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에 라킨만큼 우리의 기억에 남는 문장을 쓴 영미 시인은 없다.”_타임스
“20세기 후반 영미 시인의 원형으로서 라킨의 명성은 21세기에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_뉴욕 타임스
2003 포이트리 북 소사이어티 선정 ‘지난 50년간 영국인이 가장 사랑한 시인’
2008 타임스 선정 ‘영국의 가장 위대한 전후 작가’ 1위
20세기 영국 최고의 시인 필립 라킨
솔직담백하고 꾸밈없는 그의 시세계를 만나다
2008년 타임스가 선정한 ‘영국의 가장 위대한 전후 작가’에 조지 오웰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으며 T. S. 엘리엇에 이은 20세기 영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필립 라킨. 영미권에서 라킨의 명성은 조지 오웰이나 엘리엇만큼 대단하지만, 국내에서 그의 이름은 매우 생소하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세계의 주요 시인을 소개하는 ‘문학동네 세계 시인 전집’은, 사소한 일상에서 포착한 삶의 허무를 솔직담백하게 그려 전후 영국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낸 필립 라킨의 시를 국내에 처음으로 완역 소개한다.
필립 라킨은 1922년 8월 9일 잉글랜드 워릭셔 주 코번트리에서 시(市) 재무담당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십대 중반부터 W. H. 오든과 T. S. 엘리엇의 작품을 모델로 삼아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옥스퍼드의 세인트존스 칼리지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했고, 1학년 때 <리스너>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대학 때 조우한 소설가 킹즐리 에이미스와는 시와 재즈 음악으로 교류하며 평생을 친구로 지냈다. 그는 1943년부터 죽을 때까지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독신으로 살았다.
라킨은 1945년에 첫 시집 『북쪽으로 가는 배』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오든과 윌리엄 예이츠의 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모더니즘 시였다. 비슷한 시기『질(Jill)』(1946) 『겨울에 한 소녀』(1947) 두 권의 소설을 출간하기도 했는데, 이후로 더이상 소설은 발표하지 않았다. 벨파스트에서 사서로 일하던 1955년 두번째 시집『덜 속은 사람들』을 출간했다. 이 시집은 그해 12월 타임스가 선정한 ‘올해의 책’에 오르며 라킨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라킨은 이 시집에서 전통적인 시 형식을 복원하고,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시를 쓰며 자신만의 시풍을 완성했다. 1964년 출간된 세번째 시집 『성령강림절 결혼식들』은 모더니즘으로 인해 멀어진 시와 대중의 거리를 좁혔다는 평을 받으며 그의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라킨의 마지막 시집인 『높은 창문들』(1974)은 다소 난해하다는 평가가 있었음에도 출간 첫해에만 2만 부가 팔려나가며 그가 독자에게 사랑받는 시인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그는 1961~71년에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기고한 재즈 평론을 모아 『재즈의 모든 것: 기록일지 1961~68』을 출간하기도 했다.
『필립 라킨 시전집』은 『북쪽으로 가는 배』를 포함해 『덜 속은 사람들』『성령강림절 결혼식들』 『높은 창문들』 등 네 권의 시집과, 시집으로 엮이지는 않았지만 영국인들에게 오늘날까지 애송되는 그의 시들을 하나로 묶었다. 사랑의 좌절, 죽음과 상실이라는 시의 보편적 주제를 전후 도시인의 일상에서 포착해 성실하고 진솔하게 담아낸 라킨의 시들을 김정환 시인의 번역으로 만날 수 있다.
일상의 시인, 대중의 시인
필립 라킨은 시에서 감상이나 낭만을 최대한 자제했고, 평범한 일상을 정직하고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그가 사용한 시어 역시 종종 대화체이거나 때론 통속적이기까지 한 일상어들로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모더니즘 문학이 범람하던 1940년대의 흐름에 반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남긴 상처, 종교적 가치를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을 예민하게 관찰한 그가 낭만을 노래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모더니즘이 일반 독자를 배제했다며, 전통적인 시 형식과 전통적인 시적 태도, 즉 시가 모든 인간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원칙을 회복하려 했다. 잉글랜드의 시 독자들은 모더니즘을 비판하며 일상어로 말을 건네는 시인 라킨의 등장을 반겼다. 라킨은 일상 어법의 사용, 전통적 시 형식 및 가치의 복원으로 시와 대중의 거리를 좁히려 한, 일상의 시인이자 대중의 시인이었다.
김정환은 해설에서 라킨 시의 소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로버트 로웰은 “전후 어떤 시인도 시적 계기를 이렇게 포착한 적이 없다”는 말로 이 시집[『덜 속은 사람들』] 출간을 반겼고, 장르를 넓혀 비유하자면 구소련 전설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가 몇 년 선배 호로비츠를 일컬어 했던 말 “얼마나 위대한 피아니스트인가, 그러나 얼마나 쩨쩨한 음악 정신인가”를 약간 변형한 것에 가깝다. 즉 얼마나 쩨쩨한 소재인가, 그러나 얼마나 위대한 시 정신인가.
라킨이 자신의 시세계에 전후 영국 도시인의 일상을 견실하게 불러들이기 시작한 것은 토머스 하디의 작품들을 접하고 쓴 두번째 시집 『덜 속은 사람들』에서부터였다. 라킨은 개인의 직접적인 경험을 엄격한 시 형식으로, 우울하면서도 위트 있게 표현해내기 시작했다. 다음은 『덜 속은 사람들』에 맨 처음 실린 시 「어떤 아가씨 사진 앨범에 몇 줄」이다. 김정환의 해설에 따르면 “일상 어법의 ‘시적’이 능수능란해지고 서정이 쓰라리다”.
마침내 당신 앨범을 내놓았고, 그것이,
일단 열리자, 나를 미치게 했다. 당신 온갖 나이가
무광 유광으로 두꺼운 검은 쪽 위에!
너무도 많은 사탕 과자, 너무도 풍요로운:
나는 숨이 막힌다 이런 영양분 이미지들에.
내 회전 눈알이 탐닉한다 자세와 자세를—
땋은 머리로, 마지못한 고양이를 움켜잡은
또는 당신 자신 털로 덮인, 상냥한 소녀-졸업생
또는 머리 무거운 장미 한 송이 치켜 올리는
격자 구조물 아래, 또는 챙 좁은 트릴비 모자
(중략)
말의 온갖 의미에서 경험적으로 진실되다고!
아니면 그건 그냥 지난 것? 그 꽃들, 그 대문,
이 안개 낀 공원과 자동차 들, 가혹하게 따진다
그냥 끝났다는 것만으로 당신
내 가슴 오그라들게 한다, 낡아 보임으로써.
그래,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분명, 우리는
배제에 울 뿐만이 아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를 맘놓고 울게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우린 알지 있었던 것이
우리를 찾아와 정당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슬픔을, 아무리 열심히 우리가 눈에서 페이지까지 갭을
가로지르며 울부짖더라도. 그래서 나는 남아
애도한다(결말의 기회 없이)
당신을, 울타리에 기댄 자전거로 균형 잡은 당신을
궁금하다 당신이 알아챘는지, 절취,
당신이 목욕하는 이 사진의 그것을 응축한다,
요컨대, 이제 아무도 나눠가질 수 없는 과거를,
당신의 미래가 누구 것이든 간에 차분하고 건조한,
그것은 당신을 하늘처럼 지탱하고, 당신은 누워 있다
변할 수 없이 사랑스럽게 그곳에,해가 갈수록 더 작아지고 더 뚜렷해지면서.
생의 누추에서 포착한 상실과 덧없음의 순간들
라킨은 전후 영국 도시인의 일상을 마치 스냅샷을 찍듯 포착해내며 현대의 도시 문명과 중산층의 세계를 그려냈다. 그의 시는 주로 현상이나 사건을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시작한 다음, 사랑, 죽음, 상실 같은 인간의 보편적 고민의 차원으로 전환되거나 확장되곤 한다. “나에게 박탈감이란 워즈워스의 수선화 같은 것이었다”는 그의 말에도 잘 나타나 있는 이러한 주제들은 시인이 나이 들어감에 따라 더 농도 짙어졌다. 전성기로 평가되는 세번째 시집 『성령강림절 결혼식들』에서 라킨은 “아슬아슬한 균형 도처에서 죽음이 반짝이고, 소란스럽고, 가혹하게 들쑤시”는 것을 직시하고 있으며, 그의 시는 점차 “그 들쑤심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 시집은 어느덧 황혼기에 접어들어 죽음 앞에 허무를 느끼는 한 인간으로서 시인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다음은 『성령강림절 결혼식들』에 실린 시 「구급차들」의 한 연(聯)이다.
마침내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멀리
사랑의 교환으로부터 떨어져 눕는다
가닿을 수 없는 방 속에
교통은 갈라져 그 방 지나가게 하고
남아서 올 것을 더 가깝게 오게 하고,
흐릿해진다 거리(距離), 우리 모두인 그것에.
네번째 시집 『높은 창문들』에서 라킨의 시는 전보다 더 직설적인 표현을 시도하면서 난해해지는 경향을 보이지만 여전히 “때때로 해석 불능도 불사하면서 시인은 죽음과 덧없음, 자신의 낡았음을 가혹하게 응시”한다. “첫 시집에 편재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노년화를 통해 해소되고 염세가 단순화”하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은 『높은 창문들』에 실린 시 「바다로」의 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진행되는, 그것 일체, 여전히 진행되는!
눕고, 먹고, 자는 것, 밀려오는 큰 파도 듣는 데서
(귀는 트랜지스터, 하늘 아래
충분히 길든 그 소리에) 아니면 점잖게 위아래로
이끄는 것, 그 긴가민가 아이들, 주름 장식 하얗고
엄청난 대기를 파악해보려는 중인 그들을, 아니면 휠체어
굴려 사지 굳은 노인네들이 모종의 마지막 여름
느껴보게 하는 것, 명백하게 여전히 벌어진다
반쯤 연례적인 즐거움으로, 반쯤 제의로,
삶의 현장이자 고뇌의 기록, 라킨의 시가 자아내는 공감과 울림
라킨은 난해하고 추상적이어서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모더니즘 문학을 비판하며 사소한 것, 평범한 것, 세속적인 것, 즉 구체적인 사물과 경험 들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명쾌하고 정직한 어법으로 대중이 읽을 수 있는 시를 썼다. 지금 그는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했고,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일상과 겹치는 그의 시 구절에서 위로와 기쁨을 느낀다.
라킨은 “보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쓴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필립 라킨의 시를 모으는 작업은 단순히 그의 시편들을 모으는 작업이 아니다. 시로 옮아간 라킨의 삶과 고뇌의 기록을 모으는 것이며, 동시에 전후 영국의 한 지식인, 아니 그의 시를 읽으며 공통의 경험을 발견하고 공감하는 모든 이의 울림을 자아내는 일이다. 『필립 라킨 시전집』은 한국 독자들에게도 많은 위로와 공감, 그리고 울림으로 다가갈 것이다.
필립 라킨에 쏟아진 찬사
라킨은 단호하고, 솔직담백하고, 위트 있고, 우울하다. 그는 자신에게 박탈감이란 워즈워스의 수선화 같은 것이라고 했지만, 그가 시의 형태로 남긴 삶의 결실은 박탈이 아니라 선물이다._뉴 크라이테리언
라킨은 사랑의 좌절과 죽음을 매끄러운 문체와 소설가의 디테일로 표현한 위대한 시인이다._월 스트리트 저널
만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쓰인 영시 가운데 단 한 편을 고르라면 의문의 여지 없이 필립 라킨의 「새벽의 노래」를 선택할 것이다. _A. N. 윌슨(영국 작가, 칼럼니스트)
라킨은 시를 불신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로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시를 썼다. _X. J. 케네디(영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