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의 시인이자 타국의 의사로 살아온 마종기 시인이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과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 보내는 따스한 시선
물길을 역행해 고향으로 돌아오는 연어들처럼
저멀리 들려오는 시인의 목소리
우리 얼마나 함께
눈을 감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나는 누구와 이어져 있는지.
얼마를 살고, 얼마를 울고, 얼마나 노래했는지를.
고국의 시인이자 타국의 의사로 살아온 세월이 벌써 반백년. 시인 마종기는 1959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해 본과 1학년 재학중 「해부학교실」을 발표하며 의사로서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삶을 동시에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떠났던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늘 고국을 바라보며 울고, 웃고, 노래했다. 그 아득한 세월을 지나 의사생활에서 은퇴한 후 십 년간 고국의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과 새롭게 적은 몇 편의 글을 엮어, 산문집 『우리 얼마나 함께』를 펴냈다.
시인이자 의사로 한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지니고 있는 서정과 가치관이란 무엇일까. 그는 차가울 것만 같은 의사도, 뜨거울 것만 같은 시인도 아니다.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나 더 많은 세월을 미국에서 보냈다. 이렇게 경계인으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가 그동안 참고 있던 숨을 깊게 몰아쉬며, 가슴속에 맺힌 그리움을 글로 풀어냈다.
이 책은 시인의 시집이나 다른 산문집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세세한 일상과 생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심(詩心)이 되었던 맑고 투명한 마음은 사랑하는 가족과 여러 인연들로부터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화작가 아버지, 현대무용가 어머니를 비롯하여 동생들과 세 아들, 친구들, 문단의 지인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정 깊었는지도 우리는 새삼 느낄 수 있다. 오십 년 세월 꾸준히 시를 써온 시인이 눈을 감고 되돌아보는 풍경에는 필연적으로 그리움의 정서가 가득하다.
사소한 그리움으로 불러본다, 아 당신!
이 책은 총 다섯 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각의 챕터 제목은 모두 마종기 시인의 시구(詩句)에서 따온 것들이다. ★ 1부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에서는 어린 나이 피난을 갔던 마산에서의 추억에서 시작해 철없던 시절 떠난 경주 여행, 미국에서 만난 특별한 인연, 아버지의 묘를 개장해 어머니의 유분과 함께 합장했던 날, 존경하던 신부님과의 추억, 장욱진 화백과의 인연 등, 사소하지만 가슴에 사무치는 에피소드들을 소개하고 있다.
시인은 이렇게 비록 타국에 있지만 자신과 이어져 있는 고국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인연의 끈으로 자신의 거리를 가늠한다. 물리적으로는 다른 국경을 밟고 서 있으나 그의 시를 읽으며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감성을 공유해온 사람들에게 시인과의 거리는 그 누구보다 가깝다. 그래서 이 산문집은 시인이 스스로에게 띄우는 진실한 고백이자 고국에 있는 친구와 동료, 그리고 조카들에게 보내는 편지와도 같다.
이제 나는 그 마산, 나의 마산에 갈 것이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도시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친구의 말에도 사실 겁나지 않는다. 내가 왜 시인이 되었겠는가! 남보다 튼실하고 확신에 찬, 싱싱한 상상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 아니었겠는가. 나는 바다 앞에 서서 내 고향 어머니가 나를 불러주는 그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눈물 어린 어머니의 은초록빛 바다를 눈이 아파올 때까지 볼 것이다. 물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여름의 꽁치떼가 활기차게 헤엄치며 나를 반겨줄 것이다. 다음날에는 어릴 적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 백발을 쓸어넘기며 소주를 마실 것이다. 그간에 쌓인 할말들이 너무 많아 우리는 밤을 지새울지도 모르겠다.
_본문 18쪽, ‘그곳으로 가는 길’ 중에서
★ 2부 [당신이 와서야 파란 하늘이 생겼다]에서는 시인의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상다반사로 채워진다. 집 앞 마당의 꽃밭 가꾸기, 아내가 배우던 가야금 소리, 아무 이유 없이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던 날,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던 추억, 오십 년 만에 고국에서 맞은 함박눈에 대한 감격 등…….
하지만, 이런 소회들은 단순히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다. 꽃 가꾸기를 좋아하는 시인은 「아카시아 꽃」이라는 시를,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여행한 후에는 「기도하는 아랍인」을, 파타고니아를 여행한 후에는 지금까지 많은 이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는 시 「파타고니아의 양」을 발표한다. 그뿐 아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머릿속으로 내내 수평선과 지평선을 그리던 시인은 「지평선, 내 종점」이라는 시를 통해 그 마음을 적었다. 이렇듯 시인의 일상이 그대로 시로 연결되는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기구한 세월을 관통하여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길 한복판에 멍하게 서 있는 나를 따뜻이 감싸안아주었다. 고국이란 단어가 새삼 내 가슴에 물밀듯 몰려왔다. 어지럽게 비틀거리며 살아왔지만 너도 이 나라 백성이었구나. 축복을 받아라. 내 머리와 어깨는 차곡차곡 고국의 흰 눈을 뒤집어썼다. 아, 차가운 느낌까지 황홀한 축제로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운 고국의 눈. 그 순간의 함박눈은 나를 이 풍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_본문 125쪽, ‘이토록 행복한 사람’ 중에서
★ 3부 [하늘을 향해 다시 날아오르는 외로운 새처럼]에서는 주변의 사람들, 특히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가족’에 집중하고 있다. 항상 듬직하게 곁을 지키면서도 다양한 분야의 책과 예술을 접하도록 해주셨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타국에서 나고 자란 세 아들들……. 한국과 미국의 국경을 넘나들고, 시인과 의사 사이에서 줄을 타던 시인에게도 그 뿌리만큼은 명확하고 탄탄했다. 어떤 시련과 격정에도 굳건하게 힘이 되어준 가족. 그들은 마종기 시인의 문학세계의 뿌리가 되어준 기반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더불어, 세 아들들을 타국에서 번듯하게 키워냈음에도 고국의 언어를 충분히 익히지 못한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유품을 물려주지 못하는 안타까움 등, 그동안 어디에도 내보이지 않았던 깊은 속내도 조심스럽게 꺼내놓는다.
일흔이 넘은 내 나이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인데 그전에 몇 개 안 되는 아버지의 작품과 유물을 어떻게든 고국으로 보내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그 결심은 물론 내 아이들이 할아버지의 유물을 보관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전제했다. 미국에서 난 세 아들은 의사, 변호사, 사업가로 좋은 교육을 받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지만 한국어 실력이 부족해 아직 할아버지의 동화 한 편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잘 이해하지도 못했다. 또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비록 친할아버지라고 해도 유물을 대물려 간직할 자격이 없다고 내가 판단했기 때문이다.
_본문 141쪽, ‘분명한 자격’ 중에서
★ 4부 [극진한 사랑은 아마 사람의 추위 속에서 완성된다]로 넘어오면 이야기의 외연이 보다 넓어진다. 미식축구 선수 하인스 워드를 비롯한 혼혈인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해 한국 내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에 관한 인권 문제, 미국의 물질만능 태세를 꼬집기도 하고, 관광지에서의 에티켓 및 공중도덕 준수에 관한 일침, 세계인의 행복 지수, 그 밖에도 기부 문화에 대한 일견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청년 시절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생활을 해온 마종기 시인이었지만, 그는 결코 고국을 잊을 수 없었다. 늘 고국의 풀 한 포기마저 아른거렸고, 그래서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고국 땅을 밟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적인 멋을 추구하며, 한국문학의 번역에도 힘써왔다. 더불어 국내의 유수한 문학가들이 존재함에도 노벨문학상의 영예가 한 번도 우리나라 작가에게 돌아온 적이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며 한국문학의 위상을 누구보다도 고심하고 앞장선다.
이렇게 해서든 저렇게 해서든 우리는 우선 우리의 문학작품을 잘 번역해서 자꾸 세계에 소개해야만 한다. 그냥 뿌려대거나 한국에 도로 가져올 것이 아니라 그 나라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피부로 우리 것을 느끼게 해야 한다. 이제 겨우 이삼십 년 역사밖에 안 된 우리 문학의 번역 작업이 아닌가. 그런 면에서 한국문학번역원이나 대산문화재단의 부단한 번역 및 홍보는 큰 박수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 덕에 언젠가는 삼 년 연속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색다른 기록을 우리가 만들어낼지 누가 알겠는가.
_본문 209쪽, ‘피부로 통하는 대화’ 중에서
★ 5부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은 이 책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이 된다. 시 쓰는 의사로서, 또한 미국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그렇게 경계인으로 평생을 살아왔던 마종기 시인의 일생에 걸친 깊은 고뇌와 성찰이 이곳에 모두 녹아 있다. 그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할 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도 스스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의사와 문인. 내게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때로는 분초를 아껴 허둥대며 살아왔지만 뒤돌아봐도 나는 한 점의 후회도 없다. 나는 내가 시인이었기에 외국에서 힘들다는 의사생활을 잘 이겨냈고 오히려 동료 의사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었다. 내가 의사였기에 오랜 세월 한 해도 그치지 않고 모국어로 시를 써올 수 있었다고 믿는다. 낙오되고 잊혀진 시인이 아니고 이 나이까지 현역 시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렇게 이상하고 복잡한 내 삶은 생의 끝까지 틀림없이 이어질 것이고 그 어느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눅들지 않은 채로 이 기구한 생生을 사랑하며 살아가리라고 약속할 수 있다.
_본문 248쪽, ‘시 쓰는 의사의 빛과 그늘’ 중에서
인간에게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우정과 신뢰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에게 아픈 이별이 없다면, 인간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 만남의 순간이 없다면 나는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고 또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 죽고 난 다음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쓰지 못했을 것이다.
_본문 275쪽, ‘몸을 기대고 싶은 말’ 중에서
또한, 의사 자리에서 은퇴 후 고국에 들어와 모교에서 <문학과 의학>이라는 교과목 강의를 하기도 했던 시인답게, 이 책에서도 의학계의 발전을 위하여 문학과 의학의 통섭을 수차례 강조하고 있다. 통계화된 과학과 정확한 수치만으로 인간을 재단하고 치료할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통찰이 있어야만 환자를 더욱 이해하고 스스로도 전인격적인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어느 날 갑작스레 떠났던 낯선 나라에 두 발을 붙이고 선 채 하루도 고국을 향해 바라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제 의사의 자리에서 은퇴하여 그토록 염원하던 시인으로의 삶만을 살아가고 있는 그는 외로움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그냥 꿀꺽 삼켜버려야 했던 그간의 시절을 지나, 비로소 그 모든 감정의 체증을 꼭꼭 씹어 넘길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시는 그렇게 그와 함께 오십 년을 살았다. ‘내 가슴에 외로움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시인은 여전히 계속해서 외로움을 껴안고 시를 쓸 것이다.
빛나는 시기를 지나 이제는 선명한 언어로 당신에게 말을 건네는 시인의 손짓과 그 글에 스며들어 한걸음 내딛는 독자의 모습은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아름다운 만남인 동시에 소통의 풍경이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조용한 ‘교감’을 통해 온전한 ‘이해’에 다다른다. 가만히 다가가 그 앞에 서기만 해도 어딘지 마음이 놓이고 무언가 건네받은 느낌이 든다. 마주대고 앉은 두 무릎 사이에 그 어떤 조건은 필요하지 않다. 그저 당신과 나만이 존재할 뿐이다.
시인이란 마치 마라톤 주자와 같아서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해야 낙오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오십여 년을 한결같이 달려왔지만, 그 어디에도 완주를 알리는 화려한 결승 테이프가 없었다고 말하는 마 시인. 그런 시인의 외로운 독주에 슬며시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함께 뛰고 싶다. 그리고 시인보다 딱 한 걸음만 먼저 결승점에 도착해 그를 맞이하고 싶다. 그렇게 시인의 활짝 웃는 함박웃음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