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을 놓아버리려 전 재산을 모두 처분한 남자, 이리
세상과 담 쌓은 채 인생에 사랑은 없다고 믿는 여자, 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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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처음 만나, 한 달 만에 먼 길 떠난 이야기
“우리 같이 여행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요.”
그녀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나다
생에 난파 당해 제주까지 떠밀려 온 그와
띄엄띄엄 방학인생을 사는 그녀의 가슴 뛰는 시작
살다보면 한 번쯤 멈춰서는 순간이 있다. 내다보면 눈앞의 미래가 아득하고 돌아보면 지나온 과거가 까마득하다. 어디로 가야할지 제자리걸음만 하다 발밑을 보면 닳고 닳은 신발 앞코가 보인다. 그쯤 되면 생각하게 된다. 무얼 하며 걸어왔나. 다음에 이런 생각이 든다. 자, 이제 어떡하지. 지리멸렬한 생을 놓아버릴 것인가, 그럼에도 살아갈 것인가.
남자는 세상과 벽을 쌓고 미래로 나아가기 싫었고 여자는 과거를 돌아보기 싫었다. 제 꼬리를 끊는 도마뱀처럼 시간을 끊으며 살아온 두 사람이 여행을 떠났다. 둘은 오래된 연인도 아니고 그저 만난 지 한 달 된 젊은 남녀일 뿐이었다.
『사랑 앞에 놓을 수 있는 것』은 이렇듯 모든 걸 내려놓고 세상마저 등지려 떠나온 남자와 세상과 벽을 쌓고 도망치듯 떠나온 여자가 우연히, 길 위에서 만나 떠난 여행을 묶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이리와서네’는 신정일(이리)와 김선혜(서네)가 만나, 이제 고유명사로 굳어진 그들의 새 이름이다.
그와 만난 지는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고 나는 그런 그와 내가 정말 하고 싶어하지 않는 두 가지―다른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 그것도 꽤 긴 기간 동안 거의 종일을 더구나 눈에 띌 만큼 큰 카메라를 가지고―를 시작하려는 중이었다. 겨울이었고, 새해였고, 나는 며칠 후면 만으로 서른이 될 것이었다.
_ 본문 [여행 전야-서네] 중에서 (8쪽)
툴툴 몇 마디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순순히 내어주는 그녀의 목에 무거운 카메라를 걸어주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말을 차마 할 수 없어 홀로 삼켜야 할지, 앞으로 얼마나 더 무거운 짐을 그녀에게 지우게 될지, 착찹함으로 가슴 한 켠이 메어왔다.
_ 본문 [모자란 출발-이리] 중에서 (11쪽)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여자와 남자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교차한다. 서네가 한 번 말하면 이리가 한 번 말한다. 그동안 독자들은 『그 남자 그 여자』『냉정과 열정 사이』 등을 통해 남녀관계의 수많은 교차점을 찾아왔고 알 수 없는 연인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 책 또한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한 여행기임과 동시에 함께하기 위한 노력 즉, 교차점 찾기의 하나이다. 두 사람은 길을 통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 닮아가고 사랑한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만큼 정서적 교감을 찾는 방법도 서툴기만 하다.
일일이 설명하고 불평하기엔 너무나 애매하고 미묘한 차이
이대로 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까?
‘새벽, 추위 때문에 잠에서 깼다’라는 문장으로 여행은 시작된다. 그래서 이야기의 처음도 춥다. 델리에서 바라나시로 이동하지만 그들은 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안개 때문에 추위 때문에 그리고 당신 탓에. 서로의 행동에 앙금이 생겨도 말하지 못한다. 순간순간 솟아오르는 감정은 그저 눌러 삼킬 뿐이다.
겨우 화해하고 내려와 그림을 파는 한 청년을 보고 자신의 우울한 마음을 닮은 그림을 고르는 여자와, 자기라면 가장 사고 싶지 않은 그림을 골랐다고 생각하는 남자. 식당에서 시원한 물이 마시고 싶어 물을 시킨 여자와, 물은 있지 않느냐고 묻는 남자. 입맛이 없어 아침을 먹지 않는 여자와, 아무 말 없이 혼자 빵을 먹는 남자. 모든 걸 자신이 결정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여자와, 그녀의 결정을 무조건 따르고 싶었던 남자. 넘치는 배려와 모자란 이해 속에서 둘은 시도 때도 없이 삐걱대고 간격은 좁혀질 줄을 모른다.
집 한 채와 나무 몇 그루, 그리고 구부정한 염소의 실루엣이 파랗게 채색되어 있는 손바닥만한 사이즈의 소박한 수채화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썩 잘 그린 그림도, 품을 많이 들인 그림도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를 집어삼키는 차가운 푸른 안개와 가슴을 짓누르는 우울함이 그 안에 있어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_ 본문 [불안은 안개처럼-서네] 중에서 (88쪽)
나였다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그 수많은 그림 중에 가장 사고 싶지 않은 그림을 그녀는 골랐다. 어쩌면 그 그림처럼, 수많은 남자 중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를 그녀는 선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_ 본문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리] 중에서 (91쪽)
제주에서 시작된 걸음은 인도로, 네팔로, 라오스로 이어진다. 출발 전 저만치 벌어져 있던 마음의 거리는 나라를 옮기면서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고 다시 가까워진다.
우리는 ‘나’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나’로 서술되는 일인칭의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타인의 마음을 백 퍼센트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의 삶처럼 이 여행기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일인칭이고 두 사람이 자기 이야기만 한다. 그럼에도 평행선 같던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좁혀지고 책이 끝날 때에는 둘을 가로지르는 교차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일단 그가 내민 그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마셨다. 매웠다. 코끝이 찡해질 만큼 매워 괜히 한마디를 던졌다.
“설탕 안 넣었어요?”
생강차를 마시는 내 모습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고맙고도 무거웠다.
_ 본문 [생강차의 향-서네] 중에서 (124쪽)
처음 끓여보는 생강차이니 생강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도 몰라 아무리 맛을 보아도 그것이 매운 것인지 적당한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끓여간 생강차는 다행히 그녀의 속에 받는 듯했다. 며칠간 방 안에만 누워 있던 그녀의 퀭한 눈이 나를 깊게 응시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시렸다.
_ 본문 [나의 몫-이리] 중에서 (126쪽)
안나푸르나를 오르기 전 서네의 열병으로 끝나버리는 듯했으나 멈추려는 순간 씻은 듯 나은 열병처럼 그들의 관계도 조금씩 나아진다. 그들은 다시 여행한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설산 안나푸르나를 오르며, 닿으면 깨질 듯 날서 있던 감정도 한풀 꺾인다. 서로 손을 잡고 산을 내려오는 두 사람의 마음은 견고해져 있다.
아무리 좋은 곳에서 멋진 것을 볼 때에도 내 시선은 항상 그녀를 향해 있었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장소와 순간들이 내게 의미 있는 이유는 그녀가 거기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 모든 순간과 풍경은 그녀의 것과 마찬가지였다. 산을 오를 때에도, 해가 지는 동안에도 쉼 없이 그녀의 모습을 사진에 담은 건 그 때문이었다.
_ 본문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순간-이리] 중에서 (174쪽)
놀라운 풍경과 믿을 수 없는 시간이 우리를 압도할 때마다 내가 원했던 건 우리가 그 순간을 함께하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 두 사람이 그 작은 기적의 순간을 만들어낸 듯 손잡은 그와 서로의 눈을 깊이 응시하며 가만히 그 풍경 속으로 녹아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내 바람을 알 리 없는 그는 번번이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댔다.
_ 본문 [두 사람이 있는 풍경-서네] 중에서 (175쪽)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처럼 추운 나라에서 따뜻한 나라로 간 그들의 마음에도 봄이 온다. 라오스의 방비엥에서 시간을 보내며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이해한다. 그리고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한가로운 그들의 시간을 따라가다보면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가 하나가 되어 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연애처럼 따로 떨어져서 있을 수 없는 하나의 이야기. 질문하며 시작된 여행에 답이 자리를 찾으면,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마음이 닿는 건 이리도 어렵지만, 결국 사랑은 하나다
돌아온 서울 하늘은 흐리다. 도시의 사람들은 불안한 표정이다. 그들 또한 평온한 나날들이 지나갔으므로 다시 현실에 부닥쳐야 한다. 그래도 아득한 것만 같던 미래가 조금은 선명해졌다. 여자는 걸어갈 길의 이름을 생각하고 남자는 이야기가 시작된 장소로 돌아가 여자를 기다린다. 걸어온 길만큼 과거는 아득해져 있다.
하나하나 기록하며 돌아가면 무엇을 할까, 계획하지 않았어도 이미 여행을 거치며 둘의 마음에는 수많은 그림이 그려졌을 것이다. 여행이란 떠남과 동시에 돌아옴을 내포한다. 질문을 가지고 떠난 여행은 어떤 방식으로든 답을 준다. 심지어 ‘정답없음’이라는 답이라도 남긴다.
내게는 우리가 할 수 있을지를 머릿속으로 재느라 의미 없는 조각들만 손에 쥔 채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눈앞의 작은 조각 하나부터 이리 돌리고 저리 끼우며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다보면 이 모자이크도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_ 본문 [모자이크-이리] 중에서 (302쪽)
많은 날들이 지나고 나서도 함께라면 우리는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견디기 힘든 것은 언제나 지금이었다. 너무나 다른 그와 내가 바라는 삶의 모습은 닮아 있었기에, 어쨌든 계속 함께할 수만 있다면 남은 건 좋아지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그와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_ 본문 [우리의 미래-서네] 중에서 (303쪽)
우리가 사랑 앞에 놓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보다 우리는, 진짜 사랑을 하고 있는 걸까. 결혼정보업체에서 공개한 1등 신랑감, 1등 신부감 후보가 절대적인 기준인 양 돌아다니고 손해보지 않는 사랑에 골머리 앓는다. ‘어장 관리’나 ‘밀고 당기기’를 버릇처럼 하고 더 편하게 살기 위해, 잘살기 위해 사랑한다. 심지어 ‘사랑 따위 필요없다’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그게 ‘현명하다’한다. 미련하게 사랑하면 정말 ‘바보’가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사랑 앞에 많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놓고 있는 건 아닐까?
서로 함께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떠난 이리와서네는 사랑 앞에 아무것도 둘 수 없다는 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현재 제주에서 카페 ‘이리와서네’를 운영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더 많은 일을 찾고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쉽고도 어렵다. 마음 없이는 수천 번도 말할 수 있지만 마음이 넘치면 말 한마디 꺼내기도 힘들다. 여행을 떠나며 서로의 마음에 닿아가는 한 연인의 이야기를 통해, 감정이 소실되어 냉소만이 가득한 시대에 참사랑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건 어떨까. 그들의 여행처럼 마음이 닿는 건 이리도 어렵다. 그러나 결국 사랑은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