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작가의 딸이 그려내는 아버지의 이야기
메디치 상을 수상한 마리 니미에의 소설 『슬픈 아이의 딸』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아홉 번째 소설로, 작가가 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사망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로제 니미에라는 이름의 프랑스 작가로, 그는 스물여섯 살에 『푸른 경기병』을 발표하며 프랑스 문단의 샛별로 떠오른다. 그후 1950년대 프랑스 문학을 주도하던 ‘경기병파’의 수장 역할을 하며 당대 가장 뛰어난 작가의 반열에 오르지만, 스물아홉의 나이에 절필을 선언하고, 서른여섯의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작가이다. 유명 작가 아버지와 역시 작가인 딸, 이렇게만 놓고 본다면 작품은 딸이 그려내는 아버지의 전기쯤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요절한 천재 작가 로제 니미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프랑스 문학에서는 신화적 존재였으나 가족들에게는 상처와 고통만을 안겨주었던 로제 니미에, 영웅적 면모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로서의 로제 니미에에 대한 이야기이자, 아버지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떠나는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소설은 일반적인 소설처럼 서사적 구조를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시작하여 아버지 묘지에 처음 갔던 일, 아버지에 대한 여러 사람들 ― 아버지의 친구들, 오빠들 ― 의 증언, 작가에게 남아 있는 아버지의 기억, 작가의 일상과 글을 쓰는 동안 겪는 신변의 여러 이야기들이 나열되어 있다. 어찌 보면 마치 쓰이는 대로 써 내려간, 작가의 정신적 고뇌가 그대로 드러나는 글 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실제로 이 작품은 집필에만 4년이 걸렸고, 작가는 그 과정에서 썼던 내용을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작품의 종반으로 갈수록, 맥락이 없는 듯 보이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마치 퍼즐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죽은 아버지의 복원’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향해 통일성을 띠며 나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많은 프랑스 언론과 평론가들이 이 작품을 마리 니미에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영웅의 이면, 아버지 로제 니미에의 흔적
작가가 아닌 아버지로서의 로제 니미에는 어떤 사람이었나? 작가는 자신 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아버지의 기억, 현실인지 환상인지도 분명히 알 수 없는 기억들 속을 헤매어 다닌다. 갓난아기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갖다 대는 아버지, 면도날로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던 아버지, 술을 마신 채 집에 들어와 어린 딸에게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 어린 딸이 정성껏 마련하여 가져다 준 계란프라이(장난감)에 담뱃불을 비벼 끄는 아버지, 가족과 함께 사진 찍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아버지.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린 아버지. 자신의 작품 『슬픈 아이들』(1951)의 주인공들처럼, ‘슬픈 아이’로 남게 된 아버지.
이러한 아버지의 기억은 작가에게, ‘슬픈 아이’의 딸에게 ‘두려움’의 감정을 안겨주었다. 그 감정은 여러 모습으로 표출된다. 그녀는 면도날(아버지의 자살 시도 때 사용된 도구)에 대한 병적인 거부감이 있고, 운전면허시험에서 연거푸 탈락하고(아버지의 교통사고), 이목구비가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하는 악몽을 꾼다.
다른 가족들은 어떠한가?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었음을 애써 설명하려 한다. 의붓오빠 위그는 아버지의 사망 당시, 죽은 사람이 친아버지인지 의붓아버지(로제 니미에)인지 알 수 없어 수많은 밤을 고민했다. 친오빠 마르탱은 마취 및 소생술 전문의로, 응급실에 들어오는 환자들을 돌보며 아버지의 귀환을 희망한다. 아버지의 부재는 가족 모두에게 상처이자 고통으로 남게 되었다.
“침묵의 여왕은 어떻게 말을 하지?”
침묵하면서 말할 수 있는 방법, 글쓰기
작가는 왜 아버지가 사망한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마리 니미에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붙여준 별명은 ‘침묵의 여왕’이었다. 그는 그림엽서에 ‘침묵의 여왕은 어떻게 말을 하지?’라는 문제의 수수께끼를 딸에게 써 보냈다. 아버지의 애정에 굶주렸던 어린 딸은 이 모순적인 질문을 끌어안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당시에 수수께끼는 이렇게 인식되었다. 침묵의 여왕이 자신의 칭호와 아빠의 애정을 잃지 않으면서 과연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 혹은 이렇게 표명될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말을 하면서 동시에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진퇴양난이었다. 아버지의 지성의 덫에 걸린 채로. (본문 193쪽)
그녀는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그저 침묵한 채 살아간다. 작가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그녀는 갑자기 자살을 시도한다.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 모든 게 순조로워서, 가장 좋은 시기에 떠나려는 듯이 무작정 센 강에 몸을 던진다. 그러나 자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그녀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자살의 이유를 물어보는 사람들을 보며, 그녀는 ‘말하기’가 아닌 ‘글쓰기’를 선택한다.
그때 글쓰기가 떠올랐다. 그것은 내가 이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도록, 그리고 아버지의 이중 명령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대답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소설가란 침묵을 지키면서 이야기를 하는 자, 입을 다물고 말하는 자가 아니던가? (본문 196쪽)
그때부터 작가는 글을 쓰기 시작하지만, 이 작품 이전의 여덟 편의 소설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아버지와의 맞대면을 피해오던 그녀가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물건이 경매에 넘어가기 전, 아버지의 유품 중에서 작가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게 되면서부터이다. 아버지는 편지에서 딸의 출생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결국, 어제 아내가 딸을 낳았네. 나는 즉시 그애를 센 강에 처넣어버렸어. 더이상 그애 이야기를 듣고 싶지가 않거든. (본문 161쪽)
자신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내린 명령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25년이 지난 그때 실행에 옮기려 했던 것이었을까. 그제서야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은 아버지의 망령이 스물다섯 살의 그녀를 센 강에 투신하게 했고, 막연한 두려움과 고통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작가는 더이상 ‘아버지와의 대면’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이 책에 매달린 것은 일생일대의 야심작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책을 쓰지 않으면(아버지와의 문제를 풀지 않으면) 더이상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72쪽) 지경에 이르렀으며, (…) 이 책의 집필 동기는 무엇보다도 생존을 위해서였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마음 속 깊이 담아두었던 아버지의 기억을 꺼내어 마주하는 일은 작가에게는 큰 고통이 따르는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릴 때뿐만 아니라 그녀의 일상생활에서도 불쑥불쑥 찾아드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진실과 대면하기 위하여 이 글을 썼다.
마침내 완성하는 아버지의 초상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때 작가는 어린 아이였기에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게다가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유명 작가인 덕분에 작가는 이곳저곳에서 로제 니미에의 사진을 접할 수 있지만, 그 사진의 주인공은 ‘아버지 로제 니미에’가 아니다. 꿈속에서조차 아버지의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없다.
그러나 생살을 저미는 고통을 감내하며 글로써 아버지를 그리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마침내 아버지의 초상을 완성한다. 아버지와의 화해에 이른 것이다.
아버지가 몸을 돌리자, 아버지가 제 자식을 알아보듯, 나도 그렇게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의 걸음걸이뿐만 아니라, 애정이 우러나는 얼굴, 윤곽, 표정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 나는 그 모두를 눈앞에 그려보고 상상할 수 있었다. (본문 227쪽)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자 오랜만에 처음으로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침내 세상에 휴식시간이 찾아온 듯이.” (본문 227쪽)
♦ 해외 리뷰
자식은 낳았으되 아비 노릇은 거부했던 아버지, 영원히 청년으로 남은 괴상한 아버지와 화해하는 과정. 이 책은 폭풍 후 깊이를 알 수 없이 고요해진 바다처럼, 격렬한 고통 후에 얻은 예술성으로 가득하다. -『르 몽드 데 리브르』
침묵의 언어와 이미지와 그 울림으로 이루어진 뛰어난 퍼즐. -『엘르』
노래하며 동시에 침묵해야 하는 사이렌의 운명은 작가가 받은 형벌이며, 아버지가 운명지어준 어른 아이 혹은 애어른의 자세이다. 이 모순되는 두 가지 자세 속에, 마리 니미에는 고통을 조심스럽게 새겨 넣는다. -『캥젠 리테레르』
그녀에게, 글을 쓰는 것은 ‘침묵하면서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일이 아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맹세하는 일뿐이다. ‘침묵의 여왕’은 아름다운 방식으로 계속 침묵하겠다고. -『마가진 리테레르』
♦ 지은이와 옮긴이
마리 니미에 Marie Nimier
1957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 8대학과 4대학에서 연극과 문학을 공부했다. 가수로 활동했고 프랑스와 미국 등지에서 연극배우로도 활동했으나, 결국 숙명처럼 글쓰기의 길을 택하고 작가가 된다.
1985년에 첫 소설 『세이렌』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 『기린』 『도미노』 『새로운 포르노그래피』 등 아홉 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동화작가, 극작가, 작사가 등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소설 『슬픈 아이의 딸』로 메디치 상을 수상했다.
옮긴이 송의경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프랑스 엑상 프로방스 대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화여대와 덕성여대에서 강의를 역임했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밀한 생』『로마의 테라스』『떠도는 그림자들』『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섹스와 공포』『달을 따는 이야기』『사랑, 소설 같은 이야기』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2008년 1월 14일 발행
▣ ISBN 978-89-546-0444-4 03860
▣ 128 * 188(양장) | 240쪽 | 10,500원
▣ 책임편집 이은현 (031-955-2653, singing36@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