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녀를 이웃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마녀. 마녀에게 복수를 해야지, 나는 매일 밤 다짐을 했습니다.
내가 남편을 시켜 상추를 훔쳤다면, 마녀는 상추를 빌미로 남편을 훔쳤습니다.
두더지 같은 년. 나는 소박하게도 고작 상추 몇 바구니만을 원했을 뿐인데 말이에요.
나는 이웃집 여자에게서 아기를 빼앗을 작정이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통쾌한 복수가 어디 있을까요?
_「상추, 라푼젤」 중에서
포스트모던 셰에라자드, 오현종
동화보다 발칙하고, 영화보다 기발한 아홉 가지 이야기!
『사과의 맛』은 마치 의도적으로 기획된 소설집이라도 되는 듯이, 주로 동화를, 그리고 곁들여서 대중서사와 설화들을 일상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비루한 장삼이사들의 고난담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그 속에 내장된 이데올로기들을 내파한다. (……) 오현종의 모든 주인공들이 다 알고, 21세기 초의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알듯이, ‘동화를 위한 나라는 없다’. 오현종이 전하고자 하는 최종적인 전언이 바로 이것이다. _김형중(문학평론가)
1999년 첫 작품을 선보였으니, 벌써 등단 10년차다. 그사이 첫 창작집 『세이렌』, 두 권의 장편소설 『너는 마녀야』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을 펴내며 오현종은, ‘젊은’ 이야기꾼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선보이는 두번째 창작집 『사과의 맛』에서 오현종은 새로운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상추를 좋아하는 아내의 강압에 못 이겨 옆집의 상추를 훔치다 옆집 여자와 바람이 난 남편, 복수를 위해 아이를 빼앗으려는 아내의 계략을 눈치채고 딸아이 라푼젤과 먼 곳으로 달아난 마녀(옆집 여자), 시간이 흘러 통굴리기 벨리댄스를 즐겨 추는 라푼젤에게 반한 성이 ‘왕’씨요 이름은 ‘자’인 사내녀석과, 결국 라푼젤과 왕자의 아들딸 쌍둥이를 도맡아 키우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 된 왕자의 어머니,
그리고 그 사랑의 끝은,
“엄마, 이제야 내 눈이 멀쩡해졌나봐요. 차라리 그냥 눈이 멀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머리를 짧게 자른 라푼젤은 꼴도 보기 싫어요. 인어쇼에 비하면 배꼽춤은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엄마, 바다로 떠나고 싶어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면 진짜 인어를 볼 수 있대요.”(「상추, 라푼젤」)
*
오현종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끝을 따라가다보면, (실제로 그 분량은 이백자 원고지 100매가 채 안 됨에도 불구하고) 천하루가 아니라 만하루까지도 이어질 듯한데,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상추, 라푼젤」처럼 동화와 설화, 신화, 대중서사(SF영화 등) 등과 맞닿아 있는 그의 작품의 한쪽 끝은 다시 일상과 손잡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수족관 속의 인어. 인어쇼를 공연하는 인어입니다. 커다란 수족관에서 탬버린을 흔들며 춤을 추지요. 물속에서라면 한 바퀴 두 바퀴 재주넘기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수족관을 가득 채운 물에 몸을 맡긴 채 제자리헤엄치기도 하고, 팔꿈치로 탬버린을 튕기기도 하고, 수초처럼 긴 머리칼을 요염하게 흐트러뜨리며 술 취한 손님들을 유혹하기도 하지요. 때론 흰 모형 돌고래를 안고 입맞추기도 하고요.
이곳은 해변의 밤을 밝히는 하렘, 지중해나이트입니다.
_「수족관 속에는 인어가」 중에서
나는 지중해나이트 수족관 속에서 탬버린을 흔들며 춤을 추는 인어입니다. 갓 태어난 나를 본 사람들은 다 기절을 했다지요. 부모님과 산파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우물에 나를 버렸다고 합니다. 물론 이틀 만에 이웃집 새댁의 두레박을 타고 다시 올라왔지만요. 아무도 나와는 놀아주지 않았어요. 나는 늘 혼자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호리병 하나를 주워왔어요. 그 병을 깨끗하게 씻고 마개를 열자 안에서 요괴가 나오더니 소원을 말하래요. 그 덕에 우린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답니다. 그러고 나니 나와 결혼할 사람이 나타나데요. 나는 아버지와 거래하던 큰 생선가게 막내아들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우린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남편이 단발머리 소녀를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요. 그녀는 물에 빠진 남편을 구해줬다고 해요. 고마운 마음에 저녁도 근사하게 차리고 디저트까지 대접했는데 이 소녀는 돌아갈 생각을 안 하네요. 그 다음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그렇게 한참을 머물더니 이제는 나더러 집에서 나가달래요. 나는 짧은 진스커트를 입은 소녀의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집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어요. 그때 나를 받아준 게 지중해나이트였습니다. 오늘도 나는 술에 취해 “저 인어를 찜쪄먹자”고 달려는 손님들 앞에서 탬버린을 흔들며 요염하게 춤을 추고, 하루 영업이 끝나면 남편에게 편지를 씁니다. 제발 나를 데려가달라고……
오현종의 (옛날)이야기들은 끊임없이 현실로 차원이동해서 오늘의 이야기를 낳는다. 저 라푼젤의 이야기도, 수족관 속 연못 속 인어의 이야기도, 2040년 달에 살고 있는 로봇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동화 속 그들’은 모두 오늘을 살고 있다. 배꼽춤을 추는 긴 머리 라푼젤과 할아버지 할머니를 유기하는 헨젤과 그레텔의 집(“할머니 말마따나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살 만큼 살았잖아”), 책장을 펼치며 생겨나던 수많은 물음표들은 책장을 덮으며 점점 느낌표로 변해간다. !!! 자, 새로운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된 독자들은 지금 바로 책장을 펼쳐들기를!
오현종의 모험은 동일한 자리에 열린 또다른 현실로의 차원이동이다. 그러므로 제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모험이다. 지금-여기를 재발견하기 위해 그녀는 모험을 떠난다.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 보이는 현실의 공고함은 그녀의 모험 앞에 놓인 암초이고 함정이다. 이제 그녀를 따라가면 굳이 멀리 떠나지 않고도, 일상에서 모험을 즐기는 법을 배울 수 있다. _정주아(문학평론가)
* 초판발행 | 2008년 9월 1일
* 145*210 | 304쪽
* 값 10,000원
* ISBN |978-89-546-0659-2 03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