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호로 나라의 자존심을 지켜낸 유구한 역사
태조, 세종, 정조……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왕의 이름, 묘호.
묘호를 이해하는 일은 곧, 천 년을 넘게 이어온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일이다. 삼국시대에서 시작해, 마침내 조선의 ‘예’를 상징하게 된 묘호는, 조상의 지혜가 온축되어 있는 거대담론의 결정체다. 이름을 올려 나라의 정통을 세우는 종법과, 공이 있는 이는 조祖로 하고 덕이 있는 이는 종宗으로 한다는 조공종덕은 예치국가를 지향하는 출발점이자 국가 운영의 원리였다.
종법의 근간을 이루는 시자에는 고대로부터 인간들이 사회와 국가를 조직하고 운영하면서 쌓아온 무수한 경험들이 온축되어 있다. 세世, 중中, 인仁 등 시자 한 글자가 갖는 역사의 함의는 대단히 크다. 한 글자로 국왕의 평생의 업적을 재단하여 평가했기 때문이다. 또 주목해야 할 점은 왕권의 정통성 문제이다. 성종과 인조는 종법에 어긋난다고 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왕이 아닌 생부를 왕으로 추숭했다. 그들이 덕종과 원종이다. 이를 통해 그들은 종법상의 흠결을 치유하고자 하였다. 묘호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국왕들은 남겨질 이름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정통의 묘호를 갖는 일에 군신의 노력은 신중했다. 묘호는 당시의 유교윤리와 국가이념 통치철학 역사 등 인간의 사고를 통섭하는 가치판단으로 빚어낸 창조물이다.
공정왕, 묘호를 받기까지 3백 년을 기다리다
묘호란, 왕의 자리에 올랐다 해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정왕恭靖王은 ‘정종定宗’이란 묘호를 얻기까지 3백 년을 기다려야 했다.(5장 ‘3백년, 공정왕이 묘호를 받기까지’ 참고) 그의 묘호 추상을 둘러싸고 왕권의 정통성 문제와 정치적인 입장 차이가 선명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왕위를 계승했음에도 사후에 묘호를 상정하지 않아 왕이라는 이름으로 사당에 모셔진 왕은 정종이 유일하다. 정종이라는 묘호가 추상된 것은 숙종 7년1681의 일로, 그전까지는 시호인 공정왕이라 칭했다. 아들이 없었던 공정왕은, 후사로 이방원을 입계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왕권의 정통성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정종이 공정왕이라는 시호를 쓰게 된 데는 그를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계략이 숨어 있었다. 결국 이방원은 집권 후, 종통을 가로챘고, 정종은 정통 군주로 인정받지 못한 셈이다. 겨우 3백 년 후에야 그에게 정종이란 묘호가 내려졌다는 사실은 묘호를 둘러싼 정치세력의 권력다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과연 이런 현상을 조정의 ‘암투’로만 볼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방원을 비롯한 수많은 후대 왕이 그토록 묘호를 올리는 일에 민감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현실의 권력자가 죽어서까지 남길 이름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다. 왕은, 기억될 미래로서의 과거를, 그리고 역사의 평가에 서린 매서움을 두려워할 줄 알았던 것이다.
위정자들이여, 이름을 두려워하라
그러므로 이름 남기기를, 이름 드날리기를, 이름 높기를 바라기 전에 알아야 할 일이다. 이름은 두려운 것임을. 역대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과연 오늘날, 어떤 이름으로 남아 있는가. 후대인이 기억하는 그들의 이름이 곧 역사다. 비록 오늘날, 역사의 뒤안길을 스쳐간 그들에게 하늘의 뜻을 대신해 이름을 내리는 의식은 없지만, 시민은 그들의 행적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이름을 붙일 것이다. 이는 비단 위정자들에게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우리들 또한 분명, 기억될 어떤 이름을 남기고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묘호는 살아 있다. 비록 실제적인 묘호 제도는 대한제국의 순종에게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시행되지 않았으나, 그 정신만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