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에 있는 수많은 박물관에 대한 명성은 너무도 귀에 익숙하다. 가장 인기 있는 항공우주박물관에서부터 저주받은 호프 다이아몬드가 있는 자연사박물관, 동양의 아름다움을 모아놓은 프리어갤러리, 여기에 명화의 보고라 할 국립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인류와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은 인류의 무수한 이야기와 역사가 잠들어 있는 보물창고다. 이중에 세계적 규모의 종합박물관 스미스소니언은 소설 『영원의 숲』을 이야기하는 데 빠트릴 수 없는 ‘현실의 모델’ 같은 존재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어쩌면 새로이 발견한 행성에 별만큼이나 아름다운 것들을 가득 전시해놓고 우주를 여행하다 짬을 내 다양한 공연과 전시를 둘러보고,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한데 뛰어노는 평화로운 동물원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매혹적이고 강렬하고 가슴 뛰는 상상에서부터 출발한다.
“꿈이 사라졌다고요? 그렇지 않아요.”
『영원의 숲』은 미래의 박물관에서 예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그려낸 매혹적인 SF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규모를 능가하는 근미래의 행성박물관 ‘아프로디테’에는 뇌외과 시술을 받고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직접 접속하는 학예원들이 상주하고 있다. 이들은 무기물과 생물, 유형과 무형을 가리지 않고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수집해서 가치를 판단하고, 탐구하고, 보존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무명 음악가가 그린 그림에서 꿈결 같은 음악을 듣는 뇌신경과 환자들이 등장하는 단편 「천상의 음악을 듣다」에서부터 유명 피아니스트의 은퇴 무대에서 아름다운 선율에 실려 외계 행성의 암수 식물이 맺어지는 경이로운 이야기가 그려지는 마지막 연작 「러브 송」까지 세상의 ‘아름다움’을 수집하는 학예원들 앞에 수수께끼 같은 예술과 인간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지적 흥미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설정,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 뭉클한 드라마, 예술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등 색다른 소재로 읽는 이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이 소설은 추리소설로서의 뛰어난 완성도를 인정받아 제5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SF팬클럽회의가 주관하는 그해 최고의 SF에 주어지는 세이운상 수상, SF베스트 1위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세상의 예술을 탐색하는 자들
지적이고 경쾌하고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미스터리
소설의 무대는 ‘아프로디테’라는 이름의 행성박물관이다. 지구에서 약 38만 킬로미터 떨어진 상공에 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만 한 표면적을 가진 소행성 전체가 박물관이다. 이곳에는 그리스 조각과 명화, 모던아트는 물론이고 우주 식민시대에 제작된 회화와 공예품 같은 미래 유물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온갖 창조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극장에서는 음악·연극·무용 공연이 끝없이 이어지고, 대규모의 동식물원에서는 다양한 동식물과 바이러스가 유사 환경에서 육성된다. 루브르는 물론이고 스미스소니언 박물관마저 넘어서는 이 특별한 박물관은 음악·무대·문예 부문(뮤즈), 회화·공예 부문(아테나), 동식물 부문(데메테르)으로 나뉘어 운영되는데, 주인공 다시로 다카히로는 이 세 부서를 종합 관할하는 아폴론에 소속되어 박물관에 반입된 작품을 적임 부서에 할당하고 부서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그를 비롯해 뇌 속에 인공지능장치를 연결한 학예원들이 첨단과학기술을 동원해 작품의 유래와 가치를 해명해나간다는 이야기가 이 연작미스터리의 골격이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처럼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한 예술은 이론으로 무장하고 뜯어볼수록, 돋보기를 들이대고 탐구할수록 자꾸만 멀리 달아나는 것만 같다. 종횡무진의 검색 능력을 가진 박물관 컴퓨터의 힘을 빌려도 속 시원히 해결할 수 없는 난제들이 속출한다. 학예원들은 기법·재료·역사 등 다방면에서 대상물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방대한 데이터에서 유형 패턴을 추출해 작자의 의도와 작품의 효과를 규명하려고 노력하지만 해결은 쉽지 않다. 예술에 대한 감정은 기교·형태·조화 같은 눈에 보이는 인상을 통해서만 환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감각에 맞서기 위해 아름다움의 대변자이자 안내인인 학예원과 인공지능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술이란 그냥 자기 좋을 대로 느끼면 그만일까? 분석하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저 헛된 허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이 연작 전편을 통해 던져지는 질문이다.
“오늘도 나는 졸작과 궁극의 아름다움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어” (31쪽)
독설로 유명한 미술평론가가 “천상의 음악이 들린다”고 격찬한 볼품없는 그림을 두고 박물관이 명화 판정에 나선다. 뇌신경 장애를 앓던 한 무명 음악가가 죽기 전에 그렸다는 이 그림은 물감을 처덕처덕 바른 졸작에 불과해 보이지만, 병동의 환자 수십 명이 그 그림에서 음악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어설픈 미학체계에 세뇌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순수한 영원을 뒤흔드는 것”을 찾기 위해 학예원들은 진땀을 흘린다.(「천상의 음악을 듣다」).
노부부가 벼룩시장에서 사들인 낡은 인형의 표정에 담긴 비밀을 다룬 이야기 「이 아이는 누구?」는 물건을 만드는 자의 애절한 마음과 사연이 깃든 수작이다. 죽은 자의 뼈를 연구하는 학자 부부는 어느 날 자신들에게 온 사내아이 인형에게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인형의 사연을 조사해달라고 아프로디테에 의뢰한다. 양산된 제품인 듯 보였던 그 인형에 입혀진 옷이 사실은 살아 있는 아이가 입었던 것임이 드러나면서 모두를 놀라게 한 가슴 아픈 사연이 드러난다.
이 밖에도 아프로디테의 학예원들은 까다로운 천재 무용가의 은퇴 무대를 연출하면서 구도자의 마음으로 신에게 춤사위를 바쳤던 한 여인의 생애 마지막 춤을 숨죽여 감상하게 되고(「꿈을 보여주는 사람」), 유전자결합 변형기술로 제작된 생체시계가 전시와 동시에 파손되는 소동을 겪으면서 오래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완성해보려 했던 어느 과학자의 애달픈 소망에 전율하게 되며(「영원의 숲」), 소행성대에서 발견된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과 정체불명의 꽃씨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경이로운 생명현상을 지켜보게 된다(「러브 송」).
☆ 추천사
기분 좋은 상상력과 공감 가는 캐릭터, 멋진 이야기가 있는 소설._대니얼 키스(『앨저넌에게 꽃을』의 저자)
세계는 SF, 제재는 예술, 수법은 미스터리. 장르의 벽을 넘어 강렬한 울림을 준다._미우라 미이(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