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은 넘으라고 있는 거야.
난 내게 늘 금지되었던 것, 그게 갖고 싶었을 뿐이야.”
영화 원작으로도 유명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초콜릿』의 작가 조안 해리스의 여덟번째 장편소설 『젠틀맨 & 플레이어』가 출간된다. 이 작품은 탄탄하고 풍성한 이야기, 현실감 넘치는 매력적인 캐릭터, 치밀하고 정교한 구성, 읽는 이를 사로잡는 격조 있는 문체 등 조안 해리스 특유의 장점이 유감없이 발휘된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조안 해리스는 대학에서 중세 언어와 현대 언어를 전공하고, 12년간 영국의 명문 사립인 리즈 문법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작가 스스로 밝혔듯 그녀는 교직을 떠나온 이후 계속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했다. 한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학교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곳이며, 거기에는 기쁨도 있고 비극도 있다. 매년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고,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 이야기가 마르지 않는 곳. 학교는 작가에게 완벽한 환경이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조안 해리스의 바람은 『젠틀맨 & 플레이어』에서 그 결실을 맺었다. 교직생활을 하며 얻은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이 작품은 평단과 독자들의 호평과 함께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조안 해리스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이 책의 제목인 ‘젠틀맨 & 플레이어’는 크리켓에서 유래한 말이다. 2차대전 이전의 영국 정상급 크리켓 경기에서는 선수들을 ‘젠틀맨’과 ‘플레이어’로 구분했는데, ‘젠틀맨’은 보수 없이 경기에 참가하는 유한계급의 아마추어 선수를 일컫는 말이고, 플레이어는 보수를 받고 뛰는 직업 선수를 지칭하는 말이다. 제목이 시사하는 바처럼 이 작품은 하층계급의 아이가 부와 명예와 전통의 상징인 영국의 한 유서 깊은 사립학교에 동경과 질시를 품고 그 세계에 도전하는 이야기이다. 조안 해리스는 서스펜스라는 장르를 빌려와 사회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욕망에 대한 한 편의 멋진 심리 드라마를 완성해냈다.
플레이어, 동경과 질시의 대상이던 명문 사립학교에 도전하다!
“지난 십오 년 동안 내가 배운 게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살인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 그랬다. 살인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의미 없고 임의로 넘나들 수 있는 경계일 뿐이었다. 마치 땅 위에 그어놓은 선처럼, 세인트오즈월드 문법학교로 향하는 진입로에 보초를 서듯 우뚝 버티고 서 있는 ‘무단출입 금지’ 팻말처럼.” _본문 p.13
영국의 유서 깊은 남자 사립학교 세인트오즈월드. 아버지 존이 이 학교의 수위로 일하게 되면서 ‘나’는 이곳의 사택에 살게 된다. 어머니는 어릴 때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복권 사 모으는 게 취미이고 술을 좋아하며 배운 것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전통 있는 학교에서 수위로 일하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문밖에서 바라본 세인트오즈월드는 나에겐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곳은 ‘나니아’나 ‘오즈’처럼 신비하고 먼, 나는 결코 속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질서와 권위가 있는 곳. 부와 명예를 보장하는 곳. 세인트오즈월드에 비하면 내가 다니는 서니뱅크파크 종합학교는 한없이 초라하기만 하다. 담장에 낙서가 가득하고 무질서하며 학교 밖에는 언제나 경찰차가 대기하고 있는 곳. 게다가 나는 몸집이 작고 운동에 소질이 없는 데다 책을 좋아해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내게 선생님들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나는 대번에 그들이 나와는 다른 부류임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햇빛과 근처의 아름다운 건물들로 인해 빛나고 있었고, 보다 추상적인 어떤 것, 즉 자신감과 신비로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물론 나중에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다. 우아한 겉모습 뒤에서 타락해가는 상류층의 모습을. 그 부패해가는 모습을. 그러나 처음 세인트오즈월드를 몰래 훔쳐보았을 때 그곳은 영광과 광휘로 가득 차 나로서는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보였다. (…) 그 안에서 젊은 신들이 거닐고 뛰놀고 있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에 비하면 땅 위의 금지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허세를 부리고 간절히 원해도 그곳은 내가 넘을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나는 침입자였다. (…) 이렇게 해서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다. 세인트오즈월드는 그런 곳이다.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곳. 내 안에서 분노가 궤양처럼 일어났다. 분노, 그리고 반란이 시작되었다.” _본문 p.24
세인트오즈월드는 나에게 금지된 곳이다. 나는 이 넘을 수 없는 경계 앞에서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낀다. 그렇게 동경과 알 수 없는 분노를 키우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그 경계를 넘는다. 그리고 규칙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언제라도 깰 수 있는 것임을 깨닫는다. 나는 아버지의 열쇠를 슬쩍해 밤마다 학교를 누비고, 심지어 수업시간에 몰래 빠져 나와 세인트오즈월드 교복을 입고 이 학교 학생인 양 행세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세인트오즈월드 학생인 열네살 리언을 만난다. 리언은 이곳에서 나를 알아봐준 최초의 사람이다. 나는 리언에게 이름을 ‘줄리언 핀치벡’이라고 소개하고, 그와 함께 일탈을 즐기기 시작한다. 매력적이면서도 사악한 구석이 있는 리언은 빛과 어둠의 아이였다. 나는 그런 리언에게 우정을 넘어서는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얼마 후, 예기치 않은 사고가 일어난다. 그로부터 십오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신분을 숨긴 채 교사가 되어 여전히 자신만의 철옹성을 자랑하는 세인트오즈월드에 돌아온다.
젠틀맨, 이제는 사라져가는 세계를 지키다!
“세인트오즈월드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아침이면 들리는 이곳 특유의 소리하며, 학생들의 발이 돌계단에 부딪혀 나는 소리의 반향, 대식당에서 풍겨오는 토스트 굽는 냄새, (…) 고조부 때로 거슬러올라가는 동창들의 이름이 새겨진 우등생 명단과 전쟁기념비, 단체 사진과 세월이 흐르면서 거무스름하게 변한 그 사진 속의 자신감 넘치는 젊은 얼굴들…… 이곳은 영원에 대한 메타포다. 나는 불행한가? 내가 아는 것이라곤 무언가가 우리를 흔들어놓았다는 것, 근본부터 뒤흔들어놓았다는 것뿐이다. 대기 중에 반란의 기운이 떠돌고 있으며, 나는 그것이 팰로 사건보다 더 깊은 곳에 연원을 두고 있음을 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아직 끝나지 않았다.” _본문 p.194
세인트오즈월드의 가을 학기가 시작된다. 33년째 이 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라틴어 교사 로이 스트레이틀리. 교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그는 학생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덕망 있는 교사다. 그는 인간 심리를 제대로 꿰뚫고 있으며 뛰어난 기억력과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 스트레이틀리에게 세인트오즈월드는 삶의 전부나 다름없는 곳이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신임 교사 다섯 명이 이 학교에 부임한다. 컴퓨터 교사 미크, 지리 교사 이지, 외국어 교사 미스 데어, 영어 교사 킨, 체육 교사 라이트가 바로 그들.
학기 초의 어수선하고 왁자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학기 첫날부터 오랫동안 쓰던 자신의 사무실을 독일어학과에 넘겨주게 된 스트레이틀리는 심기가 불편하다. 게다가 아끼던 만년필을 분실하고, 출석부가 사라지는 등 유쾌하지 않은 일이 연이어 일어난다. 또 자신의 반 학생인 앤더튼풀릿이 누군가의 불순한 의도로 갑작스레 교실에서 쓰러지기까지 한다.
수위가 학생들에게 몰래 담배를 팔아온 사실이 기사화되어 학교가 시끄러워지고, 동료 교사의 불륜 스캔들이 터져 나온다. 스트레이틀리 반의 나이트가 실종되는가 하면, 이 학교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수석교사 비숍이 아이들과의 동성애 스캔들로 곤혹을 치른다.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던 세인트오즈월드라는 세계가 한순간 삐거덕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스트레이틀리는 세인트오즈월드에 떠도는 이 불안한 기운을 감지하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곳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신임 교사 중 하나가 아닐까 의심한다. 그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의 도전자로부터 목숨과도 같은 세인트오즈월드를 지켜내기 위해 분투한다.
한 치의 양보 없는 치열한 게임
그 현란하고 아찔한 이중주!
『젠틀맨 & 플레이어』의 제목과 전체적인 테마는 영국의 귀족 게임이었던 크리켓과 체스에서 가져왔다. 이야기 전개는 체스 형식을 빌려왔는데, ‘킹’은 스트레이틀리를 상징하는 말로, 그리고 ‘폰’은 또다른 주인공을 상징하는 말로 등장한다. 여기서 ‘폰’은 체스에서 가장 약한 말이지만, 체스판을 끝까지 전진한 이후에는 더 강한 말로 바뀔 수 있는 유일한 말이다. 각 장의 제목을 체스 말 이름으로 하고, 비숍, 나이트 등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을 체스 말에서 따온 것 역시 상징적이다. 작가는 이렇게 게임의 메타포를 사용해 이 소설의 범죄소설 혹은 서스펜스 소설적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작가는 서로 다른 편에 서 있는 두 명의 화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게 함으로써, 독자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편에 서지 않고 균형 잡힌 시각에서 이야기를 조망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이러한 서술 기법은 두 주인공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대립 구도를 이끌어내어 읽는 이들을 더욱 몰입하게 한다. 이곳에서 끊임없이 음모가 진행되고 살인 사건이 벌어지지만, 독자는 스트레이틀리와 마찬가지로 범인이 누구인지 끝까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조안 해리스는 이 책에서 ‘플레이어’인 주인공이 세인트오즈월드로 대표되는 ‘젠틀맨’의 세계에 대해 느끼는 복잡 미묘한 심리를 탁월한 솜씨로 그려냈다. 주인공은 두 세계 사이의 간극에 뼈아파하며 자신이 속하지 않은 ‘젠틀맨’ 세계의 고급문화와 안락함에 대해 동경과 질시를 품는다. 그리고 ‘젠틀맨’의 오만과 맹목성에 대한 경멸과 반발심을 가지고 그 세계를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이러한 왜곡된 심리를 작가는 인간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바탕으로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어떤 면에서는 사춘기 아이의 꿈과 욕망에 대한 일종의 성장소설 같은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친구에 대한 우정과 질투, 못난 아버지에 대한 절망과 애증, 자신이 스승으로 삼고 싶어했던 사람에 대한 애정과 분노 등이 강렬한 정서적 울림을 지니고 펼쳐진다. 또한 교사, 학생, 부모 등 각각의 목소리를 충실히 살리면서, 저마다의 목소리에 실린 분노, 의혹, 혼란, 그리고 절망을 절묘하게 녹여내 거대한 코러스를 만들어냈다. 앙상블이 뛰어난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하모니를 지켜보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모략과 술수가 난무하는 치열한 게임이 그 무엇보다 섹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현란한 반전의 클라이맥스, 특히나 마지막 수는 일품. _뉴욕 타임스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교묘한 구성, 책장을 다시 앞으로 넘겨보게 만드는 경이로운 반전. 의미심장한 사회적 이슈를 제기할 뿐 아니라 아주 재미있다. _시카고 트리뷴
프랑스 요리를 버리고 사립학교 스릴러로 돌아온 조안 해리스. 강렬한 클라이맥스를 지나 밝혀지는, 진정 놀라운 마지막 반전. _가디언
서스펜스 장르 속에 멋지게 엮어 넣은 ‘학교라는 소우주’ 이야기. ‘엘리트주의 vs 질시’라는 위험한 소재에서 끌어낸 낭만적이고 따뜻한 교훈. _인디펜던트
이상과 냉소주의, 평등주의와 특권의식, 원칙과 타락이 절묘하게 결합된 작품. 사악한 재미와 지속적인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독자는 첫 페이지부터 정신없이 빠져들다가 마지막엔 큰 소리로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_워싱턴 포스트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심리 서스펜스. 조안 해리스는 우리 시대의 가장 훌륭한 소설가 중 하나이다. 탄탄한 구성과 위트, 예리한 관찰력으로 최상의 기량을 선보인다. _데일리 익스프레스
밤을 꼬박 새울 예정이 아니라면, 절대 이 책을 저녁에 시작하지 마라. 놀랍도록 흥미로운 소설. _시애틀 타임스
조안 해리스는 추리문학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일궈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마치 최면에 걸리기라도 한 듯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길 것이다. _북리스트
강박증과 복수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조안 해리스는 또 한 번의 성공을 거두었다. _데일리 텔래그래프
복합적이고 잘 짜여진 미스터리 소설. 위트와 지혜, 그리고 매혹적인 문체가 빛을 바란다. _타임아웃 런던
조안 해리스 Joanne Harris
1964년 영국 요크셔에서 프랑스인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방학마다 외가인 프랑스 브르타뉴에서 지냈는데, 이 덕분에 조안 해리스는 프랑스 토속 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자랐다. 조안 해리스는 영국 케임브리지의 세인트 캐서린 칼리지에서 현대 언어와 중세 언어를 전공했다. 록밴드 가수, 허브 재배가 등으로 활동하기도 한 그녀는 명문 리즈 사립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989년 『악의 씨』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조안 해리스는 1999년 작 『초콜릿』을 발표하며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다. 『초콜릿』의 성공으로 조안 해리스는 12년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정리하고,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조안 해리스는 미각을 자극하는 요리와 와인, 향기로운 허브와 아름다운 프랑스 시골 풍경, 그리고 빛바랜 흑백의 가족 앨범 등 오감을 자극하는 모티프들을 재료로 현실감 넘치는 인물과 눈을 뗄 수 없는 구성, 생생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독특하고 격조 높은 작품들을 써왔다.
『초콜릿』 이후, 『블랙베리 와인』 『오렌지 다섯 조각』 『프랑스풍 주방』『성스러운 광대』 『지그와 릴』 등의 소설을 발표했으며, 2005년 발표한 『젠틀맨 & 플레이어』는 교사 시절을 회상하며 쓴 작품으로, 그녀는 이 작품으로 다시 한번 큰 성공을 거둔다. 이후 『롤리팝 슈즈』 『블루아이드보이』 등을 발표하며 작가로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옮긴이 박상은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소녀, 소년을 만나다』 『이카루스 소녀』 『C. S. 루이스와 함께 한 하루』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 『아빠가 선물한 여섯 아빠』 외 다수가 있다.
* 출간일: 2011년 11월 30일
* 판형 140*210 |568쪽| 값 14,500원
* ISBN: 978-89-546-1701-7 03840
* 담당편집: 해외문학 1팀 이현자(031-955-8859, raintree@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