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아올린 인생이 하시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아서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벽을 쌓고 아무도 용서하지 않았다
영화 <베티 블루>의 원작 작가가 선보이는
궤도를 이탈한 한 가족의 용서할 수 없는 이야기
『나쁜 것들』은 영화 <베티 블루>의 원작 작가로 잘 알려진 필립 지앙의 열여섯번째 장편소설이다. 자동차 사고로 가족의 일부를 잃은 한 남자의 위태로운 인생을 자조적인 목소리로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용서에 관한 이야기다. 한때 유명했지만 이제 무엇에서도 영감을 얻을 수 없는 육십대 작가와 여배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작은딸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 간의 관계가 교차되며 전개된다. 2009년 출간된 『나쁜 것들』은 같은 해 장 프뢰스티에 상을 수상했으며, 2011년 누벨바그의 거장 앙드레 테시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그들이 나의 가족이라면
이토록 비인간적인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자동차 사고로 부인과 큰딸을 잃은 육십대 작가 프랑시스. 그의 유일한 혈육인 작은딸 알리스는 사고의 충격으로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 마침내 스타 여배우로 성장했고, 몇 해 전 가정도 꾸렸다. 한때 유명한 인기 작가였던 그는 십이 년 전 그 사고 이후 영감이 바닥나 제대로 된 글 한 줄 쓰지 못하지만 별 볼 일 없는 짧은 글 몇 편과 사고 이 년 후 재혼한 능력 있는 부인 덕에 생계 걱정 없이 오로지 소설가로서의 재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작은딸 알리스의 갑작스런 실종 소식이 날아들며 그가 감추고 있던 불안과 고뇌가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일주일이 지나서 가족들은 알리스의 실종을 경찰에 알린다. 그러나 아무런 진척이 없고, 조그만 단서 하나조차 포착되지 않는다. 결국 프랑시스는 대학 동창인 여자 사립탐정을 고용하고, 알리스가 납치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전해 듣게 된다. 하나 남은 딸마저 잃게 될 위기에 놓인 프랑시스의 머릿속에는 그의 눈앞에서 불에 타 죽은 부인과 큰딸이 생생히 떠오르며 아물지 않은 상처와 묻어두었던 과거가 하나둘씩 되살아난다. 그러나 프랑시스를 더욱 외롭게 만드는 것은 알리스의 부재뿐만이 아니다. 결정적인 계기로 마약을 끊기는 했지만 여전히 무기력한 사위를 향한 분노, 생계를 책임지는 재혼한 부인에 대한 자격지심, 그리고 바깥일로 바쁜 그녀의 외도 의혹 등이 프랑시스를 더욱 괴롭힌다. 하나 남은 자식마저 영영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고통 속에서 그는 두려움과 의심에 사로잡힌 나약한 아버지, 무기력한 남편일 뿐이다.
얼마 후, 알리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자신만 몰랐던 딸의 실종에 관한 비밀이 밝혀지자 프랑시스는 배신감에 사로잡히고, 지금까지 견고하게 쌓아올렸다고 믿어왔던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허술하고 불안정한 것이었는지 절감하게 된다. 십이 년 전 부인과 큰딸을 잃은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소설 집필에 몰두했던 것처럼 그는 다시 새로운 소설에만 몰두하며 자신만의 동굴 속으로 숨어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게 일종의 엄폐호였던 소설쓰기에 집중할수록 지난날 용서받지 못한 과오들이 하나둘 그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아내와 큰딸에게 영영 용서받을 수 없게 된 한 남자, 그에게 또 커다란 상처를 남긴 작은딸, 재혼한 부인의 외도를 의심하는 남편, 주유소를 습격하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징역을 살고 나온 아들에게 헌신하기 위해 사립탐정 일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 그러나 그런 어머니를 절대 용서하지 못하는 아들…… 『나쁜 것들』 안에는 가족 간에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을 향해 분노하거나 공감하거나 냉소하거나 위로하는 것은 철저히 독자의 몫이다.
화자의 의식을 좇는 듯한 역동적인 전개
흩어진 이야기의 단편을 찾아 인물의 내면을 탐독하는 보물찾기의 과정
필립 지앙은 화자인 프랑시스를 통해 모든 사건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알리스의 갑작스런 실종에서 시작되고, 과거의 모든 일들은 프랑시스가 떠올리는 단편들에 의해 파악될 뿐이다. 한 단락에서 그다음 단락까지 일 년의 시간이 흘러 있고, 사건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철저히 화자의 의식을 좇는 듯하다. 독자는 강도 높은 집중을 통해 인물의 의식 속에서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흩어진 기억의 조각을 모아 한 편의 완전한 이야기를 파악한다. 여담과도 같았던 여러 사실들이 한 지점으로 모이며 전체의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프랑스 비평가들은 『나쁜 것들』이 매우 훌륭한 소설이며 작가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원숙한 소설이라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사건의 원인과 결말에 대한 불분명한 설명은 필립 지앙의 실수가 아니라, 작가가 의도한 이야기의 전개 방식인 것이다.
인생의 허무를 깨달은 어느 육십대 작가의 자조 섞인 목소리
그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벽, 소설쓰기
영화 <베티 블루>의 원작 소설로 잘 알려진 『37.2도 아침』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었던 한 여성과 그녀를 사랑한 남자의 광기 어린 젊음, 부조리한 세계에 타협하지 않으려 했던 순수하고 열정적인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면, 그로부터 이십오 년여가 흐르고 실제로 예순 살이 된 필립 지앙이 쓴 『나쁜 것들』에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육십대 노인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나이가 들수록 여유롭고 지혜로워지는 대신 젊은 날에는 몰랐던 근심과 고통에 매몰되어 또다른 아집 속에 살아가는 인물이다.
주인공 프랑시스는 상처투성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더욱 소설쓰기에 몰두하지만 주변 인물들과 자신의 관계를 곱씹을수록 지난날 자신이 저지른 뼈아픈 실수들을 발견해나간다. 필립 지앙이 <앵로퀴티블>과의 인터뷰를 통해 밝혔듯, 우리의 정체성,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가는 과정은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한 행동을 돌이켜보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된다. 진정한 자아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정의되고 이해될 수 있지만 프랑시스는 타인과의 관계보다는 자신의 소설과 자기 자신에게 더욱 집중해온 인물로 그려진다. 결국 그는 자신의 왜곡된 프리즘을 통해 주변 인물들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더욱 자기중심적인 인물이 되고, 자신만의 자의식에 갇혀버린다.
그러나 철저하게 자신만의 동굴 안에서, 외로움이 빚어낸 아집과 그 아집이 만들어내는 외로움, 꼬리를 물고 끝없이 순환하는 그 절망적인 고리를 끊지 못하고 살아가는 프랑시스는 이 소설 안에서 자조적인 목소리를 유지한다. 자신의 잘못과 인생의 허무를 깨달은 인간의 자조적인 목소리 때문에 우리는 철저히 이기적이었던 프랑시스라는 인물을 연민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 속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인의 고통과 관련해서는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들에게 초래한 피해 상황을 확인한 후에야 놀라서 얼이 빠지고 기겁을 한다. 길거리 싸움판에서 멋모르고 휘두른 주먹 한 방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일처럼. (108쪽)
우리 자식들은 우리에게 애를 먹이고 있었다. 분명히 인정해야만 했다.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그런 운명에서 벗어난 부모는 드물었다. (133쪽)
나는 내 주위에 성벽을 쌓아올리기 위해 다시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소설을 쓰는 작업에는 그 외의 모든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 정도로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이점이었다. 나는 그런 경험이 잦았다. 마지막 소설들을 쓸 때 그 집필 작업은 내게 일종의 엄폐호였다. 그리고 정황상 지금은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소설의 그러한 힘에 다시 의지해야 할 때인 것 같았다. 나의 소설들은 나를 꽁꽁 둘러싼 숲, 나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숲이었다. (140-141쪽)
어떤 문장을 쓰면서는 이를 너무 세게 악무는 바람에 방 안이 휘청대며 윙윙거리기 시작할 때도 있었다. 헤밍웨이도 그런 얘기를 했었다. 초목은 저 혼자 푸르러지는 게 아니었다. 창밖의 풍경은 마술로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152쪽)
현재의 상황에서 소설을 쓰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으로 가장 실행 가능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생각은 더욱더 굳어졌다. 그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것 말고는 달리 구원의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153쪽)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에 대해 하늘을 저주해야 했을까? 아니면 우리에게 남겨준 것에 감사해야 했을까? (189쪽)
이 작품에 대하여
사람들 간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매일을 살며 내려야 하는 도덕적 선택에 관한 글을 쓰는 데 있어 필립 지앙은 프랑스 작가 중 단연 독보적이다. 보그
간혹 끝까지 읽지 않아도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소설이 있다. 세대 간의 갈등을 가감 없이 그려낸 『나쁜 것들』이 처연히 그러하다. 리베라시옹
『나쁜 것들』은 매력적인 염세주의자에 관한 보고다. 단 일 초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풍자 가득하고 완벽한 소설. 르 푸앙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한 섬세한 탐구, 더이상 소설로 돈을 벌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한 한 작가, 한 남성의 이야기. 아이러니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어둡고 흥미진진한 소설. 텔레라마
건조하고 굽이치는 문장, 오해, 절망, 리듬감과 에너지 넘치는 문장. 프랑스에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는 필립 지앙이 유일하다. 마담 피가로
완벽한 이기주의에 빠진 한 작가가 영감을 되찾는 과정, 문학이 한 작가의 삶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방식에 대한 고찰. 리브르 엡도
완고한 작가의 무례한 불협화음이 신기하게도 조화를 이루면서 가슴을 파고든다. 그 힘은 무엇보다도 삶과 자기 자신에 대한 가차 없는 자조에 있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에서
옮긴이 윤미연
부산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캉 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르 클레지오의 『허기의 간주곡』을 비롯하여 『어느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의 죽음』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 『우리는 함께 늙어갈 것이다』 『마지막 숨결』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구해줘』 『괜찮나요, 당신?』 『라가―보이지 않는 대륙에 가까이 다가가기』 등 다수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