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진짭니다.
이 시에 등장하는 하늘과 바람과 햇살, 할머니, 외로운 아이들, 할아버지,
소, 달과 별, 그리고 강물과 살구나무들…….
나는 가난한 마을의 시인이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씁니다.”_김용택
“어이, 밥 좀 묵고 가.”
시력 30년, 국민 시인 김용택이 아이와 어른을 위해 차려 낸 빛나는 동시의 밥상
「섬진강 1」로 시작된 김용택 시인의 시력이 올해로 30년이다. 소박하고 서정적인, 예리하지만 피로하지 않은, 흥이 있고 천진한 글쓰기로 아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사랑받는 시인 김용택. ‘국민 시인’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은 그의 시에는 언제나 강이 있었다. 고향 마을과, 세월을 주름 속에 묻은 할머니와 어머니, 햇볕에 그을린 아이들이 있었다. 첫 동시집인 『콩, 너는 죽었다』 이후로 네 번째, 그리고 38년간 몸담았던 교편생활을 마감한 뒤로는 첫 동시집인 『할머니의 힘』에도 그의 시의 본향은 오롯하다. 하지만 이 동시집은 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제자와 그 제자의 자식까지 껴안으며 오랫동안 지켜온 교단을 4년 전에 내려와 아이들과 함께 어울릴 일이 적어진 그이지만 꾸준히 동시를 쓰며 내 삶의 뿌리는 아이들이구나, 내 안의 아이들을 잊지 않아서 홀로 무척 기뻐했다는 시인. 아이들과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경이 안에서 뒹굴고 놀며 그 모든 것을 언어로 담았던 시인은 아이들의 삶이 시 안에서 펄떡거려야, 현실을 읽어야 진정한 동시라고 말해 왔다. 그 신념은 이 동시집에서 더 두터워진 관록으로 발현된다.
“저는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여러 가지 사람 사는 이야기를 베껴 쓰는 사람입니다. 자연이 말해 주는 것을 받아쓰기도 하고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쓰기도 하지요. 사실이 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쓴 그의 시는 ‘사실’보다 감동적이다.
상진이
혼자 집에 온다.
하얀 길을 길게 끌고
타박타박 걸어 집에 온다.
길 끝에
머리 하얀 할머니가
꽃 핀 살구나무처럼 서 있다.
「살구꽃」 전문
우리 집은
대문이 없다.
밥 먹는 것
길에서도 다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 불러
“어이, 밥 좀 묵고 가.”
“나 밥 묵었는디.”
밥 먹었으면
그냥 가면 되지
들어와 앉아
밥 먹는다.
뚤방에 금세 고무신이
까마귀 떼다.
「밥」 전문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인데도, 그윽하고 정제된 긴장이 있다. 눈앞에 이미지가 절로 그려진다. 홀로 빈 길을 타박타박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상진이, 그런 상진이를 길가까지 마중 나온 머리 하얀 할머니, 눈이 어두워져 누에고치를 튀밥인 줄 알고 대접하는 동춘 할매, 산 아래 외딴 오두막집 할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울음 우는 소와 빈집에서 촘방대는 낙숫물, 삼 년 묵은 술값 내놓으라며 이 산 저 산 날아다니며 보채는 꾀꼬리…… 모두 실재하는 인물로, 그들이 어룽더룽 무늬를 이루며 살아간 흔적을 시인은 은근히 밟아 나가며 그 동행길에 우리를 불러들인다. 그 마을엔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구성진 옛이야기와 격언처럼 내려오는 지혜가 어우러져 흘렀고 자연의 정취와 순박한 인심이 무성했다. 그야말로 한 마을이 이 시집을 그릇 삼아 통째로 들어앉은 셈이다. 그런데, 뚤방에 신발이 까마귀 떼 모양 넘쳐 나도록, 한데 모여 밥을 먹던 동네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쓸쓸함, 외로움, 가난, 소외, 무관심 지대에 있는 사라져 가는 농촌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할머니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한때 서른다섯 가옥까지 번창했으나 이제는 열한 가구만 남은 마을, 젊은 사람들이 죄 떠난 이곳 할머니 댁에 상진이가 살러 온다. 아빠는 타지에서 일하며 전화로만 소식을 전할 뿐이다. 상진이는 학교를 마치고 오면 놀 친구가 없다. 공 몰고 이웃 마을까지 갔다 와 봤다, 한밤중 달만 휑뎅그렁하게 떠 있는 마루에 할머니와 나란히 엉덩이를 붙여 봤다, 길가에서 눈만 끔벅거리는 두꺼비 앞에 고개를 들이밀어 봤다, 백년 묵은 소나무가 송두리째 뽑혀 나간 생땅을 바라보다 하며, 눈과 귀로 주변을 체득한다. 자연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상진이는 몸으로 부딪치는 모든 것이 경이롭고 새롭다. 재미나기도 하지만 아프기도 하다. 수학여행을 떠난 날은 혼자 있을 할머니가 보고 싶고 안됐다. 시인은 그 아이의 몸을 빌려서, 개발에 등 떠밀려 궁박해지는 고향의 산천과 그곳에서 삶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과장 없는 어조로 들려주고 있다. 그 무구한 말법은 기쁨과 슬픔의 농담을 더하다가도 슬며시 눙쳐 놓기도 한다.
“대대로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고, 할머니가 가난하니 그 아들들이 가난하여, 또 손자들이 가난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금 농촌에 버려진 아이들은 우리가, 할머니가 가난했던 것보다 더 악조건 속에 놓인 것입니다. 쓸쓸함, 외로움, 가난, 소외, 무관심 지대에 있는 사라져 가는 농촌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할머니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_김용택
자연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사로운 정이 있는 “작은 마을”
거듭 읽을수록 마음에 배는 “작은 이야기”
너 외, 갓, 집, 어디냐?
필리핀.
뭐?
필리핀?
그래 필리핀.
너는?
스리랑카.
스리랑카?
그래, 스리랑카.
스리랑카가 어디야?
몰라.
(중략)
너
외, 갓, 집, 가 봤어?
아니.
너는?
나도.
나도.
「외갓집」 부분
이준관 시인은 김용택 시인을 “키가 작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데다가 구수한 사투리까지 써서 밭에 씨를 뿌리고 거두는 영락없는 농부를 닮았고 또 꾸밀 줄 모르는 소박한 말씨와 밝게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한 아이를 닮았다.”고 말한다. 그래서인가, 그의 글쓰기는 아이들의 것이 그러하듯 직관적 관찰로 현상이 담고 있는 속성을 우리에게 내보인다. 「외갓집」 역시 억지가 없고 정직하다. 외갓집이 있는 땅덩어리에 발 한번 디뎌 보지 못한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대화가 스스럼없어서 처연하다. 우리 변두리, 또 하나의 이웃이다.
대물림되는 가난과 황폐화된 자연 환경 속에서, 친구를 찾아 이웃 마을까지 갔다 별일 없이 되돌아오는 시골 아이들, 빨랫줄에 하루 종일 걸려 나부끼는 식구 없는 단출하고 낡은 옷가지를 보면서 동요했던 시인의 마음이 여기 실린 작품들을 써 내려갔을 터다. “농촌 공동체 삶의 끝에 가난이 있다는 게 놀랍고 잘 먹고 잘산다는 우리 시대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는 시인의 말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시인은 언제나 그런 그의 이웃들을 드러내 왔다. 『할머니의 힘』 속에 자리 잡은 시들은 벼랑에 내몰린 이들의 궁핍을 마주 보는 시이다. 하지만 그 아픔 속에서도 거기 살아가는 모든 것을 튼튼하게 지탱해 주는 힘, 그 힘은 바로 손자가 돌아올 자리를 살구꽃처럼 지키며 그 둘레를 환히 밝히는 할머니의 힘은 아닐까.
그의 시가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보듬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인의 마음은 할머니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두꺼비에게 “아가, 잠 오면 어서 집에 가서 자거라.”(「두꺼비·하나」_ 하고 작은 동물도 걱정해 주는 할머니의 따스한 마음은 바로 시인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런 할머니의 힘이 있기에 농촌은 결코 슬프거나 어둡지 않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_이준관
4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에는 모두 마흔네 편의 동시가 실려 있다. 요란하지 않고 따뜻하며 때론 재치 있는 이경석 화가의 그림이 편안한 호흡으로 시의 맛을 더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