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박완서, 우리의 박완서
- 저자
- 여성동아 문우회
- 출판사
- 문학동네
- 발행일
- 2011-04-30
- 사양
- 248쪽+화보 8쪽 | 145*210 | 신국판 변형 |무선
- ISBN
- 978-89-546-1453-5
- 분야
- 산문집/비소설
- 정가
- 12,000원
- 신간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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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2011년 1월 22일 새벽. 우리 문단은 커다란 별 하나를 잃었다. 한국전쟁, 경제개발 등 질곡 많은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삶에 증인이 되어주었던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영면에 든 것이다. 향년 80세.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다, 1970년 나이 마흔에 뒤늦게 등단한 그는 지난 40여 년간 쉼 없이 작품을 쓰고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왔다. 체험을 바탕으로 육화된 원숙하고 따뜻한 작품은 오랜 세월 한국인의 삶에 위안과 용기를 주었고, 그 세월 동안 그는 한국 현대사의 말 없는 관찰자, 개인의 아픔과 고통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구도자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또한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 사람에 대한 세밀하고 따뜻한 묘사와 인간 내면의 거침없는 서사로 큰 사랑을 받았으며, 각박한 시대에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따뜻한 손을 내밀던 어머니였다. 그런 그이기에 독자들의 슬픔은 더 크다.
그 슬픔의 한가운데 『여성동아』 문우회가 있다. 박완서 선생은 1970년 제3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1남 4녀의 어머니이자 한 남자의 아내로 평범하게 살아왔던 선생은 등단 이후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여 본격적인 여성문학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으며, 여성작가들의 모범이 되었다. 늦은 나이에 등단을 하였지만 삶과 사회에 대해 보여주는 깊고 넓은 시선과 지치지 않는 창작열은 그의 직계후배라고 할 수 있는 『여성동아』 출신 작가들의 길잡이이자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이별은 급작스러웠다. 문우회와 함께하기로 한 팔순 생일잔치를 목전에 두고 암을 진단받은 박완서 선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으로 이어진 끈을 놓아버렸고, 그를 잃은 애통함과 허전한 마음을 모아 스물네 명의 『여성동아』 출신 작가들이 한 권의 책으로 소박하지만 정성스럽게 팔순 잔칫상을 차렸다. 『나의 박완서, 우리의 박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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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권혜수|김경해|김비|김설원|김정희|김향숙|노순자|류지용|박재희|송은일|신현수|오세아|우애령|유덕희|유춘강|이경숙|이근미|이남희|이혜숙|장정옥|조양희|조혜경|최순희|한수경(총2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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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차례
서문
1. 아치울의 봄
따뜻하고 소박한 사람 _ 노순자
모태 보존 _ 송은일
자두꽃 고운님 _ 한수경
꽃이 진 그 뜰에 다시 갈 수 있을까 _ 유춘강
벚꽃나무 아래서 _ 우애령
백일홍과 볼연지 _ 이경숙
거기 품 넓고 따스한 큰 산이 있었네 _ 최순희
2. 싱아는 여름에도 피고지고
마두동 가냐고 묻는 말에 _ 이혜숙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_ 류지용
세번째 눈물 _ 김경해
쌀바늘 세 개 _ 박재희
새벽처럼 조용히 오셨다 _ 김비
나의 선생님, 혹은 나의 슈퍼에고 _ 이남희
3. 그 가을 동안
새벽빛 밝아오면 호미를 들고 마당으로 가는 당신 _ 김향숙
떠나간 님을 그리워함 _ 유덕희
내겐 너무도 특별한 인연 _ 신현수
희망과 환상, 현실로 나를 깨우신 분 _ 이근미
암, 헛살지 않았고말고 _ 김설원
유쾌한 상상, 혹은 반란 _ 권혜수
4.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눈꽃 같은 당신의 이름은 _ 장정옥
잡고 가던 언니 손 놓친 것 같은 마음 _ 오세아
글이 되는 건 사랑이었다 _ 김정희
우산꽂이 항아리 _ 조혜경
박완서 선생님, 그대의 눈부심에 입맞춤해 _ 조양희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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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리뷰
2011년 1월 22일 새벽. 우리 문단은 커다란 별 하나를 잃었다. 한국전쟁, 경제개발 등 질곡 많은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삶에 증인이 되어주었던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영면에 든 것이다. 향년 80세.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다, 1970년 나이 마흔에 뒤늦게 등단한 그는 지난 40여 년간 쉼 없이 작품을 쓰고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왔다. 체험을 바탕으로 육화된 원숙하고 따뜻한 작품은 오랜 세월 한국인의 삶에 위안과 용기를 주었고, 그 세월 동안 그는 한국 현대사의 말 없는 관찰자, 개인의 아픔과 고통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구도자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또한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 사람에 대한 세밀하고 따뜻한 묘사와 인간 내면의 거침없는 서사로 큰 사랑을 받았으며, 각박한 시대에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따뜻한 손을 내밀던 어머니였다. 그런 그이기에 독자들의 슬픔은 더 크다.
그 슬픔의 한가운데 『여성동아』 문우회가 있다. 박완서 선생은 1970년 제3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1남 4녀의 어머니이자 한 남자의 아내로 평범하게 살아왔던 선생은 등단 이후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여 본격적인 여성문학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으며, 여성작가들의 모범이 되었다. 늦은 나이에 등단을 하였지만 삶과 사회에 대해 보여주는 깊고 넓은 시선과 지치지 않는 창작열은 그의 직계후배라고 할 수 있는 『여성동아』 출신 작가들의 길잡이이자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이별은 급작스러웠다. 문우회와 함께하기로 한 팔순 생일잔치를 목전에 두고 암을 진단받은 박완서 선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으로 이어진 끈을 놓아버렸고, 그를 잃은 애통함과 허전한 마음을 모아 스물네 명의 『여성동아』 출신 작가들이 한 권의 책으로 소박하지만 정성스럽게 팔순 잔칫상을 차렸다. 『나의 박완서, 우리의 박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