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만드는 기계』
이야기의 시간을 이미지의 시간으로 바꾸는 일,
그것이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를 만드는 일이다!
아무리 없다, 몇 없다 해도 세상에는 천재라 부름직한 이들이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세상의 떠들썩한 관심을 당연한 듯 흡수하는 이가 있을 것이고, 반대로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숨어들기 바쁜 이 또한 있을 것입니다. 둘 중 어떤 이가 천재의 전형일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므로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결과물 앞에서 무릎을 치며 이다, 아니다, 의 판단을 내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싶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저마다 숨기거나 감출 수 없는 ‘감(感)’이라는 게 본능적으로 존재하니 말입니다. 사설이 길었지만 이런 부연을 굳이 덧대는 이유는 지금 소개하려는 이 작가야말로 우리 시대의 숨은 고수가 아닐까 싶어서입니다. 아, 쓰고 보니 뭐랄까, 천재보다는 좀더 관록과 연륜이 느껴지는 수식어니 맘에 들어 이쯤에서 갈아타볼까 하는데요, 김진송! 자부하건대 그는 우리 모두가 알아줘야 할 우리 시대의 숨어 있는 장인 가운데 한 사람이 분명하다 싶습니다.
그런 그가, 김진송이라는 본명만큼 ‘목수 김씨’로 알려지기도 한 그가 한 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라는 제목의 책이지요. 쉬운 단어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제목이라지만 그 의미는 사실 간단치가 않습니다. ‘이야기’와 ‘기계’가 한데 물려 글과 이미지를 양산해낸다는 일이 쉽게 연상되지는 않는 까닭입니다. 이야기의 주된 뼈가 서사성이라 할 때, 나무로 깎여 전시장에 오롯이 선 그의 나무인형들은 짐짓 그 서사를 저마다 몸에 껴안고 있음에도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결과보다 과정의 중요성에 호기심을 품기에는 사람과 시대 모두 바쁘다는 아우성 속에 살아가고들 있으니까요.
말을 엮어 이야기를 만드는 것과 톱니바퀴를 물려 기계를 만드는 것은 부분 혹은 부품들을 논리적인 절차와 구조를 통해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내는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가 아무리 복잡해져도 이야기는 늘 한계를 드러낸다. 이야기는 나무토막이나 톱니바퀴에 얽혀 있는 구조와 작동의 논리적인 치밀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기계장치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이야기를 엮어내고 그걸 풀어내는 기계장치란 결국 간단한 서사를 물리적 장치를 통해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이야기를 만드는 건 사람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 이야기」 중에서
생각 끝에 그는 움직이는 나무를 고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단단하고 큼직하여 깎기만 해도 되는 나무가 아니라 버려지고 쪼개지고 제멋대로인 작은 나뭇조각들을 주워 그들만의 스토리를 구상했고 거기에 톱니를 물렸습니다. 톱니바퀴가 굴러가면서 발생하는 시간과 율동 속에 급기야 ‘움직인형’들이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로 탄생하게 되는 거지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속에는 이런 과정 속에 태어난 ‘움직인형’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습니다. 1부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 이야기’에서는 비교적 상세히 그 과정들을 설명하면서 ‘움직인형’들의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고, 2부와 3부는 각각 소소하면서도 숨어 있는 소품 같은 ‘움직인형’들의 이야기를, 마지막 4부에서는 ‘개’와 ‘의자’를 소재로, 그들을 역전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과정 속에 빚어지는 생각을 동화 형식으로 담았지요.
목수인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인형들이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상상 그 이상의 매력을 갖고 있다면 글의 맛 또한 그에 팽팽히 견줄 정도입니다. 미술평론, 전시기획, 출판기획 등의 일을 하면서 시각문화와 문화연구에 대한 전방위적인 저작을 써온 그답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끌어가는 솜씨가 무척이나 탄력적이거든요. 유머와 재치는 물론이거니와 사유의 진폭이 크고 깊어 절로 이야기의 굴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자신들을 발견함과 동시에 품게 되는 욕망이 있으니 바로 그것, 소유의 마음이 아닐까 하는데요.
제작 도면과 한 컷 한 컷 분할된 사진들을 이번 책에 친절히 담은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습니다. 저자는 이를 직접 촬영하고 편집하여 영상작업으로도 만들어두었다지요.(2013년 1월 27일까지 세종문화회관 1층에서 열리는 <상상의 웜홀-나무로 깎은 책벌레 이야기展>을 보러 가시면 직접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를 통해 인정하게 되는 사실은 상상력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는 이야기를 지어낼 줄 압니다. 더불어 그 이야기를 이미지로 구현할 수 있는 미학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토대로 기계적인 장치로 움직여내는 논리적인 이해가 출중합니다. 글을 쓰는 이는 글만 쓰고, 조각을 하는 이는 조각만 하고, 기계를 다루는 이는 기계만 다룬다는 식의 구태의연한 발상에서 벗어나 그는 한 몸으로 이 모든 걸 다 합니다. 왜 못 하냐고 반문할 지경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간파하고 있다면 장르를 막론하고 빗대지 못할 데가 없다는 것. 그래서일까요, 만들 것에 쓸 것이 여기저기 널려 있으므로 그의 손가락은 얼마나 바삐 굽혔다 펴질까 떠올려보게도 되었습니다. 부지런한 농부를 닮았을 그의 손, 물론 그는 이 모든 과정이 비단 손으로만 하는 일이 아니냐며 특유의 건조한 말투로 답하겠지만 말입니다.
작가의 말
누구나 이야기를 꿈꾼다.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기발한 상상이 드러나는 이야기까지. 상상의 벌레들이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남긴 자국은 하나로 이어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상상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허구의 나뭇잎을 쏠아대는 이야기꾼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에게 들려지기를 꿈꾼다. 누구는 말을 하고 누구는 글을 쓰며 누구는 그림을 그리고 누구는 노래를 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이야기가 항상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생각과 상상과 경험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면서 다른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세계에 우리는 머물러 있다. 그것은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생각과 경험과 상상의 폭이 서로 다른 까닭이다. 나의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가 될 때 벌어지는 생각과 상상의 틈은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 나의 글과 너의 이미지가 만나면 소통되지 않는 답답함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시간이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움직이는 모든 것은 시간에 빚지고 있다. 이야기의 구조란 시간의 흐름에 맞물려 있는 기계장치와 같은 것이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돌아가는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며 어떤 기능도 수행할 수 없고 구조 자체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는 실체가 없다. 이야기는 시간이나 공간 속에 붙들어 맬 수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야기일 뿐인 이야기를 이미지로 만든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나무를 깎고 쇠를 녹이고 물감을 발라 그려낸 모든 이야기는 다시 이야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야기의 서사성이 이미지의 서사성으로 바뀐다 해도, 시간을 뒤죽박죽 흔들어놓아도 이야기는 다시 재빨리 물길을 트고 새로운 이야기로 흘러간다. 이제 그게 이야기라는 것을 조금은 안다. 시간의 톱니바퀴를 굴려 상상의 공간에 잠시 머물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