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변주곡 세 편이 실린 카다레의 소설집 출간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세계 문학의 거장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출간된 카다레의 소설집이기에, 카다레의 문학 세계를 흠모하는 독자들에겐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이번 작품집에는 최신작 「광기의 풍토」(2004)를 비롯하여 「거만한 여자」(1984), 「술의 나날」(1962), 이렇게 세 편의 짧은 소설이 실려 있다. 40년의 시차를 두고 쓰인 작품들이지만, 카다레는 대가다운 필치로 40년이라는 긴 시간의 간극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전혀 다른 문체, 전혀 다른 등장인물들을 통해 전후(戰後) 공산주의 체제 초기 알바니아의 초상이라는 주제를 다채롭게 구현해내고 있다.
작은 소설에 담아낸 큰 이야기
카다레가 ‘미크로로망(microroman, 미니어처 소설)’이라 지칭한 이 짧은 소설들은 ‘누벨(nouvelle, 중 . 단편 소설)’과는 다른 개념으로, 이는 등장인물과 배경의 스케일을 줄인, 삶의 한 단면도 아니고 한 가지 일화에 대한 부연도 아니다. 인물들의 깊이와 풍부함, 다양함을 갖춘 한 편의 완결된 소설이되 소형화되어 있을 따름이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손 안에 들어오는 소설’이다.
시대의 비극과 광기에 휩쓸리는 가족사를 천진한 소년의 눈을 통해 그려낸 표제작 「광기의 풍토」, ‘몰락한 가문’과 ‘새 체제의 옹호자’라는 두 적대계급간의 결혼을 소재로 공산주의 사회의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단면을 유머러스하게 다룬 「거만한 여자」, 위대한 알바니아 시인의 소실된 원본 찾기라는 ‘성배의 탐색’에 나선 두 대학생의 어처구니없는 여정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낸 「술의 나날」은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소설가의 또 다른 면모를 일깨워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희비극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변주의 대가, 카다레
시대의 권력과 광기 서린 이데올로기에 휩쓸리는 인간 군상들과 비극의 가족사는 카다레의 작품을 관통하는 테마 중 한 가지다. 그러나 카다레는 알레고리의 대가답게 비극을 비극으로만 다루지는 않는다. 그가 이번 작품집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 역시 유머러스한 비극과 황량한 유머이다. 그 주된 테마는 비극의 단조이되, 선율은 경쾌한 장조라고 할 수 있다.
「광기의 풍토」는 작가가 고향인 쥐로카스트라에 바친 작품인 『돌에 새긴 연대기』의 후속편 격인 소설. 화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어른들의 세계를 관찰하고 해석하는 어린 꼬마다. 이 작품이 카다레의 자전적 소설인 점을 감안한다면, 화자는 어린 카다레인 셈이다. 어린아이의 눈과 목소리를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이기에 때로는 웃음을 자아내고, 때로는 천진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 뒤에 펼쳐지는 것은 가문의 비밀과 숨죽여 말하는 위태로운 사연들, 보이지 않는 ‘유령들’을 지닌 두 가족의 강렬하고도 살벌한 그림이다.
「광기의 풍토」가 공산당이 음지에서 양지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거만한 여자」에서는 공산당이 이미 득세한 시기로, 인간적인 것은 결핍된 채 오로지 사회적인 관계만이 세상을 지배한다. 그리하여 시골구석에 내팽개쳐진 ‘몰락한 가문 사람들’은 잃어버린 권세를 되찾기 위한 방편으로 공산당원과의 결혼을 통해 그 일원이 되고자 절치부심한다. 정치적으로 배제 당하는 것에 대한 대안으로 대두되는 ‘가족’, 공산주의 역사와 은밀히 재연결되는 가족의 모습을, 보다 고전적인 문체와 탁월한 심리 묘사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술의 나날」에서는 (알바니아 스탈린주의의 서슬이 가장 시퍼렇던) 시대와 장소의 분위기를 놀랍도록 간결하게 나타내는 특수한 상황들의 우스꽝스러움과 끊임없는 유머를 맛볼 수 있다. 또한 시간을 초월하는 방법을 통해, 무기력한 젊음이 기이한 탐색에 이끌리는 완전한 고독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세 편의 작품 속으로
「광기의 풍토」
유머의 색채와 자전적 성격을 띤 가족의 사가. ‘나’의 외가 도비 가문과 친가인 카다레 가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막내외삼촌의 자살 소동이 있은 직후, ‘나’의 외가는 가족간의 이데올로기 갈등을 표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막내외삼촌이 자살하려 했던 이유는 누나에게 ‘공산당원증’을 들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바니아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기 전인 구시대 사람인 외할아버지 ‘바바조’를 두고, 1인칭 화자인 어린 ‘나’는 알바니아 국가의 창건자라 믿는 등 수많은 상상을 한다. 실제로 바바조는 이 상상만큼이나 신비에 둘러싸인 복잡한 인물이다. ‘나’의 외가와 친가, 두 가족은 이렇게 시대의 광기에 휩쓸린 채 혼란기의 격동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당이 그렇게 강하다면 왜 숨어 지내는 건데?”우리는 이 물음의 해답을 찾기 위해 잠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그러나 해결점을 찾았나 싶기 무섭게 실마리를 놓치곤 했다. 맨 꼭대기에 계시기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게 생각이 미치자 곧바로 메로 람체의 이름이 떠올랐다. 지난겨울 이후로 경찰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는 그 유명한 닭 도둑 말이다. 그러다 결국 우리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투명 인간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그토록 겁을 먹는 건 그냥 그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결론지었고,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광기의 풍토」 29쪽)
「거만한 여자」
작은 시골마을에 갓 수용된 ‘몰락한 가문 사람들’, 그들은 이제 새로이 ‘낮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공산당의 집권으로 하루아침에 권세와 영화를 잃어버린, 옛 고위 관리의 미망인 무하데즈는 못생긴 딸을 추남인 공산당 소위 알레코 발라와 결혼시키는 것으로 또 한 번의 ‘재기’를 꾀한다. 그러나 발레코는 몰락한 고위 관리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출세가도에서 밀려난다. 그는 공산주의 관료 체제의 한가운데로 한 칸 한 칸 계급의 계단을 오르고자 애쓰는 한편, 장모인 무하데즈와 살벌한 갈등을 벌인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에는 예기치 못한 반전이 준비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 고리키에 비견할 만하다.
독사 같은 녀석, 이제 내가 죽기만을 고대하겠지. 노파는 혼자 이렇게 중얼대곤 했다. 지금 같아서는 그의 승진에 노파가 방해만 되었으니 그 이유는 명백했다. 맡은 일에서만큼은 그가 평판이 좋다는 걸 그녀도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녀만 없다면 더 높은 점수를 얻게 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자기가 죽고 나면 상속자는 그가 아닌가…… (중략) 이미 다 계산하고 있었던 게야, 교활한 놈! 그녀는 이렇게 중얼댔다. 그리고 이런 적개심을 먼저 부추긴 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고서 마치 사위를 향한 증오심을 부채질하려는 듯 어떤 확신을 품게 되었다. 처음엔 어떤 꿍꿍이셈으로 자기에게 싹싹하게 굴었지만 이제 자기 때문에 서기나 부장의 자리, 아니면 그와 비슷한 어떤 빌어먹을 직책에 오를 길이 막혀버리자 자기 앞에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거라고. 거지발싸개만도 못한 놈, 촌놈, 독사 같은 놈! 네녀석이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도 이 무하데즈를 당해내진 못할 거다! 노파는 이렇게 되씹었다. (「거만한 여자」 155쪽)
「술의 나날」
무기력하고 게으른 두 대학생은 어느 날 강의를 듣던 도중, 위대한 알바니아 시인의 시 작품 원본이 소실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원본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들에겐 어디서 어떻게 찾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절실한 의지도 없다. 그들의 머릿속은 비가 퍼붓는 음울한 날씨, 어둠침침한 술집만큼이나 흐리멍덩할 따름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한 목표를 곧 포기해버리고 물리도록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대며 하루하루를 보내다, 결국 어이없게도 교회의 약탈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도시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사회주의적 현실과 배치되는 ‘데카당트’한 글이라는 이유로 60년대 당시 출판이 금지되었던 소설이다.
"어디로 가는 거지?”
친구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우리는 한참 동안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심리 분석에 탁월했던지라, 그런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이미 모든 게 너무도 분명했다. 우리는 소실된 원본을 찾아 나선 것이었고, 그 밖의 질문은 불필요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비롯해 코냑과 우산의 나날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우리였지만 정작 어디서 어떻게 그 원본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의문을 제기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그 문제를 한 번도 숙고해보지 않았던 것은 머릿속이 낙관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술의 나날」 179쪽)
추천사와 미디어 서평
신경쇠약과 정신착란을 권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매일은 얼마나 아슬아슬한가. 『부서진 사월』을 통해 소설도 그림이나 음악처럼 사람의 영혼을 홀릴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한 이후, 내게 하나의 장르이자 ‘이상’이 된 이스마일 카다레. 처음 만난 그의 단편들이 나의 시간을 ‘신비롭게’ 들쑤셔놓았다.
- 김진규 (2007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달을 먹다』 작가)
세 편의 미크로로망(microroman)을 통해,
전후(戰後) 공산주의 체제 초기 알바니아의 단조로움과 침울함, 파라노이아를 훌륭하게 그려냈다.
- 르 피가로
이스마일 카다레
알바니아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1936년 알바니아의 남부 쥐로카스트라에서 태어났다. 알바니아 최고 명문인 티라너 대학교에서 언어학과 문학을 공부했고 모스크바의 고리키 문학연구소에서 공부했다. 고등학생이던 1953년에 이미 『서정시』라는 시집을 출간하여 일찌감치 시인으로 데뷔했고, 1963년 첫 소설 『죽은 군대의 장군』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등장으로 유럽에서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던 알바니아의 정치 상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국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 독재정권 아래서 작품의 출판이 금지되고 유배를 당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6,70년대를 거치면서 발칸 반도 대가들의 반열에 올라섰다. 죽음과 파괴의 그림자가 너울대는 비극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내용, 우스꽝스러운 비극과 기괴한 웃음의 조화로 세계적 작가의 입지를 굳혔다. 또한 2천 년간의 외세 지배와 혹독한 스탈린 식 공산 독재를 겪으며 유럽에서조차 잊힌 나라 알바니아를 역사의 망각에서 끌어낸 ‘문학대사’로 평가받는다. 2005년에는 스웨덴의 노벨상, 프랑스의 공쿠르 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불리는 영국의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했다. 호자 독재정권이 무너지기 몇 달 전인 1990년 10월, 그는 알바니아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하여 지금까지 파리에서 계속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죽은 군대의 장군』『돌에 새긴 연대기』『부서진 사월』『꿈의 궁전』『H서류』『아가멤논의 딸』『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 등이 있다.
옮긴이 이창실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 응용언어학 과정을 이수한 뒤,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불과를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 『앙드레 말로』『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프란츠 카프카의 고독』『누보 로망, 누보 시네마』『키에르케고르』『번영의 비참』『길모퉁이에서의 모험』『빈센트 반 고흐』『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 등이 있다.
* 2008년 6월 9일 발행
* ISBN 978-89-546-0574-8 03890
* 128 * 188(양장) | 232쪽 | 10,000원
* 책임편집 조현나 (031-955-8857, jelesais@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