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득음과 독공, 곰삭은 소리의 비밀
판소리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소리란, 태생부터 고통의 씨앗을 품고 있다. 으뜸으로 치는 수리성을 얻기 위해 목에 상처를 내고 또 상처를 내 아예 목을 흉터투성이로 만드는 것이 바로 득음의 시작이다. 소리를 얻기 위해, 그 유명한 박동진도 아버지에게 똥물이라는 비책을 부탁했다. 여색에 깊이 빠져 소리를 상했던 그가 나무에 팔을 매달아놓고 북을 치며 거의 다 죽게 된 지경에 이르러 마신 것이 바로 똥물(73쪽). 대나무 마디를 잘라 인분통에 넣어두었다가 고인 맑은 물을 먹으니 비로소 눈이 환해지면서 소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뿐인가. 득음은 끝없는 수련의 시작일 뿐이다. 소리꾼은 득음을 한 뒤에도 소리가 폭포를 뚫고 나갈 때까지 몇 번이고 백일공부를 다시 한다. 가왕 송흥록이 그렇게 독공을 했으며, 염계달은 자그마치 10년 동안 상투에 끈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소리 공부를 했다(65쪽).
◆ 진채선과 대원군, 떡목으로 판을 막은 정정렬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소리꾼의 인생, 거기 판소리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네
소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소리꾼의 일생은 그 자체로 우리 삶의 온갖 슬픔과 기쁨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최근 소설과 뮤지컬의 소재로 각광받은 진채선은 최초의 여자 소리꾼이다(141쪽). 그간 팩션으로 다뤄진 진채선의 삶을, 이 책은 실제 사료를 토대로 추적해간다. 진채선은 신재효의 각별한 배려 속에 소리를 배웠고, 남자 복장을 한 채 한양에 올라가 흥선대원군의 눈에 들어 그의 집에 기거하며 소리를 한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진채선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기생이 되었으리라는 세간의 소문과 달리 출궁녀가 되어 조용히 일생을 마쳤으리라는 것이 저자의 추론이다.
한편, 좋지 않은 목소리를 뜻하는 ‘떡목’을 가졌던 정정렬이 목소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용틀임하는 창법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고군분투, 임방울이 마침 그 시대에 등장한 방송과 음반이라는 근대문물을 통해 온 국민의 스타로 데뷔한 이야기, 그리고 김연수가 임방울을 시샘해 일부러 목이 나빠지도록 그에게 우렁이회를 사다준 일화 등 이 책은 소리꾼들의 드라마로 가득하다.(그런데 우렁이회를 먹은 임방울은 어떻게 됐을까? 그는 우렁이회를 먹고도 소리를 잘만 했다. 이를 본 김연수는 “목이 좋은 놈은 우렁이회를 처먹어도 목이 환장하게 잘 나오네그려”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111쪽)
◆ 살아 있으라, 소리는 살아 있으라…… 소리꾼의 각오
지금, 판소리는 절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박제된 예술은 이미 예술이 아니다. 판소리는 1964년부터 국가의 정책적 보호를 받기 시작했다. 저자에 따르면, 판소리가 문화재 보호법에 근거해 “원형을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시작한 것 자체가 이미 적신호다. 그것은 판소리가 완전히 전승의 활력을 잃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171쪽). 그렇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청중의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농악은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등장과 함께 ‘과격한 변이형’일지언정 대중예술로 살아남는 데 성공했는데 판소리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소리꾼이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저자는 박동진의 판소리를 예로 들며 대안을 모색한다. ‘마지막 대가’ 박동진의 위대함은 그가 위기에 처해 있던 판소리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것으로 만들어놓았다는 데 있다. 그는 매번 새로운 공연을 할 때마다 청중의 성격에 맞게, 즉흥적으로 사설을 지어내기로 유명했다. 평생 다시 태어나도 광대의 길을 가겠다고 공언하며 스스로를 광대로 불렀던 박동진, 그렇게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는 소리를 하고자 했던 그의 정신, 그것이 바로 오늘날 소리꾼들이 품어야 할 각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