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우디 앨런, 마르셀로 비르마헤르가 그리는
유부남들의 엉뚱한 자화상!
지구 정반대편의 유부남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라틴아메리카 문학계에서 가장 전도유망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젊은 작가 마르셀로 비르마헤르의 소설집 『유부남이 사는 법』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남미의 한 국가 아르헨티나에서 살아가는 유부남들의 고민과 방황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안정된 결혼생활 속에서도 늘 ‘딴 생각’을 하는 남자들, 작가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유부남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재치 있는 필치로 풀어놓는다.
이 작품은 비르마헤르의 ‘유부남’ 시리즈, 즉 『유부남 이야기 Historias de Hombres Casados』(1999)와 『새로운 유부남 이야기 Nuevas Historias de Hombres Casados』(2001) 『마지막 유부남 이야기 Últimas Historias de Hombres Casados』(2004)에 실린 단편 중 8편을 선별하여 묶은 것으로, 그 첫째 권은 『유부남 이야기』(문학동네, 2006)라는 제목으로 기출간된 바 있다. ‘유부남’ 시리즈는 마르셀로 비르마헤르라는 젊은 작가를 중남미를 비롯해 전 세계 문단에 알린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9년 첫 권이 출간되었을 때, 현지의 각종 신문과 잡지에서는 그를 ‘우디 앨런과 서머싯 몸을 적절히 합쳐놓은’ 작가라고 앞 다투어 소개했다. 실제로 비르마헤르 자신도 서머싯 몸의 영향을 받아 이 작품을 썼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이번에 출간되는 『유부남이 사는 법』에는 자신의 작품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출간되는 것을 기념하여 작가가 직접 쓴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이 실려 있다. 2년 전,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최한 ‘2006 서울, 젊은 작가들’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비르마헤르는 한국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다. 아르헨티나로 이민 간 유대인의 후손인 작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대인 지역인 온세(Once)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 온세 지역은 또한 한국 이민자들의 거주 지역이자 상권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한글 간판과 한국인을 자주 접해 한국이 친숙하게 느껴진다는 마르셀로 비르마헤르. 자신의 작품이 지구 반대편 나라에 두 권이나 번역, 출간된다는 것은 작가에게도, 또 그의 작품을 읽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달콤한 일탈을 꿈꾸는 엉뚱하고 소심한 유부남들의 방황기!
『유부남이 사는 법』은 소위 말하는 ‘바람난’ 유부남들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불륜 이야기’인가? 이에 대해 작가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극적 불륜이 아니라 행복한 결혼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작품에서 ‘불륜’의 냄새는 나지 않는다. 이는 작가가 도덕적, 사회적인 잣대를 들이대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보다는 일탈을 통해서나마 실현 불가능한 행복을 꿈꾸려는 남자들의 모습을 차분하게 그려나가기 때문이다. 일상의 이야기를 독특한 시각으로 관찰하고 그 속에서 유머의 요소를 섬세하게 집어내어, 여운을 남기는 짧은 글로 옮겨놓는 작가 특유의 글쓰기 방식은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소재를 웃음으로 승화시킨다.
그렇다면 작품 속 유부남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하자면 ‘엉뚱하고 소심하다.’ 시쳇말로 ‘찌질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며 괴로워하고, ‘어떻게 하면 여자를 좀 만나볼까’ 하는 생각에 골몰한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작업’을 해보는 것도 아니고, 그럴 만한 용기도 없다. 그저 이런저런 고민으로 속만 끓일 뿐이다.
나는 고메스를 떠올렸다. 그녀는 왜 내게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 왜 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애가 둘이나 딸린 유부남이기 때문에? _ 「키신저와의 인터뷰」 중에서 (본문 26쪽)
마리아 파울라의 입술만으로 그녀가 자신의 마지막 사랑이 될 것이라 확신한 보르고보. 그녀 없는 인생은 사막과도 같은 것이다. (중략) 과연 인생은 이렇게 끝나버리는 것인가? 그렇다고 자살을 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남겨진 부인과 두 자녀 그리고 손자까지 생각하면 말이다. _ 「마지막 여인」중에서 (본문 41쪽)
‘… 당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사랑스러운 여인입니다. 당신의 입술에 난 그 흉터를 빨아주고 싶군요.’ 하지만 내가 고작 내뱉은 말이라고는…… “그 상처는 어쩌다가 생긴 겁니까?” _ 「여행하는 유대인」 중에서 (본문 117~118)
그렇다면 이 남자들은 아내와 가족에게서 마음이 완전히 떠나버린 걸까? 그것도 아니다. 아내와 심하게 다툰 후 화장실에 틀어박힌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내와 딸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키신저와의 인터뷰」), 전화벨 소리를 듣고 ‘그녀일까?’ 기대해보지만 딸의 목소리임을 알아채고는 금세 딸을 그리워하게 되고(「마지막 여인」), 출장 간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아 비싼 국제전화로 아내에게 사랑의 맹세를 몇 번이고 반복하게 한다(「신앙인들이 믿음을 갖는 진짜 이유」).
한 발은 가정에 담그고 있지만 다른 한 발로는 허공을 휘젓는 유부남들, 달콤한 일탈을 꿈꾸지만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피식 하는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이 가련한 유부남들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
뒷부분의 세 단편 「룩소르 호텔에 온 여자」 「수상한 그림」 「사라진 남녀」는 1인칭 화자인 주인공이 다른 등장인물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우연하게(어쩌면 필연적으로) 이야기를 접하게 된 주인공들은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술탄이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갈구하듯 점점 그 속으로 빠져들게 되며, 예기치 못한 결말과 맞닥뜨리게 된다.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듯한 긴박감과 놀라운 반전이 압권이다.
주요 단편 소개
「키신저와의 인터뷰」
4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조금 빛을 보게 된 기자 ‘나’는 미국 전 국무부장관 헨리 키신저를 인터뷰하게 되었다. 인터뷰 날 아침, 정치적인 문제로 아내와 크게 싸우지만, 싸움의 원인이 비단 정치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스페인에서, 콜롬비아에서 만난 여인들 때문에 겪는 마음의 고통을 아내에게 고스란히 쏟아낸 것이다. 마음을 추스르고 아내와 화해를 한 후 인터뷰 장소로 향하지만, 여자 생각은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는 키신저와의 인터뷰에서 결국 ‘나’는 키신저에게 엉뚱한 질문을 하게 되는데…
「마지막 여인」
예순이 넘은 작가 보르고보는 투쿠만 출장에서 만난 마리아 파울라를 인생의 ‘마지막 여인’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녀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에 좌절하며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끝나버리는 것인지 허무함을 느끼게 된 보르고보는 40년 친구인 동성애자 메르빌에게 심경을 고백하지만, 메르빌에게서는 ‘에이즈에 걸렸다’는 더욱더 충격적인 소식을 들을 뿐이다. 보르고보는 이제 곧 떠나버릴 사랑과 우정에 절망하여 만취 상태로 친구에게 기대어 펑펑 울고 만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만사를 낙천적으로 생각하려는데, 그 순간 걸려온 마리아 파울라의 전화는 그의 마음을 또다시 흔들어놓았다!
「사라진 남녀」
가족과 함께 미라마르에서 여름휴가를 보낸 ‘나’는 휴가 동안 친구들에게서 아다와 레오폴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둘은 어렸을 적 연인 사이였으나 우여곡절로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고 십여 년간 소식 없이 살아왔다. 그러다가 부부끼리 다시 만나게 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어느 날 아다와 레오폴도가 동시에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작가인 ‘나’에게 있어 이 이야기는 어쩌면 세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연애 사건일 수도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지 2년이 지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아다를 만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 지은이와 옮긴이
마르셀로 비르마헤르(Marcelo Birmajer)
196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사춘기 때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글쓰기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면서 극복했다. 이 같은 체험은 작가가 평생 ‘글쓰기’라는 직업에 몸을 담는 계기가 되었다. 50여 곳이 넘는 언론사에서 편집기자로 활동했고, 아르헨티나의 대표적 일간지 『클라린』을 비롯해 『라 나시온』 『파히나 12』와 에스파냐의 대표적 일간지 『엘 문도』 『엘 파이스』 『아베세』등에 각종 기사 및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시나리오 창작에도 재능을 보여,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다니엘 부르만과 시나리오를 공동집필한 영화 <갈라진 포옹>은 2004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극본상을 수상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유부남 이야기』시리즈를 비롯하여, 『악마에게 바친 영혼』(1994), 『가장 높은 불』(1997), 『삼총사』(2001) 등이 있다. 낙천적이고 유머러스한 아르헨티나의 정서가 그대로 녹아 있는 비르마헤르의 소설은 독일, 에스파냐,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프랑스 등지에서 번역 출간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옮긴이 조일아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였으며 동 대학 통역번역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동 대학원에서 강의중이다. 국제회의 통역사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시사만화 『마팔다』를 비롯해,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작가 호르헤 부카이의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마르틴 카파로스의 『발피에르노』를 우리말로 옮겼다.
▣ 2008년 5월 9일 발행
▣ ISBN 978-89-546-0559-5 03870
▣ 128 * 188 | 400쪽 | 10,000원
▣ 책임편집 이은현 (031-955-2653, singing36@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