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의 독공(篤工) 끝에 완성한 필생의 문제작, 최창학의『아우슈비츠』출간
4·19세대의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최창학의 장편소설『아우슈비츠』가 출간되었다. 장편소설『긴 꿈 속의 불』
을 발표한 이후 오랜 기간 작품 활동을 중단해왔던 그는 15년 만에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장편소설『아우슈비츠』를 통해 신과
구원이란, 우리 문학에서 낯설면서도 심오한 주제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나는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근원적인 문제로서의 생존, 사랑, 죽음, 그리고 죽음 뒤의 영혼 문
제까지도 이야기해보려고 했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은 그 동안 한국문학이 회피해온 테마를 향해 육박해 들어가고
있다. 대학교수라는 최고의 엘리트 신분이며 독실한 크리스찬인 주인공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충격적인 사건의 진상을 추
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역사적 진실의 은폐 위에 구축된 현실의 허구성을 강력히 고발하면서 영화조차도 넘볼 수
없는 소설적 진실의 승리를 원숙한 사유와 필치로 드러내고 있다.
최창학씨는 1941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8년 계간『창작과 비평』에 중편「창」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소설집『물을 수 없었던 물음들』『가사자의 꿈』『바다 위를 나는 목』과 장편소설『긴 꿈속의 불』『
하늘의 침묵』 등을 펴냈다. 현재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신(神)을 향한 실존적 방황의 대서사 70년대에서 80년대 초까지 활발하게 전개된 최창학의 문학세계는 암울한 현대의 묵시록이라 할 만큼 우리 시대의 자화상
을 선연히 보여주었다. 담백하고 절제된 묘사를 특징으로 한 그의 소설은 실존의 검은 늪을 탐사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실존의
고고학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제 최창학은 그 음울한 실존의 늪을 건너 마침내 신과 인간, 죄와 벌, 심판과 구원이란 필생의 주제에 도달했다. 그는 15년
이라는 긴 세월 동안 혼신의 노력으로 신을 향한 실존적 방황의 대서사를 완성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신을 향한 너무나 인간적
인 고뇌와 방황을 치밀하고 입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야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누구에게나 근원적인 실존적
물음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세기말을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결코 피할 수 없는 화두(話頭)임에 틀림없다. 장대한 필력과 심원한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최창학은 신학대학 교수인 박광렬의 아버지 살해 사건이라는 가공할 만한 실화(實話)를 통해 이 화두를 정
면으로 탐문한다. 작가는 집요하고 심도 있게 살해의 동기를 추적하면서 질문 하나를 던진다. "박광렬은 왜 아버지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 그에게 돌을 던질 자 너희 중에 있는가. 그를 영혼의 법정에 세울 자 누구인가."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하지만 대답해야만 하는 긴박한 물음을 제기하는 작가의 어조는, 그러나 의외라 할 만큼 차분하고
침착하다. 그는 흥분하거나 비약하는 법 없이, 일견 추리소설을 연상시키는 경쾌하면서도 견고한 이야기 전개 방식을 통해, 회
전하는 나사처럼, 사건의 핵심을 향해 차근차근 접근해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광주학살에 이르는, 오욕으로 얼
룩진 현대사의 인간성 마멸의 현장을 아프게 돋을새김한다. 광주학살과 아우슈비츠 학살이야말로 우리 시대 이 땅의 역사와 현대
세계사 속에서 가장 경악할 사건이 아니겠는가. 작가가 그것들을 원용하여 소설을 전개한 것은 그 사건들이 그 누구라도 인간
아닌 신을 부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처한 최후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인간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신과 동물 사
이에 찢겨 있는 존재론적 이중성을 선명히 드러낸다.
참기독교정신이란 무엇인가
장편소설『아우슈비츠』의 화자는 소설가 도섭과 시나리오 작가인 정원이다. 그들은 영화감독인 범준의 의뢰를 받아 시나리오
를 쓰기 위해 신학대학 교수가 아버지를 권총 살해한 사건을 취재한다. 취재 과정에서 그들은 돈 문제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했다
는 경찰의 공식적인 입장이 완전한 허구임을 밝혀낸다. 그렇다면 견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신학대학 교수인 박광렬이 왜 아버지를
살해했을까. 그 살해 동기를 찾는 것이 이 소설의 기본 골격이다.
소설이 제시하는 살해의 동기는 대체로 아버지 박태봉의 우상 숭배와 반인륜적인 음행(淫行), 그리고 광주학살의 숨겨진 책임
자라는 전력이다. 그러나 아버지 박태봉을 죽인 자가 아들 박광렬인가, 아니면 변태적 간음의 희생자인 며느리 지윤정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하면서 사건은 더욱 복잡해진다. 박광렬이 직접 살해를 했는가, 아니면 아내를 대신해서 살인죄를 뒤집어썼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처럼 분명한 결론을 숨겨둔 채 작가는 진정 구원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박광렬의 반기독교적 행동은 스스로를 희생제단에 바치는 기독교적 행동으로 풀이할 수도 있게 된다.
작가는 이 소설 속의 기독교는 상대적인 종교로서의 기독교이기보다는 한 절대자로서의 신을 내세우고 있는 보편적인 종교로
서의 기독교로 확대 해석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기독교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장편『아우슈비츠』는 인간성 위에 도사린 신이라는 까다롭고 미묘한 존재의 문제를 심층적
으로 다루고 있다.
최창학 문학이 거둔 개가이자 한국문학의 진정한 성숙을 알리는 지표
이 소설의 또 하나의 매력은 수많은 영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부터 <꽃잎>
에 이르기까지 수십 편의 영화 이야기가 이 소설의 육체를 형성한다. 영상 이미지를 빌어 우리 시대 현실의 적확한 해석을 이 소
설은 구체화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신을 향한 이 작가의 심오한 문제의식을 또다른 각도에서 검증해볼 수 있는 요소로 작용
한다. 결국 이 소설은 영화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신을 향한 실존적 고뇌와 내면의 번뇌를 장대한 서사의 줄기로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오랜 문학적 침묵을 깨고 최창학은 도저한 정신의 산물로서 심원한 주제를 담은 장편소설을 선보였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오
랜 기간 위기와 불확실성의 소문에 둘러싸인 채 지내온 한국문학이 드디어 안개지대에서 벗어나 밝은 햇살 아래 나섰음을 본다.
그것은 최창학 문학이 거둔 개가이자 한국문학의 진정한 성숙을 알리는 지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