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문학동네의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은 문학과 인문학의 경계에서 지성과 사유의 씨앗이 된 작품들, 인문 담론과 창작 실험을 매개한 작가들로 꾸려진 상상의 서가다. 사회적 인식과 개성적 상상세계를 교차시키고 캄캄한 관념의 갱 속에서 빛나는 사유의 광맥을 캐낸 작가들, 기존 분류체계에 갇히길 거부하는 글로 무한한 영감을 준 작품들의 서가다. 우리는 이 서가에서 제도권 지식의 얼어붙은 내면에 인식의 도끼를 내리꽂고 사유의 개화를 이끈 창조적 정신과 만난다. 이 만남을 통해 시대를 진단 ․ 비판하고 인간을 되물었던 (인)문학의 본령을 되찾고자 한다. 숨은 작가, 낯선 작가, 바깥의 작가들을 조명하고, 문학과 인문학의 행복한 넘나듦을 감행한 그들을 축복하고자 한다.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선집 형태로 소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에서는, 이미 독일 시적 사실주의의 대가로 불리는 빌헬름 라베Wihelm Raabe의 작품을 국내에서 처음 출간한 바 있으며, 이어 프랑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조르주 페렉의 실험성 높은 작품들을 필두로, 사회 문제를 비판적 의식의 정갈한 문체로 다뤄 긴 여운, 깊은 울림을 주는 이탈리아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Antonio Tabucchi, 상속받은 재력을 바탕으로 일평생 유희하는 광기의 글쓰기를 보여준 레몽 루셀Raymond Roussel, 프랑스 현대문학에서 페렉과 더불어 울리포의 자장 안팎을 넘나들며 실험문학의 정수를 보여준 레몽 크노Raymond Queneau, 역사와 문학의 박학다식을 절제된 산문으로 풀어내 르네상스적 인간 면모를 느끼게 하는 이탈리아 작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Claudio Magris, 남아프리카공화국 태생의 보츠와나 작가로 인종차별에 맞서며 내재화된 정치 현안을 감성적 삶과 결부시킨 베시 헤드Bessie E. Head, 중국 현대문학을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킨 문제 작가 옌롄커閻連科의 작품들을 속속 출간할 예정이다.
【안토니오 타부키는 누구인가】
이탈리아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1943~2012)는 유럽의 실천적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현실과 허구의 정치적 역사적 긴장관계에 놓인 한 인간의 존재방식을 치밀하게 작품으로 형상화한 참여작가로 유명하다. 베를루스코니 정부를 향해 거침없는 발언을 했던 유럽의 지성인이자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던 걸출한 작가이면서, 페소아의 중요성을 전 세계에 알린 번역자이자 명망 있는 연구자 중 한 사람이다. 『이탈리아 광장』(1975)으로 문단에 데뷔해 『인도 야상곡』(1984)으로 메디치 상을 수상했다. 정체불명의 신원을 추적하는 소설 『수평선 자락』(1986)에서는 역사를 밝히는 탐정가의 면모를, 페소아에 관한 연구서 『사람들이 가득한 트렁크』(1990)와 포르투갈 리스본과 그의 죽음에 바치는 소설 『레퀴엠』(1991),『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1994)에서는 페소아에 대한 열렬한 애독자이자 창작자의 면모를, 자기와 문학적 분신들에 대한 몽환적 여정을 쫓는 픽션 『인도 야상곡』과 『꿈의 꿈』(1992)에서는 초현실주의적 서정을 펼치는 명징한 문체미학자의 면모를, 평범한 한 인간의 혁명적 전환을 이야기하는 『페레이라가 주장하다』(1994)와 미제의 단두 살인사건 실화를 바탕으로 쓴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1997)에서는 실존적 사회역사가의 면모를, 움베르토 에코의 지식인론에 맞불을 놓은 『플라톤의 위염』(1998)과 피렌체의 루마니아 집시를 통해 이민자 수용 문제를 전면적으로 건드린 『집시와 르네상스』(1999)에서는 저널리스트이자 실천적 지성인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20여 작품들이 40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주요 작품들이 알랭 타네, 알랭 코르노, 로베르토 파엔차 등의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수많은 상을 휩쓸며 세계적인 작가로 주목받았다. 국제작가협회 창설 멤버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으며, 시에나 대학에서 포르투갈어와 문학을 가르쳤다. 1943년 9월 24일 이탈리아 피사에서 태어났으며, 2012년 3월 25일 예순여덟의 나이로 제이의 고향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암 투병중 눈을 감아 고국 이탈리아에 묻혔다.
【내용 소개】
존재의 본질을 캐묻는 초현실주의적 미스터리이자 철학적 탐정소설
어느 시체안치소에 운반된 신원미상의 주검. 영안실 담당 스피노는 자신은 살아 있고 그는 죽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이 의문사를 추적하는 탐정이 된다. 이 사람은 진정 누구인가. 살아 있는 스피노의 정신과 죽은 카를로 노보디의 몸은 여기서부터 평행이 된다. 이 둘의 출렁거리는 여정 자체가 생생한 삶이자 한 편의 순수한 꿈으로 화한다. 우연이란 없다. 이제 세계는 무한한 필연적 신비이다.
“사실상 수평선 자락은 기하학적인 장소다. 우리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안토니오 타부키
“수염을 기른 스무 살 남짓은 너일 수도 있어.”
이 책은 지극히 사소한 한 죽음에서 시작된 실존적 사유의 족적이다. 어느 낡은 병원의 시체안치소에서 일하는 주인공 스피노, 그는 자신의 연인 사라와 이탈리아의 한 골목에서 조용히 자신의 일상을 영위해나가는 평범한 젊은이이다. 어느 밤, 이곳에 실려온 한 청년의 주검, 스피노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이 존재의 죽음 앞에서 어떤 끈질긴 탐문 속에 휘말려든다. 그와 비슷한 또래인 20대 초중반의 이 청년은 누구인지, 어떻게 죽었는지, 죽기 전 그의 삶은 어떠했는지, 그의 의혹은 점점 현실화되어 언론에 미확인 시체 사진 속 이름으로 남은 ‘노보디’(영어식 표기로 하자면 노바디Nobody)의 진짜 정체와 행방을 쫓아가는 여정으로 번진다. 그는 신문사에서 일하는 코르도를 만나 새로운 정보를 캐보려 하고, 그 시체의 반지에 새겨진 날짜와 시간을 암호문처럼 읽어내고, 그의 옷에 남은 흔적과 사진 한 장에서 이 세계 내 존재로서의 실마리를 찾아내는데……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스피노에게 세계는 더이상 무화된 죽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보이고 구하고 찾아나서는 것 하나하나가 단서가 되어가는 필연의 세계가 된다. 미지의 존재는 자신의 인식을 일깨우는 동력이 되고, 죽은 자의 영혼은 탐색을 행하는 그의 육체와 한몸이 된다. 이 스피노의 여정과 너무나 극적인 대비를 보여주는 것은 사물과 존재에 대한 인식행위를 막는, 이 죽음과 아무 상관없이 영위되고 유린되는 현실체제의 논리이다. “스피노는 그의 머리에 맴도는 그 죽음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이 현실에 분노한다. 죽은 이의 옷에서 나온 사진 한 장을 현상해나가는 행위, 그 사진의 프레임 안팎을 치밀하게 살펴보고 이 현실 속에서 찾아나서는 행위, 이는 “가까운 과거의 고고학”이라고 명명되는 실체의 그 흔적과 얼룩을 지우려 하는 세계와의 싸움이다. 그리하여 그의 탐색에서 점점 미끄러지는 무수한 기표들의 세계 속에서, 오히려 스피노는 점점 알 수 없는 미지의 실체가 자신의 내부에서 현상되는 지점을 발견한다. 세계의 실체를 기하학적 방법론으로 탐구했던 철학자 스피노자를 연상시키는 스피노의 이 존재 탐사는, 이로써 존재의 무수한 겹 속에서 드러나는 보이지 않는 것과의 필연적 맥락에 대한 인식 속에서 우리의 사유를 순수한 해방의 세계로 이끈다.
【본문 보기】
녹색 철제 다리가 달린 조그만 대리석 테이블이 네 개 있다. 대리석이 흡수해서 제 것으로 만든, 포도주와 커피의 원형 자국들이 상형문자를 그려낸다. 해석해야 할 조그만 형상들, 다른 손님들, 다른 저녁 시간들이 남긴 가까운 과거의 고고학.(18쪽)
스피노는 그의 머리에 맴도는 그 죽음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건 세상의 거대한 몸통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작은 죽음일 뿐이었다. 이름도 없고 이야기도 없는 무의미한 시체, 사물의 구조물에서 떨어져나온 하나의 파편, 잔여물이었다.(36쪽)
그는 사물을 우리에게 돌아오게 만드는 힘과 우리가 우리의 얼마만한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게 되는지를 생각했다…… 그는 사물을 이루는 하나의 질서가 있으며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법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이란 사물들 사이의 진정한 연결을 파악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 바로 그것이었다.(91쪽)
밤에 꿈을 꾸었다. 오랫동안, 너무나도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꿈이었다. 어린애 같은 꿈. 그는 가볍고 순수했다. 꿈을 꾸면서 그는 그 꿈을 다시 발견했다는 묘한 자각이 들었다. 이것이 그의 순수를, 하나의 해방처럼, 넓혀주고 있었다.(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