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틀란티스
한국문학의 심해를 가르고 솟아오른 섬 『겨울, 아틀란티스』
이상문학상과 동인문학상 수상작가 최윤의 신작장편소설『겨울, 아틀란티스』가 출간되었다.
참신하면서도 다채롭고 깊이 있는 소설세계를 구축, 문제적인 중단편을 잇따라 발표하며 문단의 높은 평가와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최윤의 두번째 장편소설『겨울, 아틀란티스』는 없는 것, 부재(不在)하는 것, 그러면서도 지금 이곳의 삶을 규정짓는 도저한 그 무엇을 찾아나선 사람들의 신비스러운 탐색을 그리고 있다. 숙명적인 사랑을 나눈 연인의 돌연한 실종, 그리고 이어지는 폐허의 나날들 속에 부재하는 마음의 대륙, 신화의 저 너머로 사라져버린 환상의 섬 아틀란티스를 찾아가는 길고 긴 탐색의 여정이 속도감이 넘치는 경쾌한 문장과 시적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섬세한 묘사를 통해 펼쳐진다.
사랑하는 연인의 갑작스런 사라짐이라는 상처를 공유하고 있는 소설 속 두 여인은 환상의 섬 아틀란티스를 찾는 여행을 통해 잃어버린 사랑의 기억을 복원하고자 한다. 절절하고 필사적인 그들의 갈망은 상실과 부재의 시간 이후 신화의 바깥에 아득히 머물러 있는 꿈의 흔적을 몽환적으로 뒤쫓는다. 작가 최윤은 부재 속에 웅크리고 있는 존재의 허무를 추리소설적 기법으로 전개하며 우리네 삶에서 분명한 답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전언을 남긴다.
또한 소설가 장기영의 죽음과 그의 작품 읽기를 통해 삶과 소설의 본질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즉 허구의 세계인 소설과 현실을 넘나들고 가로지르며 삶과 소설의 관계를 문제삼고 존재의 의미에 대한 추리를 펼쳐보이는 고단위 지적 소설이 바로『겨울, 아틀란티스』인 것이다. 이 작품은 최윤만의 독특하고 마술적인 흡인력이 강력한 자장을 일으키며 한국문학의 심해를 가르고 솟아오른 하나의 아름다운 섬과도 같다.
"그는 내 삶을 훔쳐 글을 쓰고 있어요!"
소설의 화자는 이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스물여덟 살의 소설가 지망생. 어느날 2년간 같이 지낸 그녀의 연인 Z가 아무런 예고도 전조도 없이 돌연히 사라진다. 그가 남긴 흔적이라곤 어디에도 없다. 그후 그녀는 슬레이트 지붕의 낡고 기울은 창턱이 있는 낡은 집에 기거하면서 폐허의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차에 그녀는 최모라는 정체가 모호한 사내로부터 묘한 제안을 받는다. 한진영이라는 중년 여성 성악가의 나날의 행적을 추적해 보고하라는 것. 일자리를 찾는 중이었던 그녀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유령 같은 미로 속의 일이 시작된다.
창 저편의 호텔에 묵고 있는 한진영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사라진 남자의 행방을 찾고 있다. 조용한 광기와도 같은 시선을 지닌 한진영은 때로 호텔 밖으로 산책을 나가는 것 외에는 K산장이라 불리는 숙소에 틀어박혀 장기영이라는 인기 소설가의 소설들을 밑줄을 쳐가며 정독한다. 그녀의 밑줄이 추적하는 것은 옛 남자 고진의 행방에 관한 단서다. 왜냐하면 장기영의 소설 곳곳에는 자신의 사생활이 들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급기야 "그는 내 삶을 훔쳐 글을 쓰고 있어요!"라고 확신하며 장기영의 다음 소설이 언제 나올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전국을 떠돌며 비극적인 사랑을 나눈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 아직까지 나온 적이 없는, 그들이 헤어지던 때의 얘기가 다음 소설에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영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죽어버리고......
소설의 본질에 관계하는 메타소설-작가 최윤이 소설에 바치는 헌사
감시자 이학과 피감시자 한진영은 서로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어느날 갑자기 실종된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있는 공통의 상처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진영을 감시하기 시작한 지 보름만에 이학은 그녀와 맞대면하기로 결심하고, 한진영은 그녀를 친구처럼 맞이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얘기를 다 털어놓는다. 그들은 아틀란티스처럼 상실되어버린 부재하는 마음의 대륙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찾고 있을 뿐 잃어버린 과거(연인)에 대한 열망은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한진영은 허구인 소설의 세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소설이란 삶의 있는 그대로의 반영이다. 장기영의 소설을 통해서 자신의 잃어버린 사랑을 복원하고자 광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단적인 예다. 이 지점에서 소설『겨울, 아틀란티스』는 메타소설의 영역으로 건너간다. 즉 소설과 삶의 본원적인 관계를 문제삼는, 소설의 본질에 관계하는 소설인 것이다.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소설 그 자체이며,『겨울, 아틀란티스』는 소설에 바치는 헌사이다.
사랑을 상실한 외로운 영혼의 기항지, 아틀란티스
장편『겨울, 아틀란티스』는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마술적인 문체를 바탕으로 시종 추리소설적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검은 안경에 지팡이를 들고 있던 신원불명의 남자가 건조한 웃음을 웃으며 이상한 일을 맡기던 곳" 같은 문장은 읽는이로 하여금 급격히 소설 속으로 빨려들게 하는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장황한 설명이나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를 배제한 채 차분히 의문점을 풀어간다. 그러나 장기영의 죽음에 이르는 소설의 말미에서도 소설의 주요 수수께끼는 시원스레 풀리지 않는다. 재기를 위해 한진영이 여는 독창회장에 나타난 한 사내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독자로 하여금 그가 한진영의 옛 연인 고진이 아닐까 추측하게 할 뿐이다.
작가는 이와같은 추리소설적 기법을 통해 삶의 한가운데 버티고 있는 텅 빈 부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른다. 돌연히 찾아오는 존재의 부재. 삶은 부재가 남기고 간 흔적일 뿐이다. 이학과 한진영이 그토록 부재의 흔적을 쫓아 광기의 열정에 사로잡히는 까닭은 절대적 사랑에 대한 갈구, 과거의 상실된 기억의 복원을 통한 자기정체성의 회복을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아틀란티스란 부재의 다른 이름이다. 미궁의 삶이 부재 뒤에 이르는 곳, 사랑을 상실한 외로운 영혼의 기항지인 것이다.
최윤과 함께 떠나는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
이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소설가 장기영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참으로 압권이다. 김승희 시인은 이 장면을 "한국 현대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의 하나"라고 찬탄하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욕조 속에 푸른 잉크로 쓴 마지막 책의 글자들이 다 풀어져 욕조가 해저처럼 푸르스름하게 물들여진 속에 자신의 모든 비밀을 안고 아틀란티스 대륙처럼 조용히 사라져 가는 소설가 장기영의 죽음. 그런 죽음의 장면을 창조해낸 작가 최윤. 허무를 이토록 아름답고 허무보다 더 허무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진리가 없다는 무에 바쳐지는 인간의 처절한 헌사를 이렇듯 고요하게 적멸이 주는 이상한 평화로 더 잘 묘사해낼 수 있겠는가."
장기영의 죽음이 암시하듯 이 소설은 해저의 심연으로 사라진 아틀란티스 대륙처럼 허무의 심연으로 추락하는 현실에서 없는 것을 찾아가는 부재에의 열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장편『겨울, 아틀란티스』는 소설 속 또다른 소설 공간으로 우리를 이끌며 부재하는 꿈의 대륙, 그 미지의 세계로 최윤과 함께 여행을 떠나도록 권유하고 있다.
작가 최윤은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나 프랑스 프로방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강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불문학 연구와 우리 문학의 해외 소개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1988년 『문학과사회』에 중편「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2년 단편「회색 눈사람」으로 동인문학상을, 1994년 단편「하나코는 없다」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속삭임, 속삭임』, 장편소설『너는 더이상 너가 아니다』와 산문집『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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