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아름답다?
미술에서 만나는 불편한 진실들
자학, 자살, 공포, 잔인함, 죄의식, 폭력, 편견, 위선, 탐욕……
음습한 인간의 마음을 포착한 ‘검은’ 그림들을 만나다
‘미술(美術)’이란 단어에는 ‘아름다움[美]’이란 뜻이 들어 있다. 미술의 본질은 ‘아름다움’에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것이 통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지은이는 미술사에서 의외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검은’ 미술에 주목한다. 약하고, 악하고, 추한 인간의 마음, 그것이 만들어낸 사회에서 태어난 미술이기에 그런 ‘검은’ 미술들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살이가 만만했던 적은 없었다. 지구 어딘가에서는 늘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또 어느 곳에서는 개인의 개인에 대한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또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의 욕심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을 희생양 삼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늘 어두운 것만은 아니지만 세상의 악한 면들을 찾아내기가 어려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물론 그런 어두운 현실에 눈을 감지 않았다. 의도적이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캔버스와 조각 작품에 담겼다. “예술가들은 성실한 태도로 현실을 바라봤던 것 같다. 시대, 장소를 막론하고 추한 현실을 그려낸 ‘검은’ 그림들이 계속 쏟아져 나왔던 것을 보면 말이다.” 지은이는 서양의 르네상스 시대 그림부터 현대 한국 작가들의 작품까지, 시대와 지역을 넘나들며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짚어본다.
“누구나 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으면 추함이 있다는 것을. 미술사에도 추하고 어두운 그림들이 많다. 예술가의 영감이라는 것은 그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에서 하루하루 숨 쉬며 살아가는 가운데 탄생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작품 속에는 인간 삶의 비루함과 심연의 어두움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예술이란 사회의 반영이며 생활의 거울 아닌가.
객관적으로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그림들과 그에 얽힌 어두운 이야기들이 그리 편하게 읽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불편함 때문에라도 더더욱 이 책을 끝까지 읽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검은 미술관』에서 다룬 그림 속의 추한 인간들의 모습이 한없이 밉고 그 인간들이 만들어낸 추악하고 어두운 사회가 너무나 싫다면, 인정하기 싫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_「책을 내며」에서
책은 2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은 질투, 자살, 공포와 불안, 잔인함, 죄의식, 모성 등 개인의 어두움을 다룬 예술작품들을 살피고, 2장에서는 전쟁, 종교의 도그마, 사회적 편견, 자본주의, 집단 폭력, 동물문제 등 사회의 어두움을 담은 예술작품을 다룬다.
검은 개인을 그리다
첫 번째 이야기는 애정관계로 괴로워한 예술가들의 이야기이다. 로댕과의 관계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정신병원에서 비참한 생을 마감한 카미유 클로델은 질투심에 못 이겨 추한 늙은이로 묘사된 로댕과 로댕의 여인 로즈 뵈레가 성교를 하는 장면을 묘사하기도 했다. 또 프리다 칼로는 질투 때문에 살해당한 여성에 관한 신문기사를 읽고 그 장면을 「몇 번 찔렀을 뿐」이라는 그림으로 그렸다. 그림 속 남자와 여자의 얼굴이 묘하게도 프리다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자신과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동생과 관계를 맺기까지 한 남편 디에고의 여성편력으로 괴로워하고 있었고, 그런 괴로움을 난자당해 죽은 여성의 모습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희망과 자학 사이에서 괴로워하다」)
예술가들은 죽음에 대한 작품도 많이 남겼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크게 유행한 ‘바니타스’는 해골, 비눗방울, 책, 깃털, 초 등 유한하고 덧없는 인간의 삶을 상징하는 정물을 그려 삶의 허무를 나타낸 정물화이다. 초기에 바니타스 정물화는 초상화의 뒷면에 그려지다가 점차 독자적인 장르로 발전했다. 죽음은 언제나 인간의 조건이었기에 현대 작가들 또한 죽음을 다룬 작품을 많이 제작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젊은 작가 이완이 돈, 명품, 금붙이, 담배 가운데 홀로 썩어가는 새의 시체를 담은 「신의 은총」은 바니타스 정물화를 영상작품으로 옮겨온 것 같다. (「바니타스, 죽음을 인정하다」)
인간의 공포와 불안을 다룬 그림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벨라스케스의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 습작」 연작을 예로 들어 다룬다. 그야말로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인 ‘잔인함’은 고야의 그림들을 예로 들었다. 전쟁의 처참함을 80여 점의 기록한 이 동판화들에서는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그 극단을 보여준다. (「공포와 불안에서 허우적대다」)
포르투갈의 작가 파울라 레고의 그림으로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개인에게 족쇄이자 구속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말한다. 남편이 다발성경화증을 앓아 오랜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파울라는 남편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듯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중 소녀가 개를 돌봐주는 듯 보이는 ‘소녀와 개’ 연작은 시간이 지날수록 소녀가 개를 학대하고 심지어 살해하는 폭력성을 띠게 된다. 현실에서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던 파울라였지만 그림에서는 무의식을 드러냈던 것일까. (「가족, 서로를 옭아매다」)
검은 사회를 그리다
전쟁을 소재로 한 그림은 많다. 그중에는 승전을 축하하고 승리로 이끈 영웅을 찬양하는 그림도 있겠지만 물론 지은이가 다루는 그림은 전쟁의 해악을 고발한 그림들이다. 스위스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은 ‘전쟁’ 연작을 통해 파괴와 죽음만을 남기는 전쟁을 고발했다. 또 슬로베니아의 화가 조란 무시치는 전쟁의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을 그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다하우 수용소로 끌려갔던 경험이 있는 무시치는 떠올리기도 싫은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전쟁을 고발하는 작품을 남겼다. 다시는 없어야 할 끔찍한 공포가 되풀이되고 있는 현실을 꼬집기 위해서였다. (「전쟁의 폭력과 참상을 그리다」)
모 아니면 도의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를 비판하기 위해 지은이는 미국의 젊은 작가 켄트 헨릭슨의 그림을 예로 든다. 헨릭슨의 그림은 경쾌한 색깔과 패턴으로 되어 있어 언뜻 보면 그림이 담은 메시지를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실상 담고 있는 내용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이다. 이런 강한 메시지는 자수라는 여성적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지은이는 이것이 아름답게 포장된 종교의 겉모습을 상징한다고 본다. (「종교, 도그마가 되다」)
여성에 대한 편견, 인종에 대한 편견 등, 사회적 편견은 개인에게는 대단한 폭력이기도 하다. 한국의 젊은 작가 한효석은 다소 충격적인 방법, 즉 인간의 얼굴을 고깃덩어리로 묘사함으로써 결국 인간은 한 꺼풀 표피를 벗겨내면 다 똑같은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편견은 차별을 낳는다」)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자행된 폭력의 역사는 길고 길다. 그중에서 192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벤 샨의 그림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였던 사코와 반제티는 강도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으나 그 근거는 그저 범인이 이탈리아
인처럼 보였다는 것밖에 없었다. 이들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지만 결국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적색공포’에 시달리던 당시 미국사회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벤 샨은 ‘사법살인’이라고도 알려진 이 사건을 함축적으로 담아내 이 사건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도록 했다.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을 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