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비극에 맞닥뜨린 한 인간에게도
구원의 순간은 찾아오는가?
2000년 문단에 등장한 서른넷의 무명작가, 등단 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작품을 발표하며 어느새 프랑스 현대 문단에 뚜렷한 존재감을 각인시킨 작가 필립 베송. 그는 지금도 여전히 문단의 뜨거운 찬사와 동시에 고정 독자들의 변함없는 지지를 받고 있다. 『이런 사랑』 『10월의 아이』에 이어 국내에 세번째로 소개되는 필립 베송의 소설이자 아들의 죽음에 대한 과실치사죄로 복역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한 남자의 고백을 담은 『포기의 순간』은 특유의 예민한 문체로 상처입고 낙인찍힌 존재의 불행을 그려 보이며, ‘최악의 비극에 직면한 인간에게도 구원은 있는가’라는 묵직하고 심오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죽음, 죄책감, 다수의 증오 어린 시선에 고스란히 노출된 개인, 굳센 사랑이라는 주제. 짧고 간결한 문장, 단순하고 적확한 어휘, 선명한 이미지, 감상과 감수성 사이를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감정의 관조, 일체의 군더더기를 발라내고 핵심만 남긴 문체라는 형식. 이 소설은 주제와 형식 모두에서 필립 베송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작품임이 틀림없다. 어린아이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 그 사건으로 불행해진 삶, 세상의 편견과 배척에 맞선 개인 등의 주제는 필립 베송의 소설을 읽어본 독자에게는 낯선 것이 아니다. 굳건한 사랑만이 비극을 이겨내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는 것 역시.
불의의 사건을 겪은 후 세상의 편견을 견뎌내며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가는 한 남자의 여정을 보여주는 소설은, 틀에 박힌 것이 아닌 자신만의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불의의 사건이 외려 필요악은 아닌지 묻고 있다. 주인공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던 곳, 살인자라는 오욕을 향해 스스로 걸어들어간다. 그리고 고통스런 자기 성찰의 고백을 통해, 또 그를 수렁에서 끌어내는 사람들을 통해 가까스로 삶의 끈을 다시 붙잡게 된다.
한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베송은 오랫동안 죽음이라는 주제, 더 특별하게는 아이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깊이 생각해왔으며, 인간을 다시 일으켜세우는 죽음의 역설적 힘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포기의 순간』은 비극에 처한 인간이 엄청난 벽에 부딪히고 마침내 그 벽을 극복해내는, 필립 베송의 소설 중 가장 낙관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안개가 자욱한 해안 마을,
그곳으로 아들을 죽인 살인자 토머스 셰퍼드가 귀향한다
그렇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일깨워주기도 전에 이미 이방인임을 느낀다.
사람들은 이방인이 된 나를 환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더는 팰머스의 자식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말했다. 여기 말고는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육지가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에서 바다에 자리를 양보하는 곳, 거의 일 년 내내 커튼을 내린 잡화점들과 부둣가의 술집, 늘 안개가 자욱이 낀 바닷가는 휑뎅그렁하며, 집들은 하나같이 똑같이 생긴 그곳. 소설은 영국의 작은 해안 마을 팰머스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 토머스 셰머드라는 남자가 오 년여의 복역을 마치고 귀향한다. 오 년이란 시간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한 듯, 토머스가 나고 자라 가정을 꾸린 마을은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지만, 그는 이제 마을에 속할 수 없는 존재,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이다.
오 년 전 그는 폭풍우가 예고된 험한 날씨에 여덟 살 난 아들을 배에 태워 바다에 나갔다가 혼자 돌아왔고, 보호 소홀로 인한 과실치사죄로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이 치욕스런 사건을 쉽게 잊을 수 없었던 마을 주민들은 토머스의 귀향을 마뜩잖아하며 노골적으로 경멸을 드러낸다. 사실 폭풍우가 치던 그날 배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자비도 관용도 없이, 오로지 어린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아비의 경거망동을 범죄로 단정하고 비난하기에 급급하다. 이미 형을 치렀음에도 토머스는 또다시 마을 사람들의 적대적인 시선에 온몸으로 맞서야만 한다.
하지만 토머스와 마찬가지로 소외된 처지인 파키스탄인 식료품상 라지브와 신문가게 점원인 베티만은 조금 다르다. 토머스의 진실은 라지브와 베티에게 들려주는 고백 형식으로 조금씩 베일을 벗는다. 라지브에게 털어놓는 이야기에서는, 아내와의 불행했던 결혼 생활, 아이의 출생에 얽힌 비밀과 문제의 사고에 대한 정확한 경위가 드러난다. 토머스는 팰머스의 모든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그래왔듯 메리앤과 결혼을 했고 주어진 남편 혹은 아내의 역할을 하며 관성적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토머스가 자신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따라서 결코 아들의 친부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된 후로, 결혼생활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무관심과 짜증, 악다구니. 감정의 골이 깊어가는 중에도 토머스는 감히 아내의 부정을 들춰내는 대신 체념해버리고 만다. 아내의 부정의 씨앗인 아이에게 한순간이나마 살해 욕구를 품기도 했지만, 아들이 죽은 것은 순전히 사고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토머스는 알고 있었다. 아이를 직접 죽인 게 아니라는 사실이 변명이 될 수는 없으며 죗값 또한 가벼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토록 엄청난 가책을 짊어진 채 하루하루 멸시와 냉대를 견뎌내고 있는 토머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라지브는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차 한 잔으로 나름의 위로를 건넨다.
고해성사와도 같은 고백이 끝나면, 그와 베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신문가게에서 일하며 혼자서 아들을 키우고 있는 베티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토머스에게 호의적이며, 오 년간의 감옥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녀의 넉넉하고 솔직한 미소는 토머스에게는 위안이나 다름없다. 베티는 토머스의 결백함을 확신하며 마을에서 유일하게 같은 부류인 그에게 끌리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토머스는 그녀가 내민 손을 잡을 것인가?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는 한 여자에게 인생을 맡기고 휴식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토머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과묵하고 거칠고 고독했으나 토머스에게는 감옥의 시간을 견디게 해주고 안전함을 담보해주었던 그 사람, 토머스에게는 세상 전체나 다름없고 운명으로 연결되어 있는 남자 루크를 기다린다. 이 오욕의 장소 팰머스로 귀향한 것도 그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먼저 출소한 루크는 아내와 함께 예전 생활로 돌아가지만 이내 그것이 자신의 인생이 아님을, 자신에게 맞는 다른 인생이 있음을 확신한다. 루크는 어느 날 아침 메모 한 장 남기지 않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을 나서서 팰머스 행 기차에 오른다.
▶ 차례
책 하나_ 토머스 혹은 죄인
책 둘_ 라지브 혹은 과실
책 셋_ 베티 혹은 벌
책 넷_ 루크 혹은 구원
옮긴이의 말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간결한 단어, 요동치는 문장. 그리고 폭풍주의보. _베르지옹 페미나
섬세한 폭로의 기술은 모든 관습적인 함정을 피해 간다. _르 몽드
필립 베송의 모든 재능이 발휘된 소설. 화가처럼 몇 번의 매만짐으로 안개 자욱한 신비로운 배경을 그려내며, 살을 붙이고, 활기를 불어넣는다. _렉스프레스
필립 베송은 지칠 대로 지친 존재들의 불행, ‘상처입고’ ‘낙인찍히고’ ‘멍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불행을 그리는 데 탁월하다. _누벨 옵세르바퇴르
▶ 필립 베송 Philippe Besson
평단의 두터운 신망과 열성적인 고정 독자층을 동시에 확보한, 지금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2001년 『인간의 부재 속에서』로 등단한 후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발표해온 그의 작품들은 제목보다는 ‘필립 베송의 신작’으로 불리며, 그의 신작 소개는 프랑스 문단의 연례행사가 될 정도이다. 1967년 샤랑트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부터 접한 아르튀르 랭보, 마르셀 프루스트, 마르그리트 뒤라스, 에르베 기베르 등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루앙의 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법학자로 강단에 섰으며, 일간지 〈리베라시옹〉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다. 등단작 『인간의 부재 속에서』로 아카데미 공쿠르에서 수여하는 에마뉘엘 로블레스 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발표한 『그의 동생』은 페미나 상 후보에 올랐다. 이 소설은 2003년 파트리스 셰로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의 영예를 안았다. 2002년에는 『만추』를 출간, 에르테르엘 리르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각색되어 파리의 연극 무대에 올랐다. 2003년 출간된 『이런 사랑』(원제: 『이탈리아 청년』)은 공쿠르 상과 메디치 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2004년 메디테라네 상을 수상했고, 필립 칼바리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고 있다. 그밖의 주요 작품으로, 실제 유아살해사건인 ‘그레고리 사건’을 바탕으로 한 『10월의 아이』를 비롯, 『무상한 나날들』 『이별과 이별하기』 『우연히 만난 남자』 등이 있다. 2011년, 등단작의 속편인 『인간들 사이로의 귀환』을 발표했고, 여러 편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며 방송 프로그램 <파리 데르니에르>의 사회자로도 활동중이다.
▶ 옮긴이 장소미
숙명여자대학교 불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파리3대학에서 영화문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이런 사랑』 『10월의 아이』 『우리 안의 어둠』(근간)을 우리말로 옮겼다.
▣ 담당 | 황문정 (031_955_2659/mimosa@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