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교류학자 정수일이 우리말로 처음 옮긴 중세 기행문학의 세계적 고전
14세기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회 수사 오도릭이 남긴 『동방기행』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븐 바투타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와 더불어 세계 4대 여행기로 손꼽히는 책이다. 나머지 책들에 비하여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중세 동서 문명교류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또 하나의 세계적 고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동시대에 쓰인 『동방견문록』『이븐 바투타 여행기』와는 여행의 노정이나 견문과 전문(傳聞)의 기록이 상당 부분 겹치기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는 두말할 나위 없이 높다. 물론 세계 4대 여행기라는 수식에 걸맞게 이 책은 기본적으로 걸출한 기행문학이다. 청빈하고 독실한 사제의 신분으로 장장 12년간 동방세계를 휘젓고 다닌 오도릭은 온갖 고난에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 못한 여행가이자 탐험가였다. 동방에 다녀온 서방의 많은 전도사들이 대부분 간단한 복명서(復命書)나 평범한 견문기를 남긴 데 비해 오도릭은 거로(去路)와 귀로는 물론 길고 긴 여로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한 편의 ‘여행기’로 남겨놓은 남다른 인물이었던 것이다. 『동방견문록』이나 『이븐 바투타 여행기』보다 기술이 소략하고 혼동과 오류가 적지 않은데도 이 책이 앞의 책들과 기행문학의 세계적 고전으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이미 『이븐 바투타 여행기』(창비, 2001)와 『왕오천축국전』(『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의 역주서를 쓴 문명교류학자 정수일은 이번에 오도릭의 『동방기행』을 역주함으로써, 마침내 세계 4대 여행기 가운데 3종을 우리말로 완역하는 희유의 학문적 과업을 이루어냈다(『동방견문록』은 김호동 역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사계절, 2000 참고). 한 사람의 학자가 고군분투하며 일궈낸 우리 학계와 출판계의 귀중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중세 이탈리아 수사 오도릭이 남긴 불세출의 동방여행기
이 책은 크게 역주자의 해설과 여행기 본문으로 나뉘어 있다. 해설에서는 오도릭의 동방행을 촉발한 시대적 배경, 오도릭의 생애, 『동방기행』의 구체적 내용, 여행 노정 등을 다룬다. 중세 동서 문명교류의 바탕에는 십자군원정과 몽골의 서정(西征), 제국 원(元)의 진취적인 대서방 통교 등 여러 요인으로 일어난 기독교 동전(東傳)의 파고가 있었다. 본문에서 오도릭은 기독교인으로서 동방의 여러 민족과 종교, 문화에 대한 편견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데 역주자는 해설을 통해 적절한 문명사적 해석의 토대를 마련해주고 있다. 또한 오도릭이 기술한 동방 각 지역의 인문지리, 생활풍습, 물산, 종교, 유적과 유물, 기담과 기적, 내용 전개에서의 특징 등을 일목 요연하게 정리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본문은 오도릭의 여행 노정을 기준으로 하여 모두 다섯 편으로 구성했으며, 각 편마다 관련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주석을 따로 첨부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그의 구술을 다른 사람이 받아 적은 것이듯이, 『동방기행』 또한 원본은 오도릭이 임종을 앞두고 한 지방관리의 요청에 따라 구술한 여행의 전모를 다른 수사가 라틴어로 옮겨 적은 것이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기술의 흐름이 자주 끊기고 노정의 혼동과 오류가 드러난다. 즉 본문만으로는 온전한 독서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역주자는 주석을 통해 동시대의 글인 『동방견문록』과 『이븐 바투타 여행기』, 그리고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최한기의 『지구전요地球典要』 등 우리 고전의 관련 내용까지 충분히 다루어, 독자들이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본문의 1편은 오늘날의 이란을 비롯한 서아시아, 2편은 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3편은 오도릭이 6년간 머문 중국(元), 4편은 티베트 등 중앙아시아를 다루며 5편은 종편이다. 본문에는 『동방견문록』이나 『이븐 바투타 여행기』 등 기타 여행기에서 볼 수 없는 인문지식이 다수 소개되어 당대의 역사문화상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동방박사 세 사람의 출발지를 카싼(현 이란의 카샨)이라고 못 박고 있으며, 인도양을 항해하는 쇠붙이를 쓰지 않은 배(jase)에 대해 묘사하며, 칸사이(현 중국의 항주)의 행정관리 체제인 보갑제까지 소개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난쟁이국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기도 하고 원(元)의 역참 제도의 운영방법을 상세히 소개하기도 한다.
『동방기행』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당대 동방 각 지역의 풍습과 물산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다는 점이다. 인도의 숭우(崇牛) 관행, 몽골 대칸들의 경축 행사와 그곳 여성들의 전족(纏足), 힌두교도들의 종교적 폐단, 티베트의 조장(鳥葬) 풍습 등에 대한 묘사는 그 시각이 편견에 빠진 것이긴 해도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하다. 특이하고 희귀한 식품, 동물, 농산물, 식물 등에 관한 소개도 이 책의 빠뜨릴 수 없는 매력이다. 후즈(현 이란 서남부의 아바즈)의 만나(감로밀甘露蜜), 타나의 흑사자와 비비(원숭이), 필징가, 소두구, 육두구 등 생물학 연구 등에도 귀중한 자료가 될 만한 내용이 가득하다.
오도릭의 동방행이 기본적으로 기독교 전파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인지 『동방기행』에는 유달리 종교에 관한 서술이 많다. 다만 동방의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에 대한 오도릭의 시각이 심각할 정도의 편견과 무지에 사로잡혀 있어 다소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그 밖에 노아의 방주가 얹혀 있다는 사르비사칼로(아라라트 산), 코메룸(페르세폴리스), 바벨탑, 자바의 황금궁전, 실란(스리랑카)의 아담 산 등 유적과 유물에 대한 묘사가 다채롭고, 특히 대도(북경)에 있는 대칸의 궁전에 관한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해 역사 기록을 실증하고 있다.
이 책 『동방기행』의 라틴어 원본은 소실되었으며, 역주자 정수일은 헨리 율(Sir Henry Yule)이 1866년에 옮긴 영역본 The Travels of Friar Odoric, A 14th-Century Journal of the Blessed Odoric of Pordenone, translated by Sir Henry Yule(원명은 The Eastern Parts of the World Described by Friar Odoric the Bohemian, of Friuli, in the Province of Saint Anthony),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1)을 저본으로 번역했다. 율은 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라틴어 사본을 저본으로 영역했다. 역주에서는 何高濟 譯,『鄂多立克東游錄』(中華書局, 2002)을 참고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이 책의 원본은 병상에서 임종을 앞둔 오도릭의 구술을 받아 적은 것이어서 여행 노정상의 혼동과 오류가 상당수 드러나 있다. 역주자는 치밀한 문명교류학적 고증으로 잘못된 노정을 바로잡거나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여 원문의 오류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또한 오도릭의 노정 전도와 각 편별 노정도, 마르코 폴로와 이븐 바투타의 거로와 귀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도를 수록해 독자를 이해를 돕고자 했다. 더불어 다수의 현장 사진자료를 통해 내용의 직관성을 높이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