서예라는 기초에 작업의 근간을 두고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유근택은 동양화의 기본 법칙으로 현대의 모습을 어떻게 담아낼지에 대해 고민한다. 두 사람의 의견은 대립한다기보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결국 동양화이든 서양화이든 각각의 장점을 얼마나 잘 드러낼 수 있는가에서 해답을 찾는다.
고영훈+홍지연
고: 모든 예술은 답 없는 수수께끼를 맞히려고 노력하는 행위야.
홍: 작업이 삶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작업 자체에 대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요.대학 선후배 사이인 두 화가가 화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자신들의 작품세계에 대해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눈다. 극사실화로 유명한 고영훈은 ‘돌멩이 작가’로 애초에 유명세를 얻었지만 그것을 버리고 변화를 택하면서 “그림 자체가 어떤 목표가 돼선 안 되고 삶의 한 모양새”라는 깨달음을 얻었음을 이야기한다. 홍지연 작가 또한 작업은 결국 “삶의 일부”이며 작품 활동 또한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답한다.
배병우+뮌
배: 자신의 것을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 자기 시대가 오게 돼 있어.
뮌: 만들어낸 전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스트레이트 포토 작업을 하는 ‘소나무 작가’ 배병우와 영상 설치 작업을 하는 예술가 그룹 ‘뮌’이 대화를 나눴다. 배병우는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할 무렵 사진이 예술로서 대중과 기성세대의 이해를 얻지 못했는데 현재는 뮌의 활동 영역인 비디오아트가 그런 것 같다며 이야기의 운을 뗀다. 이야기는 한국 작가가 세계 미술계에서 어떤 자세로 활동해야 하는가, 자신을 시장에 알리는 방법으로까지 확장된다.
이종구+노순택
이: 민중미술 흐름에 동참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제 작업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노: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민감한 주제를 다룰수록 더 좋은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의 작가 노순택과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에 참여했던 작가 이종구가 만났다. 두 작가는 미군기지 확장으로 인해 터전에서 내몰리게 된 대추리 주민들을 돕기 위해 모인 예술가들의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한 바 있다. 이들은 소위 ‘참여미술’에서 작품의 질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예술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 그런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것에 대한 갈등 등을 놓고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다.
안규철+양아치
안: 매순간마다 절실한 문제를 절실한 방식으로 고민하다 보니 다양한 작업을 하게 됐지요.
양: 정치.사회 개혁은 삶의 기본 문제라는 생각이 어떤 식으로든 작업에 반영되었습니다.
안규철과 양아치의 작업에서 사회 현실을 빼놓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발언 방식은 직접적이기보다는 은유적이고 풍자적이다. 두 사람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작업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는데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작품세계를 형성하게 된 배경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임옥상+김윤환
임: 시민들의 예술적 마인드가 성장하면 정말 재미난 사회가 될 거예요.
김: 창작이 공간을 중심으로 어떻게 소통되는가, 그게 제 화두죠.
대중과 함께하는 예술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펼치고 있는 임옥상과 빈 공감을 점거해 예술 공간으로 활용하는 스쾃 운동을 펼치다 서울문화재단 창작 공간 추진단장으로 제도권 내에서 공공미술 활동을 시작한 김윤환이 만나 이야기한다. 시민이 창작의 주체가 되는 공공미술을 실현하기 위해 제도권 안팎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노력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
윤석남+이수경
윤: 난 어쩔 수 없이 내 얘기를 작품으로 토해냈어. 이젠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과제야.
이: 작품을 손에 붙잡고 있는 순간에만 저 자신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대모로 불리는 윤석남과 도자기 파편을 이어 붙여 유기적인 새 형태를 만들어내는 작업으로 성가를 올리고 있는 이수경이 만났다. 여성미술가 혹은 치유의 미술이라는 수식어로 한정되는 데 거부감을 드러낸 두 작가는 무엇보다 몸으로 직접 부딪쳐 하는 미술이 갖는 힘에 대해 강한 공감을 표하며 유대를 다진다. 서로 알아온 지 오래됐지만 작업에 대해서는 처음 진지한 대화를 갖는다는 두 작가의 솔직담백한 대화가 흥미롭다.
사석원+원성원
사: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그 많은 고뇌를 어떻게 치유하는가’, 요즘 제 작업 주제입니다.
원: 직관을 믿는 것, 상상하는 것, 지식을 종합하는 것, 그게 바로 작가의 일이지요.
꿈에서나 볼 법한 판타지를 화면에 구현해낸다는 점에서 사석원과 원성원의 작업에 공통점이 엿보인다. 사석원은 동양화에서 시작해 유화까지 영역을 확장했고, 원성원은 조각을 공부하다가 사진을 콜라주하는 작업으로 전환했다는 면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작업 주제, 스타일, 작업 환경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두 사람의 유쾌한 대화가 펼쳐진다.
홍승혜+이은우
홍: 예술 때문에는 절대로 불행해서는 안 돼요. 예술은 하나의 위안이어야 해요.
이: 미술은 미스터리한 것이고, 그것이 그 끈을 놓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아요.
기하학과 그리드. 홍승혜와 이은우의 작품을 보며 떠오르는 단어이다. 차가워 보이는 외양만큼이나 이성적인 작업세계를 펼치는 두 사람이지만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그만큼의 열정과 치열함이다. 특히 ‘정치적인 미술’과 ‘미술의 정치’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공감과 어긋남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