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식 인테리어가 유행이다. 화려한 색채를 뽐내면서도 정갈함을 유지하는 북유럽 스타일은 사실 오래전부터 중부유럽과 남부유럽에서 먼저 인기를 끌었다. 살림의 여왕들은 모두 북유럽에 있었다. 네덜란드 풍속화에 종종 등장하는 집안을 청소하거나, 그릇에 윤을 내거나, 바느질을 하는 여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익히 그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다.
이 책의 시선은 바로 이런 지점이다. 베르메르의 그림을 통해, 기존의 미술사학자나 미학자들이 이야기한 대로, 숭고한 미와 빛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살림의 여왕 혹은 지나칠 정도로 청결에 집착했던 네덜란드 주부들의 모습을 본다.
어쩌면 우리가 그림을 보는 방식은 그림에서 아주 순수하게 시각적인 경험만을 이야기하던 미국의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식의 감상법이 변주된 형태였을 것이다. 현대 이전의 그림은, 그 시대의 상징과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림이 그려지던 시대의 상징물을 해석하고, 그 시대의 역사를 알기 위해 미시사의 대가였던 역사학자와 풍속학자, 인류학자들의 책을 인용한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간다.
지은이 베아트리스 퐁타넬은 시인이자 도상학자이지만, 주부이기도 하다. 한 개인이 가진 특성은, 그림을 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다. 지은이는 도상학자의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자신만의 시각을 마음껏 펼쳐놓는다.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는 지은이는 그림 속 여자들에 공감한다. 그림 속 여성들은 남성화가들의 눈에 포착되어 그려진 수동적인 모델이 아니라, 당대에 가장 유행하던 옷을 입고, 또 처음 접하는 물건들과 조우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몸짓을 선보인 인생 선배인 것이다.
그림 속 인물이 이토록 생생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이 책에 소개된 그림은 모두 잘 알려진 명화들이다. 그런데, 지은이가 불러낸 그림 속 여성들과 물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어느새 밤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다.
난방이 형편없었던 중세 시대, 찬 기운이 가득한 방 안에서 막 일어난 부인에게 빨간 양말을 건네는 남편의 모습이 그려진 채색삽화를 보면 그 시대가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진다.(12페이지 그림) 전혀 흥미롭지 않았던 중세시대 채색삽화가 사랑스럽다. 또 랭부르 형제의 그 유명한 호화로운 기도서의 2월 그림(36페이지 그림)에는 추운 겨울 속옷을 입지 않은 중세인이 등장한다. 당시의 어느 한 순간이 어제 일인듯 생생하게 전해진다.
100와트 조명등 아래에서의 삶이 당연한 우리는 가끔, 분위기를 위해서 초를 켠다. 하지만 초는 전기가 발명되기 이전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조명기구였다. 바로크 시대 미술이 보여주는 극적인 장면묘사는 당시 조명기구가 드라마틱한 상황을 연출하는 ´초´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옥수수를 찌면서도, 바느질을 하면서도, 물을 끓이면서도, 샤워를 하면서도,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살림살이가 겪어온 이야기를 떠올리며 미소 짓게 될 것이다.
명화가 다시 보인다
명화는 당시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언자이다. 이에 지은이는 네덜란드 풍경화에서 수도관의 모양새를 읽어내고, 여인들이 마당에서 일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19세기 프티 브르주아의 거실 풍경을 묘사한 그림에서, 벽난로 위에 장식된 그림의 종류와 살림살이들을 살핀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이 역사적 고증물로서만 소개되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의 미덕은 그림을 새롭게 감상하게 하는 데에도 있다. 그림마다 친절하게 붙어 있는 캡션에는 화가의 개인사와 그림에 대한 감상이 함께 적혀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던 명화는 좀 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그동안 명화가 배워야 할 교양의 대상이고, 화가 개인의 창조성이 반영된 작품으로만 읽어왔다면, 이제 이 책을 통해 누구나 쉽고 편하게 평범한 의문을 던져도 좋을 것이다.
“이 그림 속 여자는 왜 이런 포즈로 앉아 있는 걸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무도 던지지 않았던 당연한 질문에는 언제나 역사적인 진실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누구든 명화에, 질문을 던져도 된다. 명화 감상은 그 질문에서도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