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레의 실존적 추리소설
- - 미스터리 형식 속에 결합한 권력에 대한 우화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오르내리는 이스마일 카다레의 근작(2003년). 1980년대의 알바니아 수도 티라너를 무대로 한 이 작품은 알바니아 근대사에서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한 자살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공산정권 독재자 엔베르 호자의 총애를 받던 후계자 메메트 셰후의 의문의 죽음이 그것인데,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히 살인의 미스터리만을 다루고 있지 않다. 후계자의 죽음을 둘러싼 무수한 버전의 불투명한 소문으로 직조된 퍼즐과 미스터리 요소들의 변주를 통해 카다레는 권력과 공포의 본질, 인간 실존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는 죽음의 진상을 밝히거나 답변을 제시하는 대신, 이 살인 사건과 연루된 주요 등장인물들이 기억의 편집과 왜곡 속에서 각자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고백하게 하는 서술방식을 취함으로써 독자를 점점 더 불확실성의 세계로 이끈다. 마치 사건 자체가 영원히 파헤쳐지기를 거부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한편, 카다레는 잃어버린 알바니아의 신화와 민담의 서사구조, 영매, 죽은 메메야 고모의 방문, 유령이 된 후계자의 독백 등 초자연적.마술적 리얼리즘에 의존해 전제주의 사회가 파괴한 인간의 서사적 원형을 복구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보인다.
1980년대 알바니아의 그늘진 공포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카다레는 보고문에 가까운 냉정하고 객관적인 어법을 사용한다. 인간의 부조리한 현실이 카프카 식의 수식 없고 건조한 문체를 통해 표현되며 작가 자신이 완벽한 냉정을 유지함으로써, 우스꽝스러운 촌극이 주는 우울한 웃음을 작품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어둡지만 무겁지 않고, 절망적이지만 코믹한 카다레의 시선은 억압과 공포로 일그러진 인간 희비극을 따듯하게 보듬어 안는다.
후계자의 자살사건
- - 불확실성에 지배당하는 소문의 공포 반응
12월 14일 새벽, 당서기장의 후계자로 지명받은 이가 침실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사건이 서둘러 자살로 종결지어진 뒤에도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놓고 알바니아 전역이 술렁인다.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은 지난 9월, 후계자가 자신의 저택을 유럽풍으로 새로 개축하고, 외동딸 수잔나와 구체제 인사인 지진학자 집안 간에 약혼식을 치르면서부터였다. 자유주의 사상에 물든 후계자의 서부 유럽풍 저택은 티라너 시민들의 눈총을 샀고, 의심과 질투를 특권으로 하는 최고 권력자 지도자 동지의 질투를 사게 된다.
마침내 손이 스위치를 작동시키고 홀이 더 환해지자 지도자 동지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광도가 점점 높아져 최대치가 되자 그에게서 하하하, 다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마음에 꼭 드는 장난감을 찾아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거기 모인 다른 사람들도 그를 따라 모두 요란하게 웃어댔고 그가 반대 방향으로 스위치를 돌리기 시작할 때까지 놀이는 계속되었다. (136쪽)
미스터리의 퍼즐은 더욱 복잡해진다. 후계자에게서 예술가적 자존심을 폄하당한 건축가의 복수, 결국 지도자 동지의 ‘검은 야수’에 토사구팽 당하는 내무부 장관 아드리안 하소베우, 혈연보다 더 질긴 더러운 피의 연대감으로 맺어진 아내와 후계자와 지도자 동지의 관계, 그리고 지도자 동지가 후계자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고 실제로 모든 것을 통제하는 장본인임에도 궁극적으로 ‘진실에 대해 관심 없는’ 지도자 동지의 모습은 의심과 공포의 메커니즘으로 체제 유지를 꾀하는 고립된 전제주의 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공포 정치의 본질에 대한 반성의 결과물이라 할 만한 이 소설에서 우리는 호자 독재정권의 안개 속에 감추어져 있던 범죄와 맞붙어 겨루려는 카다레의 작가정신을 엿보게 된다.
전제주의의 광기 속에서부유하는 수잔나의 가족과
사랑의 영원한 불모성
지도자 동지에 대한 종교적 신념에 찬 이러한 추종자들의 기묘한 공포감은 사랑과 가족관계 등 모든 개인의 가장 내밀한 관계마저 국가의 요구와 변덕에 지배당하게 한다. 그러나 체제의 명목으로 희생당하는 수잔나는 감수성 풍부한 여자로서 사랑을 절망적으로 추구한다. 이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 사랑과 섹스에 대해 솔직담백하고 정열적인 작가의 터치를 목격할 수 있다.
쾌락과 고통이 서로 뒤섞여 불타 소멸되고 마는 음부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지? 사랑을 나눌 그 순간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날짜와 시간과 분을 세던 나 자신이 사랑 없이 어떻게 살아가지? 아버지와 그 동지들의 삶에는 회의나 깃발, 송가, 국립 순교자 묘지 같은 다른 쾌락의 원천이 존재하지만...... 그녀가 자기 삶에서 가진 거라곤 그의 몸...... 지칠 줄 모르는 그의 몸밖에 없었다......(104쪽)
실제로 알바니아 역사에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딸을 희생시킨 집안의 사례들이 넘쳐난다. 켈멘드 가의 노라가 터키 사령관의 막사로 들어간 것도 터키인에게 몸을 바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전제주의 사회의 부조리한 공포 속에서 더없이 파괴적인 인간의 광기는 수잔나의 가족관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남동생의 씁쓸한 고백처럼, 신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그러했듯, 전제주의 사회에서 자식이란 일시적 위상에 불과하고 의무를 이행해야 할 순간이 닥치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의 요구를 따라야 한다.
어머니의 젖가슴도 여느 젖가슴들과는 달랐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의 피와 어머니의 젖은 전혀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의식을 치르거나 송가를 부를 때면 ‘당의 빛이시여!’ 혹은 ‘어머니의 당이여!’라는 외침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머지않아 사람들은 ’당의 젖, 당의 유방, 당의 성기‘를 외쳐댈 테지. (125쪽)
인간의 유실된 원형을 찾아서
- - 신화와 민담, 초월의 우주적 세계
이제 후계자의 죽음은, 자유주의 사상에 물들어 조국 알바니아의 정치 노선을 이탈하려 쿠데타 음모를 꾸몄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후계자의 묘는 파헤쳐지고 그의 유해는 관의 널빤지 및 주변 흙덩이와 자갈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몸의 일부조차 유실되었다.
벌써 수년째 나는 바람이 부는 대로 정처 없이 이 공허 속을 부유하고 있다. 어딘가로 가고 있는 듯싶다가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나 자신을 본다. 바닥도 경계도 없는 이 공간은 게다가 절망스러울 만큼 광막하여 한 영혼이 다른 영혼과 마주치는 일도 매우 드물다. 그대들에게 누차 되풀이해 말했듯이, 이 공허의 한복판에서 지도자 동지들처럼 충복들의 호위를 받는 우리 후계자들은 한 무리의 비참한 족속에 지나지 않는다. (245쪽)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실제 사건이 소설 속에서 우주적 차원을 부여받는다. 격언과 민담, 전설, 선조들이나 선례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며, 집에 내려진 저주나 이승과 저승을 분리하는 황무지, 친척인지 비밀경찰요원인지 무덤에서 돌아온 유령인지 알 수 없는 늙은 고모 등이 등장하는데, 그로 인해 소설 전반에 환상적인 분위기가 형성된다. 결국 진실은 이 소통불가능한 타자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유령이 된 뒤에야 비로소 후계자의 독백으로 그 황폐한 실체를 드러낸다.
『아가멤논의 딸』과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
2부작의 두번째 작품인『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2003년)는 전편 『아가멤논의 딸』(1983년)이 쓰인 지 20년 뒤에 쓰였다.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에서 다루어지는 사건의 주요 모티브인 수잔나의 약혼은 『아가멤논의 딸』에서는 전면에 부각되며 이야기의 초점을 달리해 또다른 각도에서 이야기된다. 한데 알바니아 역사의 정치적 사건에서 출발하는 이들 소설의 줄거리를 따라잡기 위해 발칸 국가들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소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카다레의 언급대로, 알바니아의 정치 현실을 넘어서서 인류의 영원한 기억의 샘에서 길어 올린 것으로서 모든 세대를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의 한국어판 번역본은 테디 파라브라미(Tedi Paravrami)가 알바니아어에서 프랑스어로 옮긴 『Le Successeur』를 사용했다.
해외 서평
카다레는 역사와 열정, 민담, 정치, 재앙 등 문화의 전체 지도를 그리는 작가이다. 그는 호머로 거슬러 올라가는 스토리텔링의 전통 속에 서 있는 보편적인 작가이다. -존 캐리, 맨부커 국제상 의장
카다레는 조지 오웰과 아서 쾨슬러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쓴다. 프란츠 카프카의 예언자적 판타지보다 더 치밀하고 어둡지만 아주 가벼운 어조로 무게감 있는 우화를 쓰는 재능이 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카다레는 이 소설에서 인물들을 마술적 리얼리즘의 공포 속에 녹여낸다. 그는 억압을 고발한 대가들인 조지 오웰, 카프카, 쿤데라, 솔제니친의 반열에 서 있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정신적으로 용기 있고 완성된 기량의 스토리텔러. 그는 분명 살아 있는 가장 훌륭한 소설가이다. -『랄리 뉴스 & 옵저버』
어떠한 언어로 사용하는 작가이든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소설가. -『월 스트리트 저널』
카다레는 분명 세계적 수준의 소설가이자 산문 시인이다. -『보스턴 글로브』
이스마일 카다레(Ismael Kadare)
1936년 알바니아에서 남부 쥐로카스트라에서 태어났다. 티라너 대학교에서 언어학과 문학을 공부했고 모스크바의 고리키 문학연구소에서 공부했다. 고등학생이던 1953년에 이미 『서정시』라는 시집을 출간하여 일찌감치 시인으로 데뷔했으며, 1963년 첫 소설 『죽은 군대의 장군』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2005년 제1회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했다. 그의 등장으로 유럽에서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던 알바니아의 정치 상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산 독재정권 하의 조국 알바니아의 혼과 집단기억을 문학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리는 그의 작품세계는 마르케스의 그것에 비견되며, 전제주의와 유토피아의 위험을 고발하는 헉슬리와 오웰의 뒤를 잇는 반(反)유토피아 가계의 마지막 후예로 꼽히기도 한다. 죽음과 파괴의 그림자가 너울대는 비극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내용들, 우스꽝스러운 비극과 기괴한 웃음의 조화로 그는 세계적 작가의 자리를 굳혔다. 또한 2천 년간의 외세 지배와 혹독한 스탈린 식 공산독재를 겪으며 유럽에서조차 잊힌 나라 알바니아를 역사의 망각에서 끌어낸 ‘문학대사’로 평가받는다.
엔베르 호자 독재정권이 무너지기 몇 달 전인 1990년 10월, 그는 알바니아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하여 지금까지 파리에서 계속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죽은 군대의 장군』『돌에 새긴 연대기』『부서진 사월』『꿈의 궁전』『H서류』『아가멤논의 딸』 등이 있다.
옮긴이 이창실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 응용언어학 과정을 이수한 뒤,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불과를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 『앙드레 말로』『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프란츠 카프카의 고독』『누보 로망, 누보 시네마』『키에르케고르』『번영의 비참』『길모퉁이에서의 모험』『빈센트 반 고흐』등이 있다.
* 2008년 2월 22일 발행
* ISBN 978-89-546-0473-4 03890
* 128*188 | 246쪽 |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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