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아닌 저곳,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바라는 아이들
1970년대, 폭력적이던 정치현실 속, 부패 공무원인 아버지와 계모임으로 바쁜 어머니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경실이의 유일한 낙은 찐빵을 먹는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게에 앉아 찐빵을 한 입씩 베어 물다보면, 집에서는 느낄 수 없던 안락함과 달콤함마저 맛보곤 한다. 그러나 그 대가로 ‘전교에서 가장 뚱뚱’해진다. 경실이는 그런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못내 싫지만, 찐빵 먹는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대신 경실이는 일기를 쓴다. 그리고 스스로를 ‘미미’라 부르며 또다른 자신을 상상한다. 그런 경실이 앞에, 어느 날 이복언니라며 ‘정우’가 나타난다. 정우는 지구의를 빙그르르 돌려보길 좋아하는 소녀로, 경실이에게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에 대해 들려준다. 둘은 매일 밤, 아틀란티스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이곳이 아닌 저곳을 바라고,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꿈꾼다.
마음속 아틀란티스, 그곳에서만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아틀란티스’란 무엇일까. 한때 존재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대륙,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전설로만 내려오는 땅,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갈 수 없는 곳…… 아틀란티스는 사람들이 소망하는 ‘낙원’이다. 고단한 현실을 치고 나갈 길이 보이지 않고 그 방향조차 막막할 때, 사람들은 자기만의 낙원을 그리며 어려움을 에둘러 헤쳐간다. 따라서 누군가의 아틀란티스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역으로 그 사람이 겪고 있는 절망을 알 수 있다. 정우는 재혼한 어머니 때문에, 경실이는 외모 때문에, 독서클럽 친구인 용식이는 운동을 하다가 잡혀간 형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다. 이들의 고통은 그들이 바라는 아틀란티스의 모습에 그대로 나타난다. 하지만 아틀란티스는 결국 꿈일 뿐이며, 현실은 보다 가혹하다. 경실이의 거짓말은 들통 나고, 용식이의 형은 돌아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아틀란티스 이야기를 했다는 것만으로, 경실이를 비롯한 친구들은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는 어처구니없는 일마저 겪는다. 잠시나마 꿈꾸던 낙원이 사라지고 차가운 현실과 마주했을 때, 경실이는 비로소 일기장에 자신이 ‘미미’가 아니라 거짓말을 잘했던 아이, ‘경실’이라는 것을 아프게 털어놓는다.
그 시절, 외로워서 찐빵을 먹으며 뚱뚱해진 개발시대의 우울한 초상 같은 경실이는 몰래 꿈을 꾸다가 그 꿈마저 오해받습니다. 그리고 경실이 앞에 놓인 시대는 점점 어려운 정치현실로 치닫고 있었구요. 아마도 그 당시 중학생이었던 경실이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가서 가두에서 데모를 하느라 청년시절을 다 잃어버렸을 수도 있고 현실에 맞추어 얌전한 여성이 되어 결혼을 했을 수도 있을 거구요. 지금의 경실이가 어떻게 살고 있든 그때의 경실이가 이룬 가장 큰 승리는 아마도 일기장 속의 아틀란티스가 아니었을까요? (작가의 말에서)
지구의를 돌리며 세계 곳곳에 압침을 꽂아 자기만의 낙원을 표시하던 소녀는,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이 가닿을 수 있는 곳의 한계를 깨닫고 압침의 개수를 줄여가게 될 것이다. 성장한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어쩔 수 없이 꿈의 지평을 좁혀가는 일일 테다. 그렇다면, 결국 아틀란티스를 바라는 것은 헛된 망상에 그치는 것일까. 작가는 그럴수록 자기만의 낙원을 꿈꾸는 것이 소중하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이루어질 것만 바라고, 실현 가능한 것만 꿈꾸는 건 비겁한 일일지도 모른다. 힘들고 괴로운 현실 속에서도 꿈을 꾸는 이들의 소중함은, 소설 곳곳에서 두드러지는 작가의 시적인 문장과 결합하여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작가의 말 중에서
요즘 시대에 맞는 발랄하고 생기 찬 오늘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30년 전의 이야기를 하는 저의 마음 역시 착잡합니다. 더구나 이야기는 뚱뚱하고 외로운 한 소녀의 참담한 실패담입니다. 70년대의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작은 도시, 어느 골목에서 일어난 이야기. 전쟁이 끝난 지 이십여 년. 분단과 독재, 가난과 경제 개발이 우리가 살았던 그 당시의 얼굴을 사로잡고 있던 때입니다. 그 시대, 어른들이 만든 불가해한 폭력의 세계에 갇힌 아이들이 꿈꿀 권리를 잃어버린 채 울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
그 시절의 이야기는 이렇게 가슴에 가득 차 있는데 어째서인지 좋다, 즐겁다라는 느낌보다는 힘들다, 부끄럽다는 느낌이 들 때가 더 많거든요. 그리고 낙원을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는, 낙원을 믿는 그 순진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참 힘들었습니다. (……)
아직도 혼자 외로워서 공책이나 컴퓨터에 자신만의 낙원 이야기를 지어보는 많은 분들에게 이 이야기가 조금은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잃어버릴 줄 알면서도 낙원을 꿈꾸는 분들에게는 더욱더요. 잃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낙원 그냥 그저 그런 디즈니랜드가 아닐까요?
추천의 말
우리가 아틀란티스에 가 닿게 된다면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하나가 될 것이며, 그러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아프게 아프게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그곳이다. 이제는 아틀란티스를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매일매일 거울 저 너머로 다른 세계를 갈망했던 나에게, 그 세계에서 따뜻했으면, 오래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우리에게 이 소설은 아틀란티스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내가 갈망하였고, 갈망하자마자 부서져버렸던 세계가 통째로 들어 있어 놀랍고도 반가웠으며 또 한편 섬뜩했다. 『아틀란티스야, 잘 가』는 그때의 시절들을 어슬렁거리며 아파했던 나에게, 당신에게 ‘반창고’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밤을 밝히며 지었던 이야기를 조금 더 품고 있으려니 슬며시 냄새가 풍긴다. 참 진하다. 이 강렬한 허기의 냄새! 이 강렬한 허수경, 당신의 냄새!
_이병률(시인)
저개발의 기억은 그다지 오래지 않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성장은 우리 모두의 열망이었다. 스스로 반성하지 않을 때에만 열망은 가능하리라. 그 결과,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소망은 이뤄지고 약속은 지켜졌다. 경제가 성장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삶을 살게 됐다. 우린 누구일까? 이건 늘 가능한 질문이다. 하지만 우린 누구였을까? 그걸 물어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스스로 원했든, 아니면 타의에 휩쓸렸든 우린 성장을 열망했으므로. 『아틀란티스야, 잘 가』는 성장 이전의 흐릿한 기억에 대해 말한다. 단순히 우리가 애써 물어보지 않는 질문, 우린 누구였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 과연 우리의 성장은 옳은 것이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_김연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