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은 확인하지 않고, 아니 확인 없이도 믿는다
그리하여 비겁한 사람들을 겁먹게 하고
정직한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갖게 한다.”
봄이면 살구꽃이 만발하고,
누님들은 흰 저고리 입고, 흰 머릿수건 쓰고
푸른 보리밭에 앉아 김을 매고,
방에 누워 있으면 벼가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여름밤 강가에서 잠든 아이들 얼굴 위에서
밤새들이 울고, 달이 훤하게 산을 밝히던 그 시절.
산천은 가난하고, 삶은 누추해도
섬진강가 진메 마을의 봄날은 참으로 찬란하더라.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이 너무도 희어 아름다웠던 고향 마을. 그러나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그곳. 이 책은 김용택 시인이 신작시와 산문으로 풀어낸 한바탕 그리움의 축제다.
봄이면 진메 마을에는 매화며 살구꽃이며 벚꽃이 차례차례 피어난다. 특히 오금이네 집 돌담에 기대선 커다란 살구나무에 꽃이 만발하면 온 동네 지붕 위로 살구꽃이 날린다. 그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회고한 김용택의 『살구꽃이 피는 마을』은 아주 오래됐지만 정겨운 흑백사진 같은 책이다. 6·25전쟁 당시 피란지의 굴속에서 오랜만에 사촌을 만난 아이들이 얼싸안고 훌쩍훌쩍 뛰는 모습, 이름도 예쁜 금화, 태수, 현철이, 용조 형, 복두, 정남이 누나, 윤환이 등 한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무들과 이룬 아름다운 운명공동체, 교실이 없어 운동장 벚나무에 흑판을 매달아놓고 그 앞 맨땅에 앉아 ‘가갸거겨고교구규’ 공부를 하던 1학년 시절, 돼지오줌보에 바람을 넣어 만든 공으로 하던 공차기, 얼굴이 고운 이웃동네 총각 사진사가 오면 곱게 머리를 땋아 갑사댕기를 드리고 분을 바른 동네 누님들이 서로 어깨를 묻고 사진을 찍던 봄날, 그 애잔하고 색 바랜 사진들이 이 책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머리에 서리가 내린 환갑의 시인은 문득 유년 시절로 돌아가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사람들, 되돌릴 수 없는 애틋한 날들을 추억하며 섬진강과 그 자신이 가장 아름다웠던 날들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는 하룻저녁에 이야기를 딱 세 자리씩만 해주셨는데,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조르면 늘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이놈들아,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사는 벱이여.”
(…)
이 세상의 모든 죄악들도 다 땅따먹기 놀이에 다름 아니다. 어렸을 때 아이들이 땅과 노는 것은 땅과 친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나, 어른이 되어 하는 땅따먹기는 전쟁과 같다. 아무 땅에나 금을 그어놓고 땅따먹기를 하던 그 순진한 마음이 숨어버린 곳은 어디일까. _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