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정주하지 않은 국외자 크라카우어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소설가, 저널리스트였던 전방위 지식인 크라카우어는 188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철학과 사회학에 심취했으나 정작 박사학위는 건축학으로 받았고, 1920년까지 건축가로 활동했다. 1차대전 말, 당시 십대이던 아도르노를 데리고 철학 강독을 했다. 아도르노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강독하던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이 시간에 대학 선생들에게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의 인도에 따라, 처음부터 나는 이 저서를 단순한 인식론으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타당한 판단의 조건을 분석한 책으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정신의 역사적 상태를 해독할 수 있는 일종의 암호로 경험했다.”
크라카우어는 1920년대 독일의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에서 영화와 문학 등을 소개하는 문예면을 혁신하며 명성을 떨쳤다. 이 시기에 벤야민, 에른스트 블로흐, 레오 뢰벤탈 등 당대의 지성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한다.
현대의 문화와 일상생활을 탐구하던 크라카우어는 1920년대 초 『탐정소설』을 발표하고, 이어 사진, 영화, 광고, 춤, 여행, 도시 등을 폭넓게 분석한 『대중의 장식』(1927), 익명으로 발표한 자전적 소설 『긴스터』(1928)를 출간했다. 군대와 애국주의와 전쟁에서 도망치려고 고군분투하는 희극적 인물이 작가의 분신처럼 등장하는 『긴스터』는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등의 호평을 받았고, 소설가 요제프 로트는 주인공 긴스터를 “문학의 채플린”이라 평했다. 1930년에는 새로 형성된 사무직 노동자 계급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사회학 연구서 『사무직 노동자』를 펴냈다. 이 책을 접한 벤야민은 크라카우어를 자본주의의 흥을 깨는 ‘소란꾼’에 끼워넣었다.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파리로 이주한 크라카우어는 8년간 그곳에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잠시 수용소에 갇히기도 하는 등 힘겨운 세월을 보낸다. 스페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 크라카우어는 1940년 마르세유에서 벤야민과 재회하기도 했다. 그해 9월, 벤야민은 스페인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친다. 가까스로 미국에 망명한 크라카우어는 아도르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파리에서 보낸 8년간은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네. 늙었어. 마음까지도. 이제 마지막 처소, 마지막 기회네. 이 기회를 잘못 다루었다가는 끝장이지.”
미국에서 뉴욕현대미술관 등의 지원을 받아 영화 연구에 매진한 크라카우어는 1947년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독일 영화의 심리사』를 펴냈다. 독일 대중의 심리가 바이마르 시대에서 히틀러 시대로 가면서 어떻게 조금씩 타락하는지를 흥행영화들을 통해 분석하는 영화비평서 겸 대중문화사였다. 미국 반공 진영에서는 이 책을 좌파적이라고 비난했고 독일 학계에서는 ‘난민의 복수’라고 규탄했지만, 이 책은 현대 영화 비평의 기반을 닦은 명저로 평가된다.
1960년 크라카우어는 영화 연구의 기념비적 저서인 『영화 이론-물리적 현실의 구원』을 출간했다. 이 책은 영화라는 매체의 형식적 특징들이 어떤 의미에서 ‘현실’의 ‘구원’에 유리한가를 논한 저서로서, 역시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분명한 사실은 이 책을 계기로 영화 이론의 판도가 바뀌어버렸다는 점이다.
버클리 대학 역사학과 교수 마틴 제이는 이렇게 잘라 말한다. “크라카우어는 이 두 책을 통해 일류 영화이론가로 자리매김했다. 이 두 책은 오늘날까지도 영화 연구 커리큘럼의 시금석이 되고 있다.”
만년에 자신의 사상을 온축한 역사에 대한 책을 준비하던 크라가우어는 1966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유고는 친구이자 저명한 역사가인 폴 오스카 크리스텔러가 정리하여 1969년 출간되었다. 그것이 크라카우어의 마지막 책 『역사』이다. 사회학자 니콜 라피에르는 크라카우어의 생애와 『역사』라는 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933년 독일에서 크라카우어의 책들은 모두 불태워졌다. 그때 크라카우어는 이미 베를린을 떠나 프랑스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다. 그는 음울한 호텔 방에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산책자는 망명자가 되었고, 그의 삶과 자유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게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1941년에 미국으로 다시 망명하면서 마침내 비교적 안정된 삶을 얻고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를 출간하면서 약간의 유명세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면에서 여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크라카우어는 사진과 영화를 연구하면서 영감을 얻어 저술한 『역사』라는 저서에서 역사가를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계로 인도되는 이방인에 비유한다.(니콜 라피에르, 『다른 곳을 사유하자』)
크라카우어는 어디에도 정주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국외자였다. 사회학과 철학 분야에서 여러 의미 있는 저술을 발표했지만 학계와는 거리가 있었고, 소설을 써서 호평을 받았지만 익명으로 출판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기자로서 명성을 쌓았지만 기자로 불리기를 싫어했고,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 친구들과 오랫동안 교류했지만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엮여 정리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름 없는 존재들의 복권, 『역사』
크라카우어는 1966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화 이론』 출간 6년 뒤였다. 생애 마지막 6년 동안 70대의 노학자는 마지막으로 ‘역사’라는 주제에 매달렸다. 『역사―끝에서 두번째 세계』는 유고로 남았지만 이미 상당 부분 완성돼 있었다. 크라카우어는 이 책을 자신의 마지막 주저로 여겼다.
『역사』는 크라카우어 사유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인간 크라카우어와 사상가 크라카우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전까지 크라카우어는 역사를 본격적으로 논한 적이 없지만, 이 책은 사유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그간의 사유 여정을 아우르는 포괄적 성격을 가진다. 저자가 「서론」에서 밝힌 이 책의 집필 의도는 다음과 같다.
최근 나는 역사에 대한 나의 관심이 실은 내가 『영화 이론』에서 펼쳐본 생각들에서 나왔음을 돌연 깨달았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는 그 책에서 나타난 방향을 따르고 있었다. ……내가 역사에 빠지게 된 진짜 이유가, 역사가 나의 오랜 관심사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가 내가 생각해온 것을 훨씬 넓은 지평에 적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역사와 사진 사이, 역사적 현실과 카메라–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유사점을 일순간에 깨달은 것이다.(19쪽)
역사와 사진(영화)의 유비관계에 대해서는 2장 ‘리얼리즘 충동’과 ‘조형 충동’에 대한 논의에서 상세히 다뤄진다.
크라카우어에게 역사는, “대체로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는 사유를 가지고 대체로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는 현실을 다루는” 학문이다.(20쪽) 그렇기에 그가 관심을 가지는 시대는, 시대로 구분될 수 없는 시대, 시대가 되기 전의 시대이다. 예를 들면, 그는 “기독교가 그리스-로마 세계에 최종 정착하기 직전의 시대, 종교개혁 직전의 시대, 공산주의 운동 직전의 시대”(23쪽)에 매력을 느낀다. 그런 시대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 시대의 메시지가 “상충하는 대의들 가운데 어느 것도 최종적 쟁점의 최종적 결론이 아닐 가능성, 우리로 하여금 대의 없이 사유하고 생활할 수 있게 해줄 사유방식 및 생활방식이 있을 가능성”(24쪽)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가 역사에 빠진 이유는 역사가 대의니, 이념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안개를 뚫고 생활 그 자체, 인본 그 자체와 만나게 해주는 영역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