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사계절과 구수한 사투리 속에서 펼쳐지는 ‘진짜’ 아이들 이야기
첫 단편동화집 『주병국 주방장』으로 뛰어난 입담과 심리 묘사를 자랑한 작가 정연철이 새 장편동화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
『똥배 보배』는 사람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다. 정감 어린 사투리와 토속적인 정서가 가득 담긴 이번 작품은 도시 생활에 물든 요즘 아이들에게 또 다른 재미와 감동을 안겨 줄 것이다. 이야기의 양념 역할을 하는 농촌의 생활상이나 놀잇거리들도 색다른 간접 경험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사계절의 다양한 색을 담은 배경과 그에 따른 화가 장경혜의 그림이 보는 이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 준다.
주인공 격인 보배와 경식이 이야기는 요 근래 더 심각해진 ‘왕따’ 문제와 맞닿아 있다. 작가 정연철은 어둡기만 한 왕따 소재를 특유의 재치와 톡톡 튀는 문체로 밝게 연출하고 있다. 그의 동화 속 아이들은 자연을 벗 삼아 뛰놀며 스스로 잘못을 깨우치고 성장한다. 작가가 어른의 목소리로 잔뜩 무게를 잡으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감동과 울림은 더 크게 다가온다.
철딱서니가 눈곱만큼도 없는 밉상 경식이, 어떤 상황에서도 주저앉지 않는 오뚝이 보배, 선생님 같은 말만 골라하는 애늙은이 상호, 공주병에 걸린 새침데기 은조. 각양각색의 캐릭터를 지닌 아이들이 펼치는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보배? 혹시 똥배 아이가? 똥개 할매 손녀, 똥배!
이름 대신 ‘똥배’로 불리는 보배는 심한 화상과 부모의 부재로 언니와 함께 할머니 집에 오게 된다. 동네 유일한 여자애며 얼굴도 예쁜 은조와는 정반대의 외모를 지녔지만, 경식이는 새로운 여자애의 등장에 괜히 마음이 들뜬다. 하지만 보배의 화상 입은 얼굴과 옷 밖으로 삐져나온 팬티를 본 뒤로는 어쩐지 보배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진다. 그때부터 경식이는 보배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경식이가 보배를 더 못살게 구는 이유는 은조 때문이기도 하다. 이장님 딸 은조는 콧대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남자애들을 종 부리듯 한다. 경식이는 그런 은조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보배에게 더 짓궂게 군다.
나는 건들대며 보배 뒤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똥침 한 방을 힘차게 먹였다. 약간 빗맞은 것 같았지만 은조는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만들면서 잘했다는 사인을 주었다.
보배가 오른손으로 똥꼬를 만지작거리면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뭘 봐, 가시나야!”
그래도 계속 보았다.
“죽을래?”
나는 종주먹을 들이댔다. 보배의 똥꼬를 찔렀던 손가락이 뒤늦게 조금 아파 왔다.
_본문 중에서
경식이의 노력에도 은조는 경식이에게 쌀쌀맞기만 하다. 은조의 마음에는 모범생 상호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토록 떼어 내고 싶은 보배가 경식이에게 애정 어린 마음을 표현한다. 자기의 생일 시루떡까지 미리 빼돌려 쥐여 주면서.
집 앞 골목을 꺾어 도는데 보배가 불쑥 튀어나왔다. 화를 낼 틈도 없이 보배가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통팥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시루떡이었다. 김까지 모락모락 났다. 시루떡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말도 하기 전에 군침부터 돌았다. 하지만 먹을 수 없었다.
“더럽다. 니나 마이 묵어라.”
나는 눈을 감고 소리쳤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안 넘기고 모아 둔 군침을 카악, 뱉었다. 그러고는 휙 돌아섰다. 그때 또 코끝으로 시루떡 냄새가 스쳤는데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한참 뒤에 골목 쪽을 보니, 보배는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었다. 시루떡도 그대로 손에 든 채였다._본문 중에서
봄꽃처럼 환한 웃음과 감동이 어우러진 장편동화
경식이도 아이들도 보배에게 조금의 곁을 주지 않는다. 그래도 보배는 포기라는 걸 모르고 아이들 주변을 맴돈다. 그러다가 동네 깡패들과 용감하게 맞서서 아이들을 구해 주기도 하고, 크리스마스이브 교회 행사에 참석해 열심히 퀴즈를 풀고 선물을 받아 오기도 한다. 그런 보배를 보면서 경식이는 점점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결핍 속에서도 당당하고 순수하게 살아가는 보배는 더없이 멋진 아이다. 누군가 자신을 괴롭히고 손가락질해도 미움을 품거나 혼자 웅크리지 않는다. 맞서 싸울 때는 악착같이 끝을 보고, 좋아하는 남자애와 꽃을 보면 한없이 소녀스러워진다. 이렇듯 당차고 사랑스러운 보배를 누가 미워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대화와 행동이 읽는 이의 마음을 꼬물거리게 한다. 봄꽃처럼 말간 웃음과 코끝 찡한 감동의 맛이 숨어 있는 이야기에 가슴까지 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