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가 말하는 사랑
숨 막히는 미스터리와 아찔한 에로티시즘의 조화
초현실적 분위기 속에 펼쳐지는 세밀한 수사, 평범한 연인들이 뿜어내는 나른한 에로티시즘,
카다레가 선사하는 기이한 스타일로의 여행은 잊을 수 없는 비극적 순간을 경험하게 해준다.
_퍼블리셔스 위클리
공항으로 향하던 택시 한 대가 갑작스럽게 도로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뒷좌석에 탑승했던 한 쌍의 알바니아인 남녀가 사망하고, 택시 기사는 혼수상태에 빠진다. 사고 경위에 대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은 운전기사는 단지 백미러에 비친 광경에 주의를 잃었던 것 같다는 진술을 할 뿐이다. 운전기사의 눈을 멀게 할 만큼 충격적인, 두 연인을 죽음으로 이끈 백미러 속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사건의 비밀을 풀기 위해 수사에 나선 정체 모를 조사원이 사고의 잔해처럼 흐트러진 진실의 퍼즐을 맞추며 미궁에 빠진 사건과 두 남녀의 관계에 관한 치밀한 조서를 작성해나간다.
매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손꼽히며 2005년 제1회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가 자신의 스물여섯번째 장편소설 『사고』를 통해 드디어 ‘사랑’에 대해 입을 연다. 카다레는 단순해 보이면서도 한없이 복잡하고 미묘한 현대의 사랑, 그리고 그 안에 잠재된 불안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사망 사고를 둘러싼 미스터리와 두 연인의 에로티시즘을 함께 녹여낸다.
공항으로 향하던 중 협곡으로 추락한 택시와 사고로 사망한 남녀
그들을 죽음으로 이끈, 백미러에 비친 충격적인 진실은 무엇인가
사건 발생 일주일 만에 깨어난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봤거나 봤다고 믿는 광경은 분명 사고의 원인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장면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두 사람은 서로 힘겹게 키스를 하려 했다”는 말을 되뇔 뿐이다. 고작 택시 뒷자리에서 키스를 하는 남녀의 모습이 운전자를 그토록 혼란스럽게 만든 것인가? 어쩌면 그가 본 영상은 그저 환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두 피해자와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했던, 사건의 유일한 열쇠를 쥔 듯한 운전기사의 말은 사건을 미궁으로 빠지게 할 뿐이다.
수사 결과 택시에 탑승했던 두 승객은 모두 알바니아인으로 밝혀진다. 남자는 유럽회의에서 서부 발칸반도 문제를 담당하는 분석가이며 여자는 오스트리아 고고학 연구소 연수생이다. 그들은 주말 이틀 밤을 함께 보낸 후 호텔 프런트에서 택시를 불렀다. 사고 차량에는 아무런 결함이 없고, 사고가 발생할 만한 조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뒤따라오던 목격자들의 말대로 멀쩡히 달리던 차가 공항을 17킬로미터 앞둔 지점에서 갑자기 추락했다. 두 사람이 만들어낸 강렬한 이미지에 운전자가 주의를 빼앗겨 사고가 발생한 것이라면 사건의 핵심은 연인으로 보이는 두 남녀의 관계에 있다.
유럽 각지의 호텔 숙박 기록, 사진 속 여자의 행복한 얼굴,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간 애정이 가득한 편지 등은 그들이 연인 관계였음을 확증하지만, 남자의 메모에 적힌 ‘조건’과 ‘콜걸’이라는 단어, 여자의 일기 속 ‘죽음 이후의 만남’과 같은 표현 등 여러 가지 증거물과 주변 인물의 증언이 더해질수록 그들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점점 모호해지기만 한다. 급기야 두 사람이 또다른 비밀을 감추기 위해 연인 행세를 했다는 의혹과 더불어 유럽회의 소속의 남자를 겨냥한 정치적 살해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사랑하던 두 연인이 클라이언트와 콜걸이 된 관계의 비밀…
위태로운 사랑과 그 불안을 추적하는 어느 조사원의 치밀한 조서!
혜성같이 나타나 사건에 뛰어든 어느 조사원의 열성으로 놀랄 만큼 다양한 정보들이 조금씩 끈기 있게 접합되어간다. 알바니아와 세르비아 비밀정보국이 광기 어린 집착처럼 매달리면서도 밝혀내지 못했던 이 미스터리한 교통사고의 실마리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개인적인 고통에 의해” 움직이는 한 남자에 의해 조금씩 풀려가는 것이다. 때로는 사건의 안개 속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안에 침잠해버리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기도 하면서, 그는 단순해 보이면서도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거대하고 복잡한 비밀, 택시에 탑승했던 두 남녀, 베스포르 Y와 로베나 St.의 관계를 파헤쳐나간다. 단순 사고인지 자살인지, 아니면 살인인지 그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정체 모를 조사원은 사건 발생 40주 전으로 거슬러올라가, 경찰 조서에는 기록될 수 없었던 하나의 사건, 하나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십여 년 전부터 관계를 지속해오던 연인들이 돌연 클라이언트와 콜걸이 되었다. 두 남녀의 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사건 발생 40주 전. 단순한 사고의 정황이 아닌 사고 당사자 두 사람의 관계,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놓인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를 밝혀내는 것은 사고 당일의 날씨처럼 희뿌연 안개 속을 걷는 일과 같다. 하지만 조사원은 겉으로는 무질서해 보여도 실제로는 치밀하게 계산된 질서에 따라 수많은 모자이크 조각들을 정리해나가며 결코 쉽게 설명될 수 없는 난해한 진실과 마주한다.
“이 남자는 나를 복잡하게 만든다.
이 남자 덕분에 나는 사춘기 소녀 시절에나 꿈꾸었던,
수수께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여인이 되는 것 같다.”
로베나가 소파 옆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군.” 그의 온 존재가 그렇게 외쳐대고 있었다.
이들의 비극은 어쩌면 첫 만남에서부터 예견된 것이 아니었을까.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말했고, 남자는 자신이 여자를 감당할 수 없으리라 예상했었다. 그런 두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서로 많은 말을 했지만 사실은 절반에 그친 말들이었을 뿐, 절대로 서로에게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란하지만 절대로 만날 수는 없는 평행선처럼 그들의 관계가 지속될수록, 서로에 대한 욕망만큼 그들의 불안 역시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만난 지 일주일 만에 중부유럽 어느 도시로 사흘간 여행을 제안한 남자, 이 제안이 반갑지만 자신이 쉬운 여자로 비춰질까 망설이는 여자, 그리고 남자의 저돌적인 태도에 못 이기듯 시작된 여행, 그렇게 유럽회의에 소속된 남자를 따라 유럽 전역을 누비며 시작된 그들의 관계. 로베나는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눈빛과 절망으로 가라앉은 듯한 남자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여행 후 한동안 아무런 기별이 없는 남자 때문에 번민하기도 한다. 베스포르와의 만남은 당시의 사회 체제가 무너진 것보다 훨씬 강력하게 로베나의 인생을 뒤흔든다.
평범한 연인들처럼 이들에게도 권태가 찾아오고, 십여 년 동안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해오면서 이들의 관계는 더욱 기이해진다. 베스포르는 로베나가 곁에 있어도 결핍감을 느끼고, 로베나는 베스포르와의 잊을 수 없는 밤들을 보낼 때마다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말들을 쏟아내고 만다. 누구보다 강렬하게 로베나를 욕망했지만 남자는 여자의 숨길 수 없는 마음을 엿볼 때마다 한발 더 도망치는 듯했고, 심지어 여자가 또다른 관계를 만드는 것조차 말리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란 존재했을까. 조사원에 의해 안개 속의 진실이 하나씩 드러날수록 베스포르와 로베나의 관계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어가고, 사건은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빠지는 듯하다.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그 오랜 딜레마와 상관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랑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사랑이란 겨우 오천 년 혹은 육천 년 전쯤에 지구상에 나타난 미약한 불빛이거나 미지의 환영에 불과하며, 인간은 이것을 마침내 받아들일지 아니면 이물질처럼 거부할지 고민하는 중일 뿐인가. 오존층이 얇아지고 사막화가 진행되며 테러리즘이 맹위를 떨치는 상황 등에 대해서는 이미 경고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아직까지 사랑이라는 감정의 불안정성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은 없었다. (58쪽)
두 사람은 자유를 되찾게 될 것이다. 로베나와 베스포르, 두 사람 모두 자유롭게 될 것이다. 의심과 헛된 모욕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일상으로부터, 반복되는 의식의 중압감으로부터, 질투로부터, 한없이 길어지는 불안하고 불쾌한 전화의 침묵으로부터, 그리고 이별로부터 두 사람은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186쪽)
두 연인을 죽음으로 이끈 교통사고와 두 사람의 관계를 밝혀나가는 미스터리로 시작된 이 소설은 점차 베스포르와 로베나, 두 사람의 불안에 뿌리내린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향해 뻗어나간다. 안개 속에 침잠하는 미스터리에서 아찔하고 선명한 두 연인의 에로티시즘으로 옮겨가는 순간 독자들은 더없이 슬픈 비극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유럽회의에 소속된 베스포르의 미스터리한 행적, 로베나와 그의 여자친구 리자 블룸베르크의 미묘한 관계,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베스포르의 꿈 이야기,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이 클라이언트와 콜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두 사람의 근원에 자리한 불안의 원인이 하나둘씩 밝혀지며 사건은 점차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만들어간다.
사건에 관해서나 두 사람의 관계에 관해서 시종일관 자욱한 안개에 휩싸인 듯 좀체 답을 제시하지 않는 이 소설을 통해 이스마일 카다레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모습 역시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손끝에 스치면서도 잡히지 않는, 명확한 진실을 통해 결코 설명될 수 없이 난해하고 기이한 리듬으로 흐르며 우리를 뿌연 안개 속에 몰아넣는 것,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고 그 형태를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베스포르와 로베나는 그들의 선택을 통해 자유를 되찾게 되었지만, 결국 두 사람은 영원히 이별을 하지 않기 위해 행한 그 선택으로 인해 결국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것일지도. 그 때문에 이 소설은 미스터리에 빠진 사건과 조금은 위태로운 사랑을 했던 두 연인의 불안을 추적하는 어느 조사원의 조서(調書)이자, 사고처럼 시작되었고 결국 비극적인 사고로 사라져버린 두 사람의 사랑을 향한, 우리의 아련한 사랑에 작가가 보내는 한 편의 슬픈 조서(弔書)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고전을 탐독하는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가 보물처럼 숨겨놓은
작품 속의 메타포, 『돈키호테』부터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까지…
이스마일 카다레는 작가로 데뷔한 지 오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고전을 탐독한다고 알려져 있다. 작가의 독서 경향이 작품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인지 그는 고대 신화 및 고전의 원형에 뿌리를 두고 베일에 싸인 알바니아의 특수한 기억과 전통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작품들을 주로 써왔다. 『사고』에서 역시 그는 수많은 고전과 신화들을 차용해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베스포르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조명하기 위해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안셀모와 카밀라, 로타리오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인용하면서 긴장감을 더하는가 하면,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재해석하며 베스포르와 로베나의 위험한 선택에 관해 묘사한다. 카다레는 이와 같은 장치들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탐구하는 한편, 사랑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그의 조국인 알바니아의 역사나 민족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대신 ‘사랑’이라는 보다 보편적인 주제에 대해 접근한다. 그러나 그의 소설에서 알바니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의 정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을 통해 세계적인 불안과 개인 내면의 불안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를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스마일 카다레는 단순하고 보편적인 사랑에 관한 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알바니아라는 특수한 공간을 끌어들여 한층 신비하고 매력적인 세계를 빚어낸다. 바로 이것이 이스마일 카다레가 가진 위대한 언어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