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등지고 저의 그림자를 경작하는 자의 뒷모습은 환하면서 외롭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의 앞섶은 그리하여 어두운데”
윤성학 두번째 시집 『쌍칼이라 불러다오』
윤성학은 도시의 경작생이다. 그의 경작은 평범하지만
그림자의 경작은 그의 창안이며 우리 시대의 업적이다.
-황현산 해설 「도시의 토템」에서
도시인의 비애로 만들어낸 생활 윤리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버둥대는 현대인의 애환을 시로 표현해온 윤성학 시인. 그의 두번째 시집 『쌍칼이라 불러다오』가 출간되었다. 2006년 첫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를 펴낸 지 7년 만이다. 시인이라는 이름보다 직장인의 이름이 더 오래된 그. 두 이름을 가지고 산다는 건 어떤 거냐 물으니 ‘짜파구리’와 같단다. 전혀 다른 두 이름이 만나 새롭고 특별한 맛이 난다는 뜻.(윤성학 시인은 농심 홍보실에 근무한다.) 생의 부조리와 생활의 균열, 매일을 꼬박꼬박 살아내는 직장인의 비애를 소재 삼아 때로는 관조로, 때로는 익살로 끌어가는 그의 시와 똑 맞아떨어지는 답변이 아닐 수 없다.
허리가 아프다
아침에 잠을 깨면 제일 먼저 국부를 만져본다
나는 이 집의 국부다
굳세게 일어나야 하는 국부다
(아담 스미스는 왜 하필 아담인지)
어느 날부턴가 아침에 국부가 기상해 있지 않으면
바닥에서 몸을 뜯어내기 전
일어난 것도 누워 있는 것도 아닌
그를 일으켜세운다
이것이 국부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면서
등뼈에 하루치 하중을 입력한다
오늘 아침 국부가 나보다 먼저 일어나
경제학 원서를 들춰보고 있었다
아직 나의 직립은 무사하다
나는 여전히 국부를 위한 자유경쟁에 종사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능률과 생산성과 자유방임 사이를 오가며
아주 오래 기억해내지 못한 것이 있었다
가장 깊은 곳
가장 깊숙한 바닥에 누워 있던
한 문장이
번쩍
등뼈를 관통하는 순간에
나는 가장 뜨겁고 단단하게 일어서곤 했다
-「국부론」 전문
한 집안의 가장, 즉 ‘국부(國父)’인 화자는 “등뼈에 하루치 하중을 입력”해 ‘국부(局部)’를 일으켜세운다. ‘국부(國富)’를 위한 “자유경쟁에 종사”하며 “능률과 생산성과 자유방임 사이를 오가”느라 “아주 오래 기억해내지 못한 것”이 있단 것을 깨닫는 날도 있다. “가장 깊은 곳/ 가장 깊숙한 바닥에 누워 있던/ 한 문장이/ 번쩍/ 등뼈를 관통하는 순간에/ 나는 가장 뜨겁고 단단하게 일어”선다 말하는 그는 천생 시인일 터.
첫 시집에서 “권법 없이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이곳”을 살아내기 위해 “강하게 파고들었다가/ 빠르게 빠져나오는” 당랑권을 택했다면, 이번엔 “일말의 동요도 없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상대의 중심 깊숙이/ 두 개의 칼날을 밀어넣”고 “아무 표정 없이 들어올”려 “자신보다 높이 추켜올”리는 지게차의 “쌍칼”과 그 작동에서 “결투의 원리”를 배운다. 그러나 ‘쌍칼’이 ‘두목’이 되는 법은 없는지라, 결국 “오늘도 끝내 누구와도 마주서지 못”한 채 “자신의 몸을 세워둘/ 네모 칸 하나 찾아가는 일”(「57분 교통정보」)이 전부인 게 우리네 일상이다. 이렇듯 희화된 삶의 풍경은 시인의 눈으로 본 생활인의 모습, 생활인으로 살며 발견한 시적인 순간들에서 빚어졌다.
“실평수 17.15평의 생”에 “공연히 평수만 차지하고 있”는 “벽” 하나. “버리지 못했던 그리움들”, “나를 떠난 눈물들”, “일상의 문장 안에 자꾸 늘어만 가는 괄호들”을 탓하며 벽에 이마를 부딪혀본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내 안으로 들어와 벽이 된 것”. “그런데 당신은 어쩌자고/ 이것이 여태 내가 걸어온/ 내력이라 말하는가”라는 마지막 행(「내력벽(耐力壁)」)에서 내력(耐力)이 내력(來歷)으로 읽히는 순간, 많은 것을 보내고 참고 떠나온 우리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강에 갔다가 돌아옵니다
돌아오기 위해서도 사람들은 앞으로 걷습니다
흘러간 날들의 내가
나를 불러 돌아서는데
뒷걸음이지만 나는 가까스로 앞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강습(江習)」 부분
온천물에 뛰어드는 눈송이를 보라 지난 세기 자살공격 비행단은 극명한 목표가 있었다 돌아오지 않기 위해 먼 길을 가본 자는 안다 이 눈송이들의 투신으로 무엇이 바뀌는가 한세상 뛰어들어도 온천의 수위는 높아지지 않고 물은 식지 않는다
눈을 떴다 이 섬은 희고 청한하다 무리 중 누군가 무의미를 무의미라 말한다 나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의미는 어디까지 의미 있는지 잠시라도 아름답다면 그것은 의미인지 무의미인지 아름다움은 누가 규정하는지 묻지 않았다
-「자살공격 비행단」 부분
“흘러간 날들”의 부름에 돌아서서도 우리는 “앞으로” 걸어야 한다. “뒷걸음”으로라도. 그런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은 강처럼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을지. “한세상 뛰어들어도” 바뀌는 것 없는 “투신”에 우리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의미는 어디까지 의미 있”을까. 이렇듯 “해를 등지고 저의 그림자를 경작하는 자의/ 뒷모습은 환하면서 외롭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의 앞섶은 그리하여 어”둡지만(「평범경작생」), 황현산 평론가가 해설에서 언급했듯 그것은 적어도 “희망 없이 경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시는 희망 없는 것들이 유일한 희망이 되는 어떤 비밀한 시간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니던가” 반문한다.
● 시인의 말
당신이라는 이름의 수많은 가능성 또는 불가능성들.
그리하여 시의 적절함에 대해
시옷에 대해
묻지 않고 오래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혼자 오래 생각해
기어이 틀린 답을 구하는 어리석은 산수였다.
식물원에서 나무화석을 만져본다.
모든 시는 나무로부터 오는 것,
화석이 되어서라도 이 지구에 남을 수 있을까.
두번째 첫 시집이라고 말해본다.
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들이 그립다.
2013년 5월
윤성학