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짜리 국적, 반쪽짜리 가족,
조선족들의 자녀들을 만나다
『길에서 만난 세상』,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 등의 책을 통해 약자들의 삶을 기록하고 소외된 곳을 조명하며 ‘우리 사회가 기억해야 할 것들’ 에 대한 뜨거운 화두를 던져 온 박영희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이번에 그는 부모님이 한국으로 취업을 나가 친척과 몇몇 교원들의 노력으로 아슬아슬한 성장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만주의 아이들’의 목소리를 담아 왔다. 그동안 조선족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있었지만, 우리 주변의 조선족 그리고 중국에 남은 그 자녀들의 삶은 가려진 채 있었다.
한중수교 이후 ‘한국 취업 바람’은 조선족의 대이동을 불러일으켰다. 얼마 가지 않아 만주 조선족 자치주가 곧 해체될 거라는 풍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200만 조선족 중 40만이 한국에 나와 있으니 누군들 해체설을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만주에 남겨진 아이들이 겪는 고통이었다. 10년이 넘도록 부모님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다면 과연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는 이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없다는 생각, 아이들을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_작가의 말에서
박영희 작가는 굵직한 감동과 여운을 선사해온 르포 문학 작가이자 청소년들을 가까이에서 접해온 강연자이다. 그는 이제 『만주의 아이들』을 시작으로 가장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조선족에 대한 이야기들을 세상에 풀어내려 한다. 박영희 작가는 매년 1회 이상 1-2개월씩 머물 만큼 만주 지역과 조선족의 삶에 애정이 많고 현지 사정에 밝다. 이번에는 오직 ‘만주의 아이들’을 취재할 목적으로 중국 동북지역 (길림성‧흑룡강성‧요녕성)으로 떠나 한 달 여정으로 열 개 조선족 자치주를 누볐다. 정통 르포 문학의 깊은 맛을 담은 원고에 직접 촬영해 온 현장감 넘치는 사진들도 함께 엮었다.
또한 『만주의 아이들』에는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아이들의 이야기 외에도,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만주에 불어 닥친 한국바람이 조선족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도 자연스레 드러난다. 정신적·물질적 개념과 생활의 변화, 해체되는 가족, 외곽에서 보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 등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들이 조선족들의 생생한 언어 속에서 구현된다.
할아버지의 나라, 기회의 땅 한국
1978년 마오쩌둥이 ‘개혁‧개방 정책’을 내세우며 중국 인민들에게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선포한 뒤, 소수민족인 조선족들은 먹고살 궁리에 빠지게 된다. 그러던 중 1992년 한중수교가 맺어지고, 조선족 동포를 위한 취업방문제가 실시되면서 ‘한국 바람 간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뼈 빠지게 농사지어 연간 1만 위안을 벌래, 아니면 한국에 가서 월 4000위안을 벌래?’라는 브로커의 달콤한 유혹에 끌려, 자녀 교육만큼은 제대로 시키겠다는 생각에, 수많은 조선족 부모들은 기회의 땅을 찾아 할아버지의 나라로 건너온다. 불과 100년 전 살 길을 찾아 동(한국)에서 서(중국)로 압록강을 건넜는데, 이제 그 자손들 역시 살 길을 찾아 서에서 동으로 넘어오기 위해 밀입국이나 위장결혼도 서슴지 않는다. 출입국관리소에 집계되지 않는 행방불명된 조선족만 해도 수백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 바람이 분 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아진 조선족들의 삶은 실제로 영화 <황해>, <푸른 강은 흘러라>등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겉은 십대이지만, 안에는 삼십대가 들어앉아 있는 아이들
하지만 한국 바람이 불러온 변화 중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만주에 남은 아이들이다. 심양시 조선족의 경우 전체 가정 중 결손가정이 총 가구의 65%에 이를 정도로 현재 조선족 내에는 이혼 가정이나 모부자 가정, 조부모 가정이 많다. 부모와 친척, 그리고 몇 명의 교원들의 막중한 노력으로 아이들의 생활이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화약고 같은 상황이다.
“친부모에 이어 주변 친척들마저 떠나고 나면 아이들은 숙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놀라운 사실은 학생들 스스로가 숙사를 막장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더는 갈 곳 없는 막장 말입니다.”
이런 가정의 아이들은 매를 맞아도, 큰일을 겪어도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입을 열기 전 몇 차례 한숨을 내쉬고, 그다음 말과 눈물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는 가슴병’을 겪고 난 뒤에, 아이들은 자신의 상황과 마음을 섬뜩할 만큼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말한다. 너무 일찍 가장이 되고, 너무 일찍 사람과 세상에 크게 실망한다.
“저희들은 운복이 없는 세대 같슴다. 숙사 생활이 죽을 만큼 싫은데도 어찌해 볼 방법이 없단 말임다. 부모님들은 비자를 연장한다며 귀국했다가 앞으로 2년만 더, 3년만 더 참으라며 한국으로 떠남다. 그거이 벌써 몇 해째인 줄 아십네까? 적어도 개인당 10년은 됩네다.”
“엄마는 있지만 이제 우리 엄마는 없슴다.”
조선족들은 자녀의 미래를 위해 일선에서 갖은 고생을 견뎌내지만, 한편으로는 고향의 가족은 뒤로하고 새로 가정을 꾸리거나 하루아침에 연락을 뚝 끊는 사례도 적지 않다. 농사짓던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접하며 조금씩 변해가는 것, 만주 사람들은 그것을 ‘한국병이 들었다.’라고 한다. 자녀를 위해 떠난 부모라 하더라도 정작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다 보니 부모는 정작 자녀와의 소통의 단절을 겪고 있다. 아이들은 돈만 보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성적에 관한 질문 밖에는 하지 않는 부모. 내가 아플 때, 내가 죽고 싶어 할 때 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엄마와 아빠를 그리워하면서도 원망한다. 그리고 원망의 끝에는 부모님을 변하게 만든 한국이라는 나라, 그리고 한국인들이 있다.
“엄마는 있지만 진짜 엄마는 없슴다. 엄마도 아빠도 저를 팽개쳤단 말임다. 것도 제가 아직 어렸을 때.”
“돈은 가족의 행복을 훔쳐가는 도적인 것 같다. 모두 잘살아보고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외국으로 간다지만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많은 것 같다. 가족을 갈라놓고 그것도 모자라 일에 지쳐 건강을 잃게 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한국에서는 정말 돈 떨어지면 거지됨까?”
『만주의 아이들』은 중국과 한국, 두 사회가 교차되며 빚어내는 풍경에도 주목한다. 아이들은 방학을 맞이하여 한국에 방문했다가, 전혀 다른 두 사회와 두 사회 속의 다른 처지에 놓인 부모님을 보며 혼란을 겪는다. 우아하고 멋진 공항과는 정반대로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은 비좁은 셋방이나, 자정까지 사장의 눈치를 보며 일을 하는 노동 문화, 일이 없는 날에는 등 돌리고 앉아 술을 마시는 부모님의 모습은 ‘다른 세상’안에 있으면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한다. 또한 만주의 아이들의 눈에 비친 한국 사회와 자본주의 제도의 어두운 단면들은 읽는 이의 가슴을 뜨끔하게 한다.
“서울은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곳은 좋은 곳 저곳은 나쁜 곳, 그 둘의 차이가 너무 뚜렷했단 말예요.”
“이곳 사람들이 한국에서 돈 벌어와 왜 아파트부터 사는 줄 아세요? 아파트를 사 둬야 가격이 오르고 엄청 큰돈을 벌 수 있대요. 조선족 아줌마들은 이걸 한국에서 배웠대요.”
잊혀지면 안 될 곳, 만주 그리고 조선족
만주는 일제 통치, 분단 등 한국 근현대사의 한복판에 있던 땅이다. 또한 항일투쟁자손들의 우대문제, 조선족들이 한국에 품은 반감의 불씨, 노동 시장 문제, 국경의 브로커와 위장 결혼 등 여전히 현실의 첨예한 문제들이 얽혀 있어 조선족 문제는 우리가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사안이다.
아이들은 야생화처럼 자라고 있으며, 한국의 언어와 전통을 전수할 어른들은 부재 상태다. 한국 바람과 중국의 개방화 바람이 조선족 사회를 쓸어간 뒤부터 만주는 마치 유령도시처럼 변해가고 있다. 북에서 몰래 건너 온 탈북자, 조선족, 한족의 서로 다른 습성과 복잡한 계산만이 스산하게 남아있다.
“지금에 와서 고향의 모습은 너무나 스산해졌다. 모두들 돈 벌러 한국으로, 연해도시로 가는 바람에 전혀 생기라곤 없다. 논밭은 여러 해 묵어 이미 잡초더미로 되어버렸고 순 조선족 마을에 한족들이 쌀에 뉘 섞이듯 한둘씩 힐끔힐끔 눈치 보면서 침범해 들어오고 있다.”
『만주의 아이들』은 조선족·재일교포 문제 등 한국 사회의 뿌리이자 오랜 숙제들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요청하고 있다. 청소년 독자들은 같은 한국말을 쓰고 같은 드라마와 노래를 즐기는 또래들이지만, 환경에 따라 얼마나 생각과 생활이 다를 수 있는지를 환기하고 시야를 밖으로 확장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지식의 한 조각으로만 아는 것을 넘어, 풍성한 사색과 깊은 공감의 기회를 본 작품을 통해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